공명하는 혼 (이케다SGI회장 대담록)
제11회 한국 경희대학교 창립자 조영식 박사
우리는 ‘천년지기’ 함께 평화의 세계를
“창립자의 마음은 창립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이케다 SGI회장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명문 경희대학교를 창립한 조영식 박사와 소카(創價)대학교를 창립한 이케다 SGI 회장.
두 사람은 서로를 ‘천녀지기’라고 불렀다. 교육으로 전쟁 없는 평화로운 사회와 물질주의를 뛰어넘은 인간주의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동지’였다.
두 사람은 1997년 11월 1일에 처음 만났다. 창대제(創大祭)와 백조제(白鳥祭)의 주요 행사인 ‘창가영광의 모임’을 함께 지켜보았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과 한글문화연구회의 학생이 ‘평화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조영식 박사가 작사한 노래다.
두 번 다시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
두 번 다시 미명에 속지 않겠다
전쟁으로 얻은 영광은 지옥의 영광
전쟁으로는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이 전쟁을 정복할 수 없다면
전쟁이 인간을 정복할 것이다
노래가 끝나자 박사는 일어나서 박수를 보내며 이케다 SGI 회장과 포옹했다. 인사에서 솟구치는 심정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소카대학교 여러분이 미래의 위대한 지도자로 성장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얼마나 노고하며 여기까지 이룩하셨는가를 생각하면 감격으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이케다 SGI 회장이 말했다.
“성실한 인간교육의 교류는 덧셈이라기보다 곱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직스러운 ‘형인 경희대학교’와 ‘동생인 소카대학교’가 함께 손을 잡고 인간주의의 태양으로 동양을 비추며 ‘생명존엄의 황금의 세기’를 빛냈으면 합니다.”
◇
조 박사는 1951년 5월, 전신(前身)인 신흥대학교를 이어받았다. 기이하게도 이케다 SGI 회장의 스승인 도다 조세이(戶田城聖)가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한 해다.
1960년, ‘경희대학교’로 출발했다. 이케다 SGI 회장이 제3대 회장에 취임한 해다.
박사는 일본에게 억압당하고 한국전쟁으로 민족이 분단되는 비극을 직접 겪으며 대학교를 건설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 조국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교육입국(敎育立國)이라는 의지를 지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1944년 1월, 평양에 살던 박사가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소집되었다. 한국인 학생에 대한 ‘학도동원’의 일환이었다.
동지와 함께 ‘학도병 의거’를 일으켰다. 이 항일운동으로 헌병에 연행되어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6개월 동안 감옥에서 투쟁했다.
그러나 간신히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조국에는 동포간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사의 고향은 북한에 있는 평안북도다. 그러나 박사는 ‘자유가 있어야 비로소 인간이다’하고 깊이 생각한 끝에 한국으로 건너왔다. 1947년이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박사도 피난민이 되었다.
이러한 고통과 격동의 와중에 자기 재산을 투자해 빛까지 져가며 1949년에 창립된 신흥대학교를 이어받았다.
“부부는 실로 목숨을 바쳐 대학을 건설하셨군요.”
이케다 SGI 회장이 노고를 상찬하자 박사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대학에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 짧은 한마디에 묵직한 무게가 담겨있다.
1998년 5월, 이케다 SGI 회장이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나눈 대화다
신흥대학교를 설립할 당시, 이 캠퍼스에 있는 고황산은 몹시 황폐한 벌거숭이산이었다.
박사는 셔츠 한 장을 걸치고 직접 한 구류 한 그루 나무와 꽃을 심고 돌을 놓아 대학교의 환경을 손질했다.
학교 사람들은 박사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경영이 힘들어 교직원에게 지급할 월급이 부족하기도 했다. 부인 오정명 여사는 보탬이 되고자 소중한 다이아몬드 결혼반지를 전당포에 가지고 갔다. 그러나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거절당했다.
눈물을 흘리며 밤길을 걷다가 전봇대에 부딪혔다. 이마에 남은 상처는 ‘어머니의 훈장’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건설하고자 고투한 끝에 경희대학교는 한국의 ‘최우수 대학교’로 빛나는 ‘사학(私學)의 영웅’이 되어 유치원부터 대학원에 이르는 종합 인간교육기관인 ‘경희학원’으로 발전 했다. 한국과 세계에 공헌하는 유능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고 있다.
◇
“서로 존경하고 마음이 통하는 벗을 사귀게 되어 너무나 기쁘고 행복합니다.” “두 대학이 한국과 일본의 주축으로 앞장서서 역사적인 사명을 완수합시다.”(조 박사)
박사가 일흔여섯에 새긴 두 사람의 만남은 만대(萬代)로 이어지는 한일 ‘보배의 다리’를 구축했다.
1997년 11월, 조박사가 소카대학교를 방문하자 이듬해인 1998년 5월, 이번에는 이케다 SGI 회장이 조 박사의 초대로 경희대학교의 서울과 수원캠퍼스를 방문했다. 경희대학교가 ‘명예철학박사학위’를 수여했다.
1999년 5월, 제주대학교가 이케다 SGI 회장에게 ‘명예문학박사학위’를 수여했을 때에는 조 박사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
2003년 1월, 도쿄에 잇는 세이쿄신문사에서 마지막으로 대담했다. 대담에 앞서 소카대학교를 다시 방문한 조 박사가 당당한 본부동의 모습을 보고 기뻐했다.
“학교 안에 있는 건물은 물론 나무 한 그루, 동 하나에도 마음을 쓰고 있군요. 혼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만능중의와 과학기술지상주의가 만연한 세계를 염려하며 “지금 인류에는 ‘새로운 르네상스(인간부흥)’가 필요합니다” 하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 조 박사가 인생을 건 장대한 이상이자 이케다 SGI 회장과 만날 때마다 함께 맹세한 목표였다.
“이케다 선생님처럼 위대한 지도자가 이 세계를 바꿔야 합니다. 인류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향해 함께 나아갑시다!”
2012년 2월, ‘천가지 사업을 완수했다’고 불리는 평화와 교육의 거인은 아흔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 크나큰 정열은 큰아들 조정원 전 총장과 둘째 아들 조인원 총장에게 이어졌다.
경희대학교와 소카대학교는 1997년 9월, 학술교류협정을 맺은 후 수뇌가 교류하고 서로 유학생을 보내며 우호를 더욱 깊이 다지고 있다.
작년 5월에는 소카대학교의 다시로 이사장이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를 방문했다. 조인원 총장에게 창립자의 전언을 전달했다. 그때 조 총장은 가까이서 지켜본 두 사람의 우정어린 역사를 회상하며 “앞으로도 경희대학교는 소카대학교와 함께 발전하고 싶습니다.” 하고 힘주어 말했다.
이케다 SGI 회장이 박사와 새긴 만남을 기념해 시 ‘새로운 천년의 여명(黎明)’을 보냈다. 그 시에 씌어 있는 마음을 뜻있는 청년들이 계승한다.
이제 우리는
신의와 우정의 연대를 단단히 하여
‘전쟁과 폭력의 새기’에서
‘인권과 생명존엄의 세기’로
제2의 르네상스를 우러러 보며
모두 함께
새로운 천년의 여명을
사자분신(獅子奮迅)으로 열어간다
◆ 조영식
한국 경희대학교 창립자. 1921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나 2012년 2월, 아흔살에 서거했다.
서울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해 1951년 5월, 1949년에 설립된 신흥대학교를 이어받아 1960년 3월에 경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한국을 대표하는 종합 학부로 이끌었다.
유치원에서 대학원에 이르는 일관 교육의 학사를 구축해 학원장으로 취임했다.
경희대학교의 ‘평화복지대학원’은 유네스코에서 ‘평화교육상’을 받았다. 세계대학총장회의의 종신명예회장이다.
한반도의 ‘이산가족 상봉’이나 ‘한국인 피폭자 무료지원’에 힘을 쏟는 등 인도와 평화를 향한 행동은 세계에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소카대학교를 비롯해 모스크바대학교와 국립 필리핀대학교 등 각국의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명하는 혼 (11) 한국 경희대학교 창립자 조영식 박사.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