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문화권 답사를 마치고
경기도문화관광해설사
포천시회 한 웅
오늘은 포천시 문화관광해설사들의 2박3일 기간으로 신라권 문화유적 답사기 시작되는 날이다. 답사예정지는 경상북도 영주와 안동, 경주, 포항 그리고 마지막으로 충주의 상당산성으로 되어있었다.
여행 하면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이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이 생각난다. 여행준비를 다 해놓고 늦잠을 자면 가지 못하면 어쩌나 해서 뜬눈으로 밤을 새운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는 어렸을 때라 그렇다 하지만 오십이 넘은 지금도 여행가기 하루 전 날은 마음이 설레어 잠을 설치는 것은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45인승 관광버스에 여행인원도 해설사와 관계공무원, 자문위원으로 계시는 경복대 관광학과 교수를 포함해 열여섯 명으로 단출한 분위기였다.
문화관광해설사들의 견학이라 여행코스도 유적지 답사가 대부분이고 포천시가 내륙지역에 위치한 이유로 바다구경 하기가 힘들어 배려 차원에서 포항시 호미곶을 하나 첨부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들뜬 마음가운데에서도 가장 걱정거리는 시기적으로 장마철이라 삼일씩의 맑은 날씨를 보장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출발을 하면서 차안에서 답사에 필요한 물건을 나눠받고, 여행을 하게 된 목적, 회장님의 인사말씀과 자문위원으로 계시는 경복대 관광학과 교수님의 해외여행담 등이 이어지면서 세 시간 여를 달려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 영주시에 있는 소수서원이다.
서원에 도착하자 장마철이라 습기를 머금은 울창한 송림과 계곡에 어우러진 서원의 규모와 풍광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리가 그동안 포천관내나 경기일원에서 다녀본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구조 역시 그동안 보고 들어온 것과는 전혀 달라 일시적으로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끼기도 하였다가 이곳은 공부하는 학생들도 많고 건축양식도 중국의 양식이 아닌 우리고유의 양식이기에 그렇다는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서야 의문점이 풀리는 것이었다.
소수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인 안향 선생을 배향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으로 건립 당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불렸는데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경상감사 심통원(沈通源)에게 건의해 심통원이 조정에 계청함으로써 명종임금이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라고 한다.
서원 안에는 주자선생과 국보로 지정된 안향선생, 허목선생 등의 초상화를 본 것도 중요했지만 우리지역과 관련이 있는 이덕형 선생의 초상화를 보니 무엇보다도 반가웠다.
서원을 나오면서 느낀 것은 이곳은 서원 자체를 그냥 하나의 문화재로만 인식해 단순하게 보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관광객을 끌 수 있는 각종 시설을 만들어 놓아 소득 증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주에서의 첫 번째 견학을 끝내고 도착한 곳은 안동시에 있는 도산서원 이었다. 서원이 위치한 곳은 안동시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꼬불꼬불 산속 길로 한참이나 들어가 아름드리 소나무 숲과 낙동강의 강줄기가 어우러진 산기슭에 자리 잡은 도산서원은 주소로는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라고 하는 곳이며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이 학문연구와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으로 선생 사후 퇴계선생을 추모하는 제자들과 유림이 서원을 건립하였고, 선조 임금으로부터 한석봉 친필인“도산서원”의 현판을 사액(賜額)받음으로써 영남유학의 총본산이 되었다.
도산서원에서의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적이 드믄 외진 산골짜기에 위치하였다는 것과 5,000여권이나 되는 서적이 보관되었다는 것, 이황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과거시험까지 실시하였는데 응시자가 수 백 명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안동에는 서원의 숫자만 사십 여 개가 된다고 하니 역시 안동은 선비와 양반의 고장이라고 할 만 하였다.
국학진흥원을 들렸다 저녁때가 다 되어 하회마을 근처로 옮겨 저녁식사를 하고 삼십여 분간 그 지역 하회탈의 이수자에게 하회탈에 대한 전설과 설명을 듣고 나자 흐린 날씨라 그런지 어둠은 일찍 찾아왔다.
예약된 숙소를 찾아가는 길은 예상과는 달리 도시의 번화한 곳이 아니라 인적도 드물고 숲이 우거진 시골길로 자꾸만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 산속에 근사한 숙박시설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오래된 400년이나 된 서원 건물이었다. 서원 관리자에게 물어보니 이곳은 류성룡 선생의 형님의 위폐를 모신 서원이라고 하였고 서원 건물을 이용하여 숙박업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곳 역시 건물의 구조가 우리와는 차이가 있었다. 서원 앞에 누각이 있는 것도 특이 했고, 동재와 서재 앞에 있어야 할 강당은 옆쪽으로 붙어 있었다. 누각을 보고 이곳에서는 서원에서 단순하게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시설도 마련해 놓았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의미도 관계없이 건물 안에 들어선 순간 일행들은 실망의 눈빛이 역력해 보였으며 저마다 한마디씩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으며 심지어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불만의 소리도 체념으로 변하며 조금씩 적응해 가는 분위기였다.
하나밖에 없는 대중탕에서 교대로 사워를 하고 마당에는 모깃불을 피워 놓고 서원 안에 있는 누각으로 하나 둘씩 올라 가지고 간 맥주와 수박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분위기는 점차 낭만과 사색으로 무르익어갔다.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은 이렇게 깊어갔으며, 이튿날 이른 아침 피곤함도 잊은 듯 하 나 둘씩 일어나 서원의 뒷산인 부용대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십 여분을 올라 절벽 밑을 내려다보니 뿌연 새벽안개 속으로 들어오는 화회마을의 모습은 말 그대로 하나의 산수화였다.
숙소에서 마련해준 안동의 명물인 간고등어와 산나물로 만들어진 아침식사를 사백년이 되었다는 서원 마루에서 하고나자 어젯밤의 불평불만은 눈 녹듯 사라지고 음식이 맛있다. 떠나기가 싫다 등 저마다 한마디씩 칭찬이 쏟아졌다.
화천서원의 잊지 못할 하룻밤을 이렇게 보내고 우리는 바쁜 발걸음은 신라천년의 도시 경주로 향했다. 경주라 하면 누구나 한번쯤은 수학여행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다녀왔을 법한 역사의 도시이며, 지금은 도시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명성에 걸맞게 경주는 도시 전체가 가는 곳 마다 문화재와 유적으로 넘쳐나는 곳이다. 이러한 경주시를 다 돌아보려면 몇 날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관계로 석굴암과 불국사, 경주박물관 정도만을 예정하고 간 것이다.
처음으로 간곳은 석굴암으로 이곳 역시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며 700미터가 넘는 토함산 정상부근에 위치한 곳이다. 한계령 못지않은 꼬불꼬불한 길을 버스로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올라와 보니 예전과는 많이 다르게 곳곳에 볼거리를 많이 만들어 놓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아마 예전보다 경제적 여건이 좋아진 것도 있겠지만 석굴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까닭도 한몫을 했으리라고 혼자 생각해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평일인데도 관광객이 많아 보였다. 그토록 귀중한 문화재를 일제가 복구한다고 헐어놓고 제대로 맞추지 못해 부속품이 뒹구는 모습을 보며 콘크리트에 둘러 싸여있어 제습기를 계속 가동한다는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웬 지 모르게 울화가 치미는 것은 이 나라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애국심이 아닐까. 우리기술로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남겨진 부속을 전부 꿰어 맞추어 엣 모습을 되찾았다는 뉴스를 들을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하는 기대를 해보며 두 번째 목적지인 불국사로 향했다.
불국사는 이름과 같이 절 하나가 불국(佛國)을 상징하는 것으로 신라 경덕왕 때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석굴암과 함께 창건한 절로 너무나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다보탑과 석가탑, 청운교, 백운교가 있는 경주의 대표적인 절이라 할 수 있으며 절 밖에서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만을 기다리다 죽은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 뜻한 전설이 스며있는 곳이기도 하다.
불국사 견학을 마치고 경주박물관과 대능원을 둘러본 우리는 두 번째 숙박지인 포항으로 떠났다. 포항은 우리나라 동남쪽 호랑이의 꼬리가 시작되는 부분인 영일만에 위치한 곳으로 포항제철로 인해 발전된 도시이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주변의 경관을 살필 수는 없었지만 시원한 파도소리만으로도 마음이 확 트이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휴가다, 피서다 하면 대부분 바다로 향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생선회에다 매운탕을 곁 드린 저녁식사에 소주 한잔씩을 마시고 나니 여독에 지친 피로가 풀리는 듯싶었다.
이차로는 노래방으로 가서 술기운을 빌어 저마다 목청껏 소리를 높여 피로와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느라 무더운 여름밤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렇게 포항에서의 밤은 밀려오는 파도소리와 함께 깊어만 갔다.
이튿날 아침 일행은 구룡포로 가기위해 일찍부터 서둘렀다. 그곳에 가서 아침식사를 하기위해서이기도 했다. 편의점에서 구입한 컵라면으로 가볍게 속을 달래고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 영일만을 돌아 구룡포로 향했다. 맞은편에서 한눈에 들어온 포항제철의 모습을 바라보니 엄청난 규모에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호랑이 꼬리를 돌아 한 시간 정도를 달려 최종 목적지인 호미곶에 도착했다. 시원한 북어해장국으로 아침을 마친 후 서둘러 답사 마지막 날의 일정을 시작했다. 동네규모라 해야 작은 어촌에 불과한 곳이지만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는 곳이라 그런지 전국유일의 국립등대박물관을 비롯하여 풍력발전기, 해를 손으로 떠받드는 모형을 한 구조물, 호랑이의 꼬리라는 곳이라 하여 돌로 만든 호랑이 조각상, 국토 최동쪽을 상징하는 표지석 등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기념물들이 곳곳에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도 매년 정초만 되면 새해 첫 일출을 보려고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 중 하나라고 등대박물관 안내원이 소개한다.
특히 처음 보는 등대 박물관은 볼만한 것이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등대의 역사와 시설, 발전사, 등대지기들의 생활사 등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내륙지방에 사는 우리에게도 충분한 흥미와 관심을 불러 일으킬만했다.
호미곶 답사를 마치고 차로 세 시간 정도를 달려 돌아오는 길에 경상북도 최북단에 위치한 영주시 부석사에 들렸다. 처음에는 청주의 상당산성으로 계획을 잡았으나 여러 회원들의 건의로 부석사로 답사지가 변경이 된 것이다. 부석사로 가는 길에는 인삼과 사과밭이 곳곳에 산재하여 영주의 특산물임을 뽐내고 있는 듯하였다.
고속도로를 벗어나서 삼‧사십분 정도 달려 소백산 끝자락에 자리 잡은 부석사에 도착했다. 부석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로 부석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마 무량수전일 것이다. 국보로 지정된 무량수전은 교과서에도 나오며,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 배흘림기둥, 우리나라 고건축을 대표하는 건물 등 따라 붙는 수식어도 많은 건물이다. 이밖에도 부석사에는 소조여래좌상, 석등, 조사당벽화,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 숱한 국보와 보물이 산재한 절이기도 하며, 유적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도 수려하여 창건자인 의상대사의 안목에 새삼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해설사의 설명에 시간 가는 줄 모르다 갈 길이 멀다는 이유로 서둘러 답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사흘 동안의 답사도 이제는 서서히 마무리를 해야 할 시간에 접어들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와 장마철이라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비를 걱정해 가며 그야말로 숨 가쁘게 달려온 사흘이었다.
이제 긴장도 풀리고 피로도 몰려올 시간이다. 그러나 피로를 풀 시간도 없었다. 올라오는 길에 저마다 답사소감을 한마디씩 하였다. 좋은 구경을 시켜주신 시청 관계자분들과 좋은 강의를 해주신 회장님과 교수님께도 감사했고, 문화관광해설사라는 일을 하는 지라 아무래도 능숙한 해설사들의 말솜씨가 가장 부러웠고, 지역마다 산재해 있는 많은 문화재와 관광지가 그랬으며, 또한 각 고장마다 지역의 특색을 살려나가고자 하는 노력이 또한 그랬다. 서원을 하나의 민속촌 식으로 꾸며 관광지화 시킨 영주시의 경우도 그랬지만 특이한 것은 서원을 민박으로 활용한 안동시의 선택이 아마도 가장 인상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제는 우리의 선택이 남은 것이다. 시청관계자는 그들대로, 관광해설사인 우리는 우리대로 우리고장 포천을 위해 해야 할 일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