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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3)
글/김형근
당시의 미국 상황
1854년 ‘미일화친조약’은 미국에서의 불교에 대한 담론에 큰 활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1870년대가 시작되면서 많은 미국 지식인들이, 다양한 이유로 스스로 이국적인 동양을 살펴보기로 결심했다. 에드워드 모스(Edward Morse), 어니스트 페놀로사(Ernest Fenollosa), 윌리엄 스터지스 비글로우(William Sturgis Bigelow),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헨리 아담스(Henry Adams), 존 라파즈(John Lafarge), 그리고 라프카디오 헌(Lafcadio Hearn)이 이들에 속한다. 이 여행자들은 일본인의 ‘특징과 관습’에 대해 썼고, 이를 ‘서양’의 특징 및 관습과 비교하였다. 그들은 모두 일본에서 직접 불교와 접했고, 나중에 하나나 또 다른 형태의 일본 불교전통에 관한 글을 썼다. 그들 중 몇몇은 심지어 불교 옹호자가 되어 귀국하기까지 했다. 그들의 저작물들은 불교에 관한 미국의 공식적 논의를 촉발시키는 데 이바지 하였지만, 수많은 그밖의 사람들, 경전, 기관 및 사건 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에 소개하는 아널드는 1856년에 인도를 방문하였는데 그는 미국인이 아니고 영국인이다.
1850~1890년대 연표
1854년- 미일화친조약,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개항을 해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게 됨
1858년- 뉴욕에서 메이시(Macy's) 들어섬. 아직 백화점으로 구색을 갖추지 못함
1861~1865- 미국 남북전쟁
1866년 8월- 제너럴 셔먼호 사건.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으로 침입 평양에 접근하여 조선군인 납치. 식료품 약탈과 살상. 현지 관민들의 화공을 받고 침몰, 선원들 모두 죽음 19명
1869년 5월 10일- 유타주 프로몬트리 포인트에서 동부철도와 서부철도 연결. 대륙횡단철도
1868년- 크리스토퍼 숄즈가 발명하고 1874년 총기제조업체인 레밍턴사가 타자기 보급 시작
1872년- 렌시 타쿠우 유네가마 스님 4명의 스님과 함께 유럽에서 서양종교 공부한 후 미국 여행, 당시 미국에 일본 사람 70여명
1875년- 뉴욕에서 신지학회 창립
1875년- 샌프란시스코에 8개의 중국 사찰
1876년 3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전화 발명
1877년- 토머스 에디슨 축음기 발명
1879년 7월- 영국에서 출판한 영국인 에드윈 아놀드(Edwin Amold)의‘아시아의 빛, 혹은 위대한 체념, 고타마의 인생과 가르침, 인도의 왕자이자 불교의 창시자(The Light of Asia, or The Great Renunciation, Being the Life and Teachings of Gautama, Prince of India and Founder of Buddhism)를 보스톤에서 출판하여 큰 호응 얻음
1880년대 미국에서 백화점 대중화 시작.-1890년대 백화점은 신문의 주요 광고주로 등장
1880년- 스리랑카에서 신지학회 헨리 올콧과 블라바츠키 부인이 오계를 받음
1881년- 올콧‘불교교리문답( Buddhist Catechism) 출간
1882년 5월- 조미수호조약 체결.
1882년 10월- 뉴욕에서 선교사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s)가‘한국, 그 은둔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발행. 미국 개신교 선교부의 선교전략 수립에 큰 참고서 역할. 그리피스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조선인들을 위한 행위라고 한 친일인사
1884년-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 조선 입국. 선교사로 첫 번째 조선 입국
1885년 4월- 장로교 목사 호러스 언더우드, 감리교 목사 헨리 아편젤러,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 이들은 1884년 12월 미국을 출발
1885년 9월- 페놀로사와 비글로우는 일본에서 천태불교의 계를 받음
1886년 5월-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의사인 존 팸버톤이 코카콜라 발명
1887년- 캘리포니아 산타크르즈에서 필란지 다사(Philanngi dasa)가‘The Buddhist Lay'라는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하여 7년간 발행
1889년 3월 12일- 일본 정토진종 스님 카가히 개인자격으로 호놀룰루에 도착. 노동자 실태파악
1893년- 세계종교회의
1894년- 폴 카루스가 붓다의 복음서(the Gospel of Buddha)를 발행하였다.
1897년-D.T. 스즈키 미국에 도착
1897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달르마팔마 주관으로 미국에서 처음으로 석가탄신일 행사
에드윈 아널드의 ' 아시아의 빛'
에드윈 아널드의 '아시아의 빛'
1879년, 영국인 작가 에드윈 아널드(Edwin Arnold, 1832-1904)는 자유로운 운문으로 된 붓다의 일생을 출판했다. 그의 공감어린 설명은 석가모니와 예수의 삶 사이의 유사점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두 교조(敎祖)의 생각과 삶이 비슷하거나 동일하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아널드의『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이 학식있는 미국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강력하고 직접적이었다. 한 역사가에 따르면, 이 책은 “즉각적인 성공과 더불어 19세기 후반의 문학적 대사건들 중 하나를 장식했다.” 아널드의 전기작가는 이 작품이 미국에서 50만 부에서 100만 부 정도 팔렸으리라 추정했다. 만일 이 추정치가 맞다면 이 추정치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경우, 이 작품은 프랜시스 허드슨 버넷(Frances Hodgson Burnett)의 <소공자(Little Lord Fauntleroy)>와 헬렌 헌트 잭슨(Helen Hunt Jackson)의 <라모나(Ramona)> 같은 베스트셀러만큼, 그리고 아마도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허클베리 핀(Huckleberry Finn)>만큼 팔린 셈이었다. <신지학회회원(The Theosophist)> 지에서 <카톨릭 세계(Catholic World)> 지에 이르는 종교 정기간행물 리뷰들도 시평을 실었고, 대단히 많은 세속적인 잡지 기고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 책과 불교에 대한 관심은 많은 뉴잉글랜드 지식인들, 예를 들어 윌리엄 헨리 채닝(William Henry Channing), 조지 리플리(George Ripley), 프랭클린 벤자민 샌본(Franklin Benjamin Sanborn), 프랜시스 엘링우드 애벗(Francis Ellingwood Abbot), 그리고 올리브 웬델 홈즈(Oliver Wendell Holmes) 등이 쓴 열성적인 리뷰들에서 촉발되었다.
아널드 시의 인기, 불교적 관심의 정도, 미국인들을 불교전통으로 끌어들이는 이 책의 영향력이 사무엘 헨리 켈로그(Samuel Henry Kellogg[1839-99]: 장로교 목사이자 펜실베이니아주 앨러게니 소재 서부 신학세미너리 조직신학 교수)가 쓴 책 한 권 분량의 반박문 도입부에서 확인된다.
수많은 지성적인 사람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우리 시대의 가장 특이하고 시사적인 종교현상들 중 하나다. 미국에서 자신이 불교의 중요내용을 숙지했다고 인식하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다소 제한된 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관심이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무엇보다 1879년 이래 에드윈 아널드의『아시아의 빛』출판을 계기로, 불교의 인기가 아주 특기할 정도로 증대되었다.
그 후 몇 년 지나, 아널드는 미국에서 널리 강연을 하며 자신의 영향력과 불교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을 증대시켰다.
---‘미국과 불교의 만남’에서 옮김.
영국에서 출판된 이 책은 저자인 아널드의 장인인‘콩고드 지역의 초월주의자 헨리 채닝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보스톤에서 출판되었다. 아래는 '이야기 미국불교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편 윌리엄 헨리 채닝William Henry Channing 같은 사람은 1878년 그의 사위의 새 책 복사본을 콩코드 여름 철학학교의 브론슨 올코트Bronson Alcott에게 보낼 때, 그에겐 에머슨이 지녔던 것과 같은 망설임은 없었다. 채닝의 딸 패니메이 아달레이드와 결혼한 영국인 시인이자 언론인인 에드윈 아널드Edwin Arnold가 저술한 책의 제목은 '아시아의 빛, 혹은 위대한 체념, 고타마의 인생과 가르침, 인도의 왕자이자 불교의 창시자(The Light of Asia, or The Great Renunciation, Being the Life and Teachings of Gautama, Prince of India and Founder of Buddhism)'였다. 콩코드 그룹과 친했던 채닝은 이 작품을 올코트에게 보내면서 올코트의 친구들도 이 작품을 읽고 평해 줄 것을 직접 부탁했다. “시인과 시는 널리 알려져야 하며 신의 뜻으로 서양과 동양,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고대와 현대를 잇는 중개자 역할을 하는 이 나라에서 마땅히 환영받아야 한다”고 채닝은 올코트에게 주장했다.
올코트가 '아시아의 빛'의 원고를 받았을 때 그 여름학교는 계절이 지나서 막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래서 채닝이 원했던 대로 학교에서 그 작품을 선보일 시기는 놓쳤다. 그러나 올코트는 재빨리 원고를 보스턴으로 가져가서 출판했다. 올코트는“이 책이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경이롭게 받아들여질 테고, 일반 크리스천들의 마음속에는 호기심 어린 의문을 불러일으키리라”고 장담했다.
올코트가 책을 받은 지 6일 만에 F. B. 샌본Sanborn은 '리퍼블리컨Republican'지에 서평을 실었다. 샌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책의 시적인 미덕은 상당한 수준이다. 그러나 더 높이 평가할 만한 점은 아시아라는 선구자의 위대한 박애주의적 종교의 참된 정신에 대한 공감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과, 반 정도만 문명화된 사람들서양인들에 대한 풍자을 위해 그리스도교에 대한 칭찬까지 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아시아의 빛'은 미국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책은 80판까지 발간되었으며, 50만 부에서 100만 부에 이르는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이 성공은 아널드가 붓다의 이야기를 빅토리아인들의 구미에 맞게 잘 구성한 문재文才에 힘입은 바 크다. 그는 스팬서 하디Spencer Hardy, 사무엘 빌Samuel Beal, 막스 뮐러Max Muller 등의 학자들에게서 자료를 구했지만, 기록들을 나열하지 않고 이야기로 썼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그의 주인공인 붓다는 어떻든 낭만적인 영웅이고, 자신을 계발한 성인이기도 하며, 예수라는 이름은 아니지만 구세주이기도 했다.
아널드는 자신의 인도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의 배경을 한껏 이국적으로 묘사하였다. 사실 그는 관능성과 숭고한 진지함을 대단한 솜씨로 합성해냈다. 그는 싯다르타의 궁전생활에 대한 자세하고도 재미있는 묘사로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하였다. “섬세하고 진한 빛깔의 눈썹을 지닌 사랑의 사제들이…… 행복한 왕자의 졸리운 눈가에 부채질을 해 주었다”와 같은 구절뿐만 아니라, 독자들은 싯다르타가 그의 아내와 아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에서 눈물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동시에 아널드는 당시의 학자들이 갖고 있던 불교에 대한 윤곽을 잘 묘사해 놓았다. 그는 업설業說,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의 교리를 시로 만들기도 했다. 아널드가 이 작품을 쓸 무렵에 막스 뮐러 등의 학자들은 열반(nirvana)이 ‘소멸’ 내지 ‘허무’라는 당시 우세했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아널드도 이에 동조했다. 책의 서론에서 아널드는 “인류의 3분의 1이나 되는 사람들이 공허한 추상적인 개념들이나 허무를 참존재의 성과나 영광으로 신봉하게 되었다고는 도저히 믿지 않으리라”고 썼다.에 의해 미국에서 출판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의 저자 아널드는 1832년 영국 켄트지방의 그레이브센드(Gravesend)에서 태어났으며, 로체스터(Rochester)의 킹즈 스쿨과 런던의 킹즈 대학(King's College), 옥스퍼드의 유니버시티 대학(University College)에서 공부했다. 1852년 그는 옥스퍼드대 재학중에‘뉴다이게이트(Newdigate)상’을 수상하고, 1856년에는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푸나(Poona)의 데칸 대학(Deccan College) 교장으로 임명됐다. 5년 뒤인 1861년 그는 인도에서 돌아와 런던의‘데일리 텔레그라프(Daily Telegraph)'지의 편집기자가 되었으며, 1873년에는 편집인의 위치에 올랐다. 이 신문사에서 약 40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그 성과와 명성을 쌓아 갔다. 물론 편집인으로서 많은 임무를 수행했는데, 그 중에서도 스탠리(H.M. Stanley)의 리빙스턴(Livingstone) 찾기 사업을 위해서도 노력했으며, 1904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언론인인 동시에 훌륭한 시인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1879년 『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이라는 유명한 시집을 낸 이후에 『세계의 빛(The Light of World)』 제목의 시집만을 내었을 뿐,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작품 활동이 없었다. 그는 1885년 데일리 텔레그라프지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의 황폐함을 보도했으며, 이와 관련해 인도 정부에 관심을 촉구했다. 이러한 그의 실천적 행동은 1891년‘마하 보리회(Maha Bodhi Society)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아널드의 대표작인 『아시아의 빛』은 유럽을 비롯해 미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대기를 일반인들에게 최초로 알렸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아시아의 빛'다음에 출판된 '불교교리 문답‘The Buddhist Catechism'은 신지학회 중심인물인 헨리 올코트가 저술한 책이다. 올코트는 불교의 교리문답을 통해 불교의 기본 원칙을 보편적인 방법으로 명료하게 하려고 했다. 이 책은 지금도 스리랑카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책은 일본과 인도에서 번역되었고, 대부분의 유럽 언어로 번역되었다.
헨리 올코트의 불교교리 문답 발행
올코트는 앞에서 많은 설명을 했으므로 이 장에서는 간략하게 소개한다. 이 책의 저자인 올콧은 인도, 스리랑카, 일본, 미얀마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스리랑카에서 첫 번째 오계를 받고 불교신자가 되었으며,‘불교교리 문답’출판, 불교깃발 고안(1886년) 스리랑카에서 교육개혁과 불교부흥을 촉진 시킨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The Dharma or Doctrine (법 혹은 교리)
The Life of the Buddha (부처의 생애)
The Rise and Spread of Buddhism (불교의 탄생과 전파)
Buddhism and Science (불교와 과학)
폴 카루스의 붓다의 복음서(the Gospel of Buddha)
미국불교사에서 폴 카루스Paul Carus는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세계종교회의’와 인연 깊은 인물이다. 그는 이 회의에서 미국불교사에 등장하는 일본에서 온 소엔사쿠와 스리랑카의 달마팔라는 만났다. 미국불교사에서 아주 중요한 장면이다. 달마팔마는 시카고 종교회의에 등장한 스타였다.
카루스는 당시‘일원론자(The Monist)'라는 잡지와 '오픈 코트 출판사( Open Court Press)'의 편집자이며 종교와 과학서들의 저자였다. 그는 소엔 사쿠, 달마팔라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이적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과 종교의 괴리를 치유하기에는 그리스도교 보다 더 적합하다고 믿었다. 그의 초청으로 소엔사쿠의 제자인 D.Z. 스즈키가 미국에 왔으며 달마팔마가 미국에 다시 올때도 그가 초청하였다.
‘붓다의 복음서’초고가 완성되었을 때 카루스는 그것을 소엔에게 보냈다. 소엔은 이 책이 대승경전과 소승경전을 참고한 방식에 대해 승인하였다. 이 책은 카루스의 책 중에서 가장 많이 읽혔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아시아 불교인들도 이 책을 사용하였다. 스즈키는 이 책에 대해 ‘붓다의 복음서’가 나오기 전에는 불교가 너무 현학적이거나 너무 세속적으로 취급되었다. 카루스 박사는 철학과 과학의 정신을 결합하여 단순한 흥밋거리 이상의 성과를 냈다. 그는 도취된 광신자의 입장을 떠나서 불교를 공평하고 정당하게 선보였다“라고 썼다.
스즈키는 이 책을 번역하였고 소옌 사쿠가 서문을 썼다.
폴 카루스 '붓다의 복음서'
그는 서구가 새롭게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일이 “현대과학의 진보된 상태, 서구의 끊임없는 산스크리트어 연구, 그리고 비교종교에 대한 강한 호기심”에 기인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일본 독자들을 위한 주의사항도 덧붙였다. 즉 일본인들이 읽고 있는 모든 서구의 불교서적들(막스 뮐러의 '열반(Nirvana)', 스베덴보리의 '불교(Buddhism)', 올콧의 '교리 문답'과 아널드의 '아시아의 빛'을 예로 들었다)은 작가들이 지닌 천재성의 ‘탁월한 재능’이 보이는 저작이기는 하지만, 그 저자들이 “불교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진리를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카루스는 서양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차원에서 불교를 보급하려고 애썼다. 올코트와 마찬가지로 그는 대부분의 아시아 불자들이 불교의 진정한 정신을 잃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영국 팔리어 학자들과 달리 상좌부 불교도(Theravadins)와 연합하지 않고 비교하는 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오픈코트'지는 '불교의 빛'지와 마찬가지로 배타적인 불교도만을 위한 잡지는 아니고, 미국과 아시아 불자들의 의사소통을 위해 대화의 원탁을 마련하는 역할을 했다. 카루스는 일본의 대승불교도, 스리랑카의 상좌부불교도와 미국의 불교 동조자들과 서구학자들의 글을 실었다.
'붓다의 복음(The Gospel of the Buddha)', '불교와 그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비판(Buddhism and Its Christian Critics)'과 같은 책 외에도 카루스는 불교를 주제로 한 많은 글을 썼다. 이 중 하나인 '카르마: 불교의 윤리 이야기(Karma, A Story of Buddhist Ethics)'는 레오 톨스토이 백작에 의해 러시아어로 번역되었다. 이 이야기는 다른 유럽 언어로 다시 재번역 되는 과정에서 저자가 톨스토이라고 잘못 알려졌다.
카루스는 글을 많이 쓰는 저자였다. 평생 동안 60권 이상의 책을 출판했으며, 두 개의 잡지 편집을 맡아서 했다. 그리고 그의 불교 옹호 사업은 인쇄매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달마팔라의 미주美洲 마하보리 학회의 창립 구성원 중의 하나였다가 나중에는 회장으로 봉사한 이외에도, 달마팔라에게 인맥을 터주고 조언을 해 주었으며, 그의 미국 여행을 위한 얼마간의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카루스는 필시 미국에 살고 있던 다른 어떤 이들보다 불교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을 촉진하고 지속시키는 데서 영향력이 훨씬 컸다. 불교에 관한 저서와 논문, 아시아 및 서구 불교도와의 접촉, <오픈코트> 지 편집자로서의 활동을 통해, 카루스는 불교의 본질과 가치에 관한 대중적 논의에 긴요한 공헌을 했다. 카루스는 독일에서 태어나서 교육 받았다. 튀빙겐 대학에서 1876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그는 육군에 복무했고 이어 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는 경건하고 정통적인 신교도 집안에서 양육되었지만, 그러나 그는 점차 자신의 물려받은 종교전통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다. 1884년에 카루스는 미국으로 건너왔고, 미국에서 자신의 자유주의적 종교관을 보다 자유롭게 선언하고 진작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887년 12월 무렵, 그의 평생에 걸친 직업이 확정될 터였으니, <오픈코트> 지의 편집자이자 또한 출판사의 편집장이 되었다. 그는 이 직책을 1919년 2월 사망할 때까지 계속 맡았다.
카루스가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에 불교에 관해 알았다는 증거가 있지만, 그러나 특히 불교와 아시아 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미국에서 열린 1893년의 세계종교의회에서 강화되었던 듯하다. 이 행사 뒤 몇 년 지나 카루스는 불교적 사상을 옹호했고, 불교 성가를 작곡했으며, 불교 포교사들을 격려했다.
카루스는 불교인은 아니었다. 그는 1893년 세계종교의회를 전후한 저작들에서, 카루스는 자신의 합리적 종교관 혹은 그가 “과학의 종교”라 불렀던 것의 개요를 밝혔는데, 불교가 그것과 양립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불교는 과학의 발견물, 이성의 결론, 도덕성의 요구, 종교 상호간의 협력에 필요한 것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사실상, 여러 측면에서 카루스의 합리주의적 불교 해석은 계몽주의의 유산과 자유사상과의 유사점을 부각시킴으로써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다. 볼테르와 여타 계몽주의 사상가들처럼, 카루스는 종교의 진정한 본질을 규정하는 데 관심을 지녔다. 그런 본질은 독단적이고 미신적인 요소가 제거된 뒤에 남게 되는 종교적 진리의 핵심이 될 터였다. “회의주의적 계몽주의” 정신의 또 다른 후계자인 시어도어 파커Theodore Parker처럼, 카루스 박사는 “우연적인 것으로부터 본질적인 것을, 무상한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을 가려내고” 싶어했다. 이런 관심은 그가 편찬한 불교경전 선집을 위해 경전의 구절들을 선택한 방식에 분명하게 드러났다. 토마스 제퍼슨의 성서에서 그리스도교가 드러난 것처럼, 카루스의『붓다의 복음』(1894)은 미신적이고 독단적인 부가물이 없어진 불교를 제시했다. “공통의 지반으로서, 모든 진실한 불교도가 입각할 수 있을 이상적인 입장”을 구축하기 위해, 카루스는 다양한 구절들을 “조화롭고 체계적인 형태”로 배열하려 애썼다. 이 과정에서 불교 지도자들이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애썼을 때 덧붙여졌으리라 생각되는 대승불교 전통이 지닌, “전거典據에 입각하지 않은 장식물 대부분을 제거해야만” 했다. 불교 경전에 대한 이런 비판적이고 선택적인 접근은 또한 전체로서의 불교전통과 사실상 모든 종교들에 대한 그의 접근방식의 특징을 드러냈다. 그는 비교, 경쟁, 대화를 장려했는데, 특히“세계의 가장 위대한 두 개의 종교전통”사이의 비교, 경쟁, 대화를 장려했다. 왜냐하면 이런 과정을 통해 각 전통의 본질 규명에 속도가 더해지고, 보편적·비분파적·합리적 종교의 출현이 가속화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The Gospel of Buddha was an 1894 book by Paul Carus. It was modeled on the New Testament and told the story of Buddha through parables. It was an important tool in introducing Buddhism to the west and is used as a teaching tool by some Asian sects.
Carus believed that the modern world required a new Religion of Science. By the 1890s, inspired by the meetings and conversations at the Parliament of the World's Religions in 1893, he had decided that Buddhism was the closest faith to his ideal and created The Gospel of Buddha to popularize the religion in the West.[1]
The work was assembled from existing English translations of Buddhists texts, with significant amendments and reworkings.[2] His selection of texts favoured Buddhism as a philosophy without any supernatural elements. While criticized by contemporary scholars, this interpretation proved popular in the West. It proved a popular success, with a number of reprintings. It also influenced the development of Buddhist modernism in East Asia, notably in a Japanese translation of the book by D. T. Suzuki.[1]
올코트의 '불교교리문답'과 카루스의 '붓다의 복음'에는 서구 근대불교학의 오리엔탈리즘적 성향이 반영되어 있으며, 불교를 이상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들어있다. 이들 책에는 역사적 붓다, 철학자 붓다,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교사로서의 부처상이 부각되고 있으며, 붓다의 기본 교리를 철학적, 과학적 차원에서 해명하는 것을 주요한 내용으로 구성하고 있다-주 송현주의‘근대불교 성전의 간행과 한용운의 불교대전’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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