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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를 혁신하자--이병기(李秉岐)
* 시조도 한 문학이다. 소설ㆍ희곡(戱曲)ㆍ동요ㆍ민요ㆍ신시(新詩)와 같은 한 문학이다. 더구나 우리 조선에서는 역사와 그 의의가 깊은 한 문학이다. 고대 민요의 한 형식으로서 발달되어, 적어도 근 천 년(近千年) 동안을 거쳐 오늘날까지 오는 것이며, 우리의 과거의 문학을, 말하자면 과연 이 시조가 가장 소중한 것이다. 다른 가요(歌謠)보다도 또는 소설이나 기타 무엇보다도.......
* 그러나, 이 근래 어떤 이들은 이 형식만을 시조의 형식으로 아는 이도 있고 쓰는 이도 있어, 천편일률(千篇一律)로 하여 이 형식의 자수(字數)만 채워 지어 낸다. 그리하여 퍽 자유스럽게 되어 있던 시조의 형식을 도리어 부자유하게시리 하지나 않는가 하는 느낌이 난다. 이 자유스러운 것이야말로 과연 다른 나라의 기정(旣定)한 소설형(小說形)들과도 다른 점이고 또한 특성인 것이다. 이 특성이 현재나 장래에 있어서 영원히 그 생명을 뻗어갈 만한 것이다.
* 시조의 형식을 난삽(難澁 글이나 말이 매끄럽지 못하면서 어렵고 까다롭다ㆍ한 문장 안에 동사가 여러 개이거나 수식어가 필요 이상으로 많으면 난삽한 글이 된다)하고 간원(迀遠)하던 귀족문학이라 할 것이 아니라. 명료하고 평이한 대중문학으로 쓸 수 있으며, 진부하고 과장(誇長)하던 고전문학이라 할 것이 아니라, 진실하고 신선한 사실문학으로 쓸 수 있다.
* 시조의 내용은 현대 의식이 부족하면 안 된다. 시조에 음풍농월로나, 풍류운사로 알고, 한시(漢詩)에서나 어느 고전에서 얻어들은 재료나 가지고 아무 실감도 없이 흥흥거리며 읊어내는 것도 있으며, 시조는 詩든 아니든 무엇이든지 다 담아내는 한 그릇으로 알고 되는대로 써내는 것도 있으며, 어떤 이는 시조를 고적도보(古蹟圖譜)와 같은 것으로 여기고 한 점(點) 한 획(畫)이라도 빼놓을까 염려하며 정성스럽게 고시조 그것만을 모방하여 그려내는 것도 있는데 그러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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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모든 창작의 주체는 자신이 처한 세계를 반영하려고 한다. 사회, 문화적 배경은 물론 자신의 체험이나 그로 인한 정서 반응, 자신이 목격한 다른 사람의 에피소드까지. 창작품을 수용하는 자의 관점과 창작자의 의도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창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자신의 것이 아니니까. 이런 본능(?)이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예술품을 통해 역사를 읽고 시대를 읽는다. 그 중 문학은 그 힘이 가장 세고 천 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문학의 정수 시조 역시 그러하고 또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나 시대상, 규범이나 어떤 이념 등을 3장 6구 12음보의 정형이라는 그릇 속에 담아놓았다고 해서 (좋은)시조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런 것이 시조였던 때가 있었다. 앞에서 말했던 갑오개혁 이전의 시조다. 즉흥적으로도 지어지고 언어유희의 도구이기도 했던, 그래서 많은 시조가 노랫말이 되었거나 노랫말로 지어진 시조다. 그렇다고 작품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 봐도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도 많다. 하지만 다수의 시조가 ‘시절가요(時節歌謠)’라는 이름과 역할에 맞게 시절가요의 기능을 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해도 이만저만 변한 것이 아닌 현재에도 많은 시조가 고시조를 답습하듯 고민 없이 쓰여지고 있다. 문학은 사람들의 갈등과 고민과 시대적 담론을 천 년의 약속인 정형틀 안에 담아야 한다. 시조를 직조하는 언어나 내용 또한 현대적 감각과 운문 문학이 갖추어야할 요소들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시조(時調)는 시조(詩調)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4.
그렇다면 운문문학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은 무엇일까. 바로 운율, 주제, 심상이다. 시조에 있어서 운율은 가장 우선시되는 것이며 시조시인들은 이 운율이 거의 자동적으로 몸에 배어 있다. 간혹 너무 과음보를 보이는 작품들도 있지만 여기서는 운율 이야기는 넘어가도록 한다. 다음은 주제다. 좋은 주제를 끝까지 밀고 가는 힘을 말하는 것일 테니 이것도 패스. 남은 것은 심상, 즉 이미지다. 이미지가 강한 시조를 만나면 한편의 그림을 보듯, 영화를 보듯 그 잔상이 선명하게 오래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인가?
심리학 용어로는 심상, 영화에선 영상미 등을 가리킨다. 프랑스어로 image. 인간의 마음 속에 그려지는 사물의 감각적 영상을 가리키며, 기억 심상, 상상 심상도 여기에 포함된다. 예술 분야에서는 작자가 표현 대상을 감각적으로 호소하기 위하여 묘사하는 주로 은유적인 표현이며 특히 시에 있어서 이미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윤금초 ‘현대시조 쓰기’)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시학 사전’에는 이미지는 또 이렇게 정의 내려놓았다.
이미지는 신체적 지각에 일어난 감각이 마음속에서 재상된 것이다.(...)
한때 지각되었으나 현재는 지각되지 않는 어떤 것을 기억하려고 하는 경우나 체험상 마음의 무방향적 표류의 경우나 상상력에 의해서 지각 내용을 결합하는 경우나, 꿈과 열병에서 나타나는 환각 등의 경우처럼 직접적인 신체적 지각이 아니라도 마음은 이미지를 역시 생산할 수 있다. 한층 특수한 문학적 용법으로서의 이미저리는 언어에 의하여 마음속에 생산된 이미지군들을 가리킨다.
한 편의 시조에 하나의 이미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개의 이미지가 결합하여 작품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시조는 이미지군, 이미저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외부의 사물이 우리 마음에 비취진 그림자라고 볼 수 있는 이미지는 우리 몸에 담겨 있는 것이라 꺼내 쓰기만 하면 된다. 오감의 활동이 다 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시각적 심상이지만,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어느 것이든 이 감각 중 둘 이상이 함께 움직이게 되는 공감각을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20세기 초엽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난 신시(新詩)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에즈라 파운드의 ‘지하철 정거장에서’라는 시다. 어두운 지하철 정거장, 쏜살같이 검은 지하철이 들어오고 그 속에 있는 승객들의 얼굴이 불빛을 받아 순간적으로 하얗게 나타나는 장면을 표현했다. ‘유령처럼 나타나는 얼굴들’이라는 직유와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이라는 은유의 조합과 시각적 이미지와 촉각적 이미지를 교차시켜 이토록 기막힌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찰칵, 순간 포착을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에즈라 파운드를 보고 있는 듯하다. 명징하기가 티 한 점 없는 가을 하늘 같다. 여기에는 불필요한 말이 하나도 없다. 장식적인 말도 없다. 그럼 이 한 편을 텍스트로 삼아 에즈라 파운드가 내세웠던 이미지 론에 대해 알아보자. 오늘 전문가가 싫어한 것은 내일 일반 독자들이 싫어할 것이라는 일침도 새겨듣자.
1. 불필요한 말, 형용사 따위를 쓰지 말라. 그것은 아무것도 나타내는 것이 없다
‘훌륭한 평화의 나라’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면 안 된다.
2. 훌륭한 장식적인 말을 쓰든지, 아니면 장식적인 말을 사용하지 말라. 장식은 아 무 것도 나타내는 것이 없고 오히려 이미지를 흐리게 할 뿐이다. 자연스러운 대 상물이 항상 적당한 상징이 된다.
3. 추상적인 말과 애매한 표현을 두려워하라.
4. 이미 훌륭한 산문으로 씌어진 것을 서투른 시로 되풀이 하지 말라.
5. 많은, 훌륭한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아라.
6. 이미지는 지적 및 정서적인 복합체를 순식간에 제시하는 것이다.
7. 한 평생에 여러 권의 작품집을 만들어내느니보다 차라리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 하는 편이 낫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들이다. 시나 시조를 처음 배울 때 가슴에 새기던 것들이다. 그런데 쥐고 있던 손바닥의 모래가 새어 나가듯이 어느 순간부터 다 새어 나가고 나중에는 잊게 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실행이 잘 안 되는 것들이다. 좋은 시를 위해서, 좋은 시조를 위해서 절대 잊어서는 안 되겠다.
소동파도 ‘畵中有詩, 詩中有畵’라고 외치며 이미지의 중요성을 토로한 시인이다. 아무리 근사하게 보이는 그림도 시적 메시지가 없으면 좋은 작품이 안 되고, 아무리 좋은 주제와 소재로 잘 빚어놓은 시에서도 그림, 그러니까 심상이 보이지 않으면 좋은 시가 되기 어려울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좋은 그림에는 시를 넣고 좋은 시에는 그림을 담으라는 말이다. 서양의 시론가들도 이미지를 “언어로 구성된 그림”이라고 하였다. 특히 폴 발레리는 “현대시의 80%가 이미지로 되어 있다”고 하니 과연 현대시는 거의 이미지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이미지가 우리나라에 도입되고 그것을 시조적 기법으로 활용한 시기는 앞에서도 언급한 1930년 전후, 가람의 감각적 시조가 그것인 것이다. 그러나 보다 본격적인 작업은 훨씬 뒤의 일인데 1950년대에 왕성한 활동을 한 초정 김상옥 선생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자칫 평면적인 감상으로 떨어지기 쉬운 현대시조에 은유를 통한 굴절과 상징으로 참신함과 사유의 깊이를 더해 현대시조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했다’는 등의 평가를 받는다.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보고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김상옥 ‘봉선화’ 전문)
참으로 폭 넓은 정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시조다. 정격에 가까운 형태라서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읽혀지기도 하지만 시적 이미지가 구체적이라서 더욱 그럴 것이다. 시각적 심상과 상상이 함께 어울려 누님에 대한 그리움과 누님과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그리움을 소재 봉선화를 통해 전개하고 있다.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같은 표현은 비 온 뒤 피고 있는 산뜻하고 깨끗한 봉선화를 너무도 아름답고 앙징스럽게 묘사하였다. 지금도 이 작품은 시적 배경 속으로 독자를 강하게 끌어들이는데 그 시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시조 속에 들어가서 화자와 함께 천진한 평화를 누리며 즐거워했을까.
이미지를 시조 전편에 잘 배치한 ‘네 사람의 얼굴(문학과 지성)’이 있다. 1970년대에 등단하여 지금까지도 우리 문단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윤금초, 박시교, 이우걸, 유재영 시인이 그 주인공이다. 이 걸출한 네 시인은 현대시조가 가야할 길을 정확하게 짚어냈고 많은 후배 시인들을 그 길로 인도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네 사람의 얼굴 중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탁월한 이미지를 구사해내는 이우걸, 유재영 시인의 시를 읽어 보자.
은회색 연기들이 마을을 싸고 있었다
미처 깨닫지 못한 이승의 깊은 비애가
비워 둔 서편 하늘에 노을로 엉켜져 있고,
꽃들은 지고 있었다 또 꽃들은 피고 있었다
빈 들에 놀고 있던 하느님의 새들은
진흙과 잔가질 물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가난한 식구를 위해 두 손을 모은 어머니
주기도문 몇 음절이 문틈으로 새어나가는
그 작은 불빛을 향해
아이들은 오고 있었다.
(이우걸 ‘저녁 이미지’전문)
작자 미상 옛 그림 다 자란 연잎 위를
기름종개 물고 나는 물총새를 보았다
인사동 좁은 골목이 먹물처럼 푸른 날
일곱 문 반짜리 내 유년이 잠겨 있는
그 여름 흰 똥 묻은 삐딱한 검정 말뚝
물총새 붉은 발목이 단풍처럼 고왔다
텔레비전 화면 속 녹이 슨 갈대밭에
폐수를 배경으로 실루엣만 날아 간다
길 없는 길을 떠돌다 되돌아온 물총새
(유재영 ‘물총새에 관한 기억’ 전문)
이 두 편의 시조도 시각적 이미지가 주를 이룬다. 먼저 이우걸 시인의 ‘저녁이미지’를 보자. 제목 자체가 이미지다. 낯익은 시골의 저녁 풍경을 눈물 나게 아름답게 그렸다. 여기에서 가장 선명한 그림자로 남는 것은 ‘은회색 저녁 연기’와 ‘작은 불빛’이다. 특히 ‘작은 불빛’은 정겨움과 안도와 희구를 나타내는 시어로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따뜻한 온기를 전해준다. 이미지의 힘이다.
유재영 시인의 ‘물총새에 관한 추억’ 또한 그러하다. 이 시에서는 먹물로 그린 옛 그림 속의 물총새와 유년의 기억 속에 천연색으로 살아 있는 물총새. 그리고 폐수를 배경으로 날고 있는 물총새(실루엣)의 이미지가 차례로 등장하면서 서로 충돌하고 있다. 이 이미지의 충돌에 따라 떠돌다 돌아온 물총새의 이미지가 더욱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으며, 산업 사회가 가지고 온 자연 파괴가 강렬한 메시지로 전달되며 급기야 그 이미지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한다.
5.
그러면 이제 시조에서 이미지는 어떤 기능을 하는가를 제대로 정리해 보자. 이론가들은 그 기능으로 신선감, 강렬성, 환기력 등을 들고 나온다. 이러한 이미지의 기능이 중요한 시적 기능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 편의 시나 시조가 이미지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미지로만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 시조의 여러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정서적 조화와 의미의 통일성을 이루어야 한 편의 좋은 시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직관도 빠뜨릴 수 없다. 직관이 이미지를 만든다.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강렬한 인상을 경험할 때가 있는데 불현듯 다가오는 그 강렬한 이미지를 직관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는 영감, 혹은 무의식의 순간적 표출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직관은 시인들에게는 생명줄이다.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무의 상태에서 무엇을 얻어내기는 어렵지만 어떤 인상이 주는 단서 하나만 챙겨놓아도 객관적인 연상과 연상을 통해 생각을 전개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객관적인 연상이다. 이미지는 특정한 시어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특정한 시어는 다른 시어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되기 때문에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들과 상호 교류하고 때로는 충돌하면서 변화를 겪는다. 그 변화의 과정은 잘 익은 김장 김치처럼 숙성 되어야 한다. 상큼하기는 하나 얕은맛을 가진 겉절이처럼 즉흥적이어서는 안 된다.
6.
이쯤에서 상상력(imagination)과 이미지(image)와의 관계를 한 번 생각해 보자. 이 둘은 유사해서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이 둘을 같은 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대의 어원에 의하면 이 imagination과 image는 imitari(모방하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은 뗄레야 뗄 수가 없다. 어쩌면 상상력의 결과물이 이미지일 수도 있다. 상상력은 고차원적인 정신 작용이고 그 작용으로 생겨난 것이 이미지라고 본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그런 상상력의 종속물은 아니고 상상력의 결과물이 아니다. 상상력의 결과물은 창의성 등이다. 이미지는 정서에 기반하기 때문에 마음에 잔상을 남기며 오래 남아있는 힘을 가졌다. 그래도 이 둘은 서로의 영역에 깊이 관여한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순간 속에 염원을 보라.
새장 안의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송두리째 노엽게 하고
비둘기 빼곡이 찬 비둘기 집에
지옥은 구석구석 몸서리 친다.
주인집 문 앞에서 굶주린 개는
나라의 무너짐을 미리 고하고
길에서 혹사 당하는 말은
사람의 피를 부른다.
쫓기어 달아나는 토끼의 비명
머리의 신경을 쥐어뜯으며,
한 마리 종달새가 날개 다치면
하늘 아기천사의 노래가 멈춘다.
(월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 전문)
지금은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가 가장 좋아하는 시라고 한다. 스티브 잡스는 바로 첫째 연의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는 시구에서 영감을 얻어서 스마트 폰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윌리엄 블레이크의 생각이, 연상이 스티브 잡스에게 전해져서 또 다른 상상을 만들어내어 전 세계에 새로운 통신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상상의 결과물은 놀랍게도 문학에서 시작되었다. 한 편의 시가 인류 통신 역사에 혁명을 일으키는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140년 전에 씌여진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에서도 그때까지 없었던 잠수함이나 잠수복이 등장하였고 과거나 미래의 시간 여행 수단으로 쓰일 거라는 타임머신도 110년 전에 발표된 조지 웰스의 소설 ‘타임머신’에 등장하는 것이었다. 오늘 날의 잠수함이나 잠수복이 ‘해저 2만 리’를 읽고 힌트를 얻어 만들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으나 문학의 상상력이 이런 위대한 과학보다 간혹 앞서있었다는 것이다.
7.
많은 시조가 주관적인 영탄에만 머물러 있어서 안타깝다. 이 시조가 저 시조 같고, 저 시조가 이 시조 같다. 도대체 마음을 끄는 무엇인가가 없어서 읽고도 씁쓸한 시조도 많다. 3,5,4,3만 맞추어 놓았다고 시조가 아니다. 공허한 관념을 날리며 ‘하노라’, ‘~하리’ 등의 고투로 써놓은 시조는 아무에게도 감동을 주지 못한다. 시조에 스카프를 둘러서 멋을 부려도 되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어도 된다. 너무 점잖게만 보이면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는다. 너무 고루하다고 생각하며 외면한다. 잘 익은 장맛도 좋지만 톡 쏘는 콜라맛도 보여줘야 한다. 시대가 변하지 않았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군말
1960년 5월의 창원, 어느 집안의 6남매 중 막내딸로 나는 태어났다. 부모님은 옷가게를 하시면서 부업으로 목장을 하시는 투잡족이셨다. 목장이라고 하기에는 우습지만 젖소 한두 마리와 하얀 염소 서 너 마리에서 나온 젖으로 온 동네 아이들을 다 키워냈다. 거기다가 오빠들의 자전거 뒤에 우유 박스를 실어 제법 먼 다른 동네까지 배달을 했으니 우리집을 ‘우윳집’ 또는 ‘시온목장’으로 부르는 이가 많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오후가 되면 나는 젖소와 염소들을 돌보는 목동을 따라 온 들을 헤매고 다녔고,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 내가 좋아했던 염소 ‘백구’의 말랑거리는 젖을 꼭꼭 눌러짜기도 했다. 아버지와 목동오빠의 젖 짜는 작업이 끝나면 넘치지 않게 끓인 우유를 나눠 담고 해뜨기 전까지 배달을 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나이였던 두 언니와 어머니, 아버지를 빼고는 식구 모두가 우유배달원이 되었다. 나도 작은 바구니에 우유를 담고 앞집, 옆집, 뒷집 등의 방문 앞에 갖다 두고 전 날의 빈 병을 되가져오는 일을 하였다. 생각할수록 서정적인 어린 시절을 보낸 것 같다. 나의 문학 수업은 그때 이미 다 받았다.
사춘기를 맞으면서 멋을 알게 되었다. 친구들의 기억 속의 나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면 늘 나무 그늘에 시집을 한 권 펴고 앉아 있거나, 팔짱을 낀 채 먼 하늘을 올려다보고 서 있는 아이였다고 한다. 내가 부린 멋이 통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기장 가득 채워 넣은 시답지 않은 시를 친구들에게 읽어주었고, 무당의 딸이 자기 엄마의 자리를 빼앗아 간 의사의 아들을 사랑해서 갈등한다는 우습기 짝이 없는 소설을 써서 친구들에게 돌려 읽게도 했다. 내게는 그게 최상의 멋이었다.
시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썼다. 문예반에 들면서 백일장에 자주 드나들었고 이내 학교 대표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재수시절, 처음으로 마산 시내 각 고교 문예반의 백일장 선수(?) 출신들이 뭉쳐서 만든 ‘사향’이라는 문학 동인회에 가입하였다. 이때부터 나의 길은 정해져 버렸고 나는 여고시절부터 앓고 있었던 신춘문예 병에 더 심하게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잠시 대학 때는 동화에 매료 되어 동화작가를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시조에 대한 애정과는 견줄 수가 없어서 어느 신문사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라간 후는 그 꿈을 접었다.
내가 시조를 쓰기 시작 한 때는 1992년부터였다. 전부터 내 시에 강한 내재율과 함축성을 띤 에스프리가 있다하여 시조쓰기를 권해 오던 몇몇 시조시인들이 있었다. 그 권유를 감사히 받아들인 나는 몇 년 간의 습작기를 거쳤는데 시집 ‘네 사람의 얼굴’과 이우걸 시인의 평론집 ‘우수의 지평’은 내게 좋은 텍스트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94년 중앙일보 지상시조 백일장에서 연말 장원을 하였고 또 그렇게도 꿈꾸던 신춘문예(’95년 조선일보)에 당선하여 시조문단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 후에도 나는 내 작품에 큰 영향을 준 이우걸, 유재영 시인과 중앙일보 지상 시조백일장과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선해주신 윤금초, 장순하 시인을 잊지 않는다.
나는 시에 그림을 넣는다. 많은 말을 함으로써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기보다 6호 정도 규격의 그림 같은 시 한 편을 보여줌으로써 절제된 내 이미지를 전하고 싶은 것이었다. 시인은 시를 보여 줄 뿐이지 시를 일일이 읽어주고 이해시키려 애쓰는 역할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내 사부인 에즈라 파운드가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나는 시의 바깥에 서있기를 원하기에 내 감정을 시 속에 넣지 않으려 애쓴다. 아직은 시 군데군데서 어슬프게 서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모든 것, 그것이 사람이든 자연이든 사물이든 그 자체를 인정하고 존중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몇 평론가들과 시인들은 나의 시는 서정적이면서 긍정적이고 건강하다고 한다. 또 나는 시어를 일상용어 중에서 가지고 오려고 애쓴다. 모호한 추상은 사절이다. 또 어려운 한자어 따위도 가능한 쓰지 않는다. 아름답고 맑은 우리말로 우리의 정서를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도 내 사부인 에즈라 파운드가 일러준 것이다.
시조만 20년 썼다. 시조집이 3권 나왔고 동인지가 10권 넘게 나왔다. 중앙일보와 인연이 되어 신인을 뽑는 심사를 맡았고 ‘시가 있는 아침’에 시조를 소개하며 감상글을 다는 연재를 했다. 폭 넓게 시조를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앞으로의 내 시조작업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는 요즘이다. 심사를 하는 동안 인상 깊은 작품들을 많이 만났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가 바로 이 작품이다.
모든 처녀들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
자신의 뱃속에서 방아쇠를 당긴다
한 발에 한 명의 천사가 아이로 태어난다.
내 운명은 사선에서 불발탄이 터진 것
두 명의 형제가 한 몸으로 불붙었다
다행히 그 폭발음을 신이 먼저 들었다.
20년만에 하나라는 비극적 표적에서
내 머리에 동생 발이 축복처럼 붙었다
하나를 부욱 찢어서 쌍동(雙童)을 만들었다.
어머니의 천사들은 샴쌍둥이로 명명됐다
탄환과 탄피는 제 자리로 돌아갔지만
탄흔의 내 깊은 상처에 초연(硝煙)이 자욱하다.
먹어도 허기지는 슬픈 불량품은
은하수 다 펴 와서 밥해 먹고 싶지만
그 별에 내 피 찍어서 명(命)줄 같은 시를 쓴다.
(김샴 ‘샴쌍둥이를 위한 변명’ 전문)
<강현덕 시인 약력>
-1994년 중앙일보 지상시조 백일장 연말장원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2004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2008년 한국시조작품상 수상
-2011년 서울문화재단 작가지원금 수혜
-시집 '한림정역에서 잠이 들다' ‘안개는 그 상점에서 흘러나왔다’ ‘첫눈 가루분 1호’ 등
*2009년~2013년 중앙일보 지상시조 백일장 심사위원.
*2014년 3월~5월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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