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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김학동 교수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올라온 지용의 마음은 언제나 고향의 들판과 꿈 많은 유년 시절의 회상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였다. 옥천의 자연과 그가 가로지르며 자란 들판과 강물과 뫼(山끝, 그리고 그를 키워낸 마을의 풍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소백산맥은 남으로 흘러내리다가 속리산이라는 명산을 낳는다. 옥천은 이 속리산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로 이어진 순탄하지 않은 구릉 산지이다.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은 지형으로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은 500m 높이 내외의 산들을 포진시켜 분지형 도시를 만들었다.
옥천은 금강에 의해 동서로 크게 나누어진다. 금강은 정확하게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들녘에 충족한 농업용수를 제공한다. 그래서 내(川)가 기름지다는 뜻으로 고려 시대 옥주(沃州)라고 한 이래, 지금은 옥천(沃川)으로 불리고 있다.
마성산 이슬봉에서 보는 물빛과 하늘빛
옥천이 백제 영향권에 놓여 있을 때는 군서에 관청이 있었다. 이후 옥천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 구읍으로 이동된다. 마성(馬城)산의 아래턱에 한일(一)자로 가름하는 일자산은 교동리와 죽향리의 병풍산인데 이를 진산(珍山)으로 보는 이가 많다. 일자산이 천태산의 대간을 이어받고 있다고 보는 이유에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외세의 판도가 바뀔 때마다 마성산의 깃대봉에 다시 걸리는 깃발을 불안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 불안감은 ‘마성산은 마을의 진산이 아니다’라고 선택적 방어기제를 무의식적으로 작동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성산은 이곳의 진산임이 확실하다. 그 아래턱의 일자산 밑에 옥천의 관아가 생겨난다. 남쪽으로 멍석을 펴 놓은 듯 들녘이 알맞게 누워있다. 들녘의 발끝이 시릴세라 아미산이 따뜻하게 감싼다. 마을에 평안함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임무를 안산(安山)은 늘 잊지 않는다.
옥천 관아의 동쪽에 있는 정자를 동정자(東亭子)라 부르고 서쪽에 있는 정자는 서정자(西亭子)라 부르듯, 관아를 기준으로 군동면, 군서면 등이 생겨난다. 그러다 보니 옥천군의 동이면은 옥천의 한복판에 위치하게 되었다. 옥천 사람들은 삶의 그 중앙에 동녘의 기세를 받아들일 면(面)을 만들어 놓고 산다.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은 1913년 향청리를 상계리와 하계리로 분리 확정한다. 향청(鄕廳)리는 관아가 있던 마을이라는 뜻이다. 옛날 관아는 보통 마단(馬壇)을 세워 말에게 제사하고, 학자목(學者木)으로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어, 삼정승 기개(氣槪)와 어우러지는 관학문(館學文)의 미학(美學)을 관민에게 엿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회화나무 대신 느티나무를 심기도 하였다. 향청리에는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었는데, 윗마을 느티나무는 상괴(上槐), 아랫마을 느티나무를 하괴(下槐)라 불렀다. 그래서 상괴전(上槐田)과 하괴전(下槐田)이라는 지명이 생겨난다. 이때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느티나무 ‘괴(槐)’자에 귀신(鬼)이 범접해 있다고 하여 계수나무‘계(桂)’로 바꾸었다는 설이 있다.
결과적으로는 달나라에서 계수나무를 찍어내어 마을 이름으로 삼은 셈이다. 사람들의 감성이 또 다른 차원의 미학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천재 시인이 탄생한 마을 사람들의 신선한 발상답기도 하다. 학자목으로 마을 경계를 나누니 고고한 생태학의 시작이다.
그런데 많은 연구자는 지용이 태어나서 자란 곳은 한가한 농가 마을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마을은 가난하지만 마을을 둘러싼 아름다운 산수가 지용에게 문학적 감수성을 적셔주었다는 것이다. 도시의 각박한 세정과 대비시켜 소박한 인정 속에서 서로 얽혀 사는 촌민의 아들로 자연의 신비와 전설을 체험하며 성장하였다 한다.
이건 오류다. 당시 지용은 옥천 구읍의 번화가에 살고 있었다. ‘옥천군 지방 금융조합’이 지용의 집과 이웃하여 상계리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었고, 도로변을 중심으로 상·하계리 주택들이 들어서며 형성된 장터에는 달구지에 실려 온 땔나무들이 팔리곤 하였다. 아버지 태국은 길과 청석교가 연접한 상·하계리를 관통하는 하천(生家川) 변에 한약방을 열고 있었다. 1917년 향청리의 관아를 이어받은 옥천면 청사는 학교와 가까운, 죽향리 83번지에 자리한 채, 옥천군의 행정 및 금융의 중심지 기능을 감당하면서 구읍 지역의 경제와 문화를 주도하였다.
지용문학공원 산빛
철도개설에 얽힌 유명한 일화도 안고 있다. 1900년대 초 열차의 소리를 우려한 당시 양반들이 기차를 철마(鐵魔)로 규정하고 개통을 반대하여 지금의 옥천역사로 옮겨 앉게 하였다. 그만큼 유림의 힘이 완강했던 지역으로 옥천 향교와 옥주사마소가 지역의 정신문화를 선도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 천주교가 들어선 것은 1900년경이다. 이후 신자 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1906년에 옥천읍 지금의 문정리에 본당이 처음 설립되었으며, 홍병철 루카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왔다. 장계리의 천주교 공소로 다니던 불편이 해소되니 신자들이 좋아하였다.
지용은 옥천 공보를 입학하기 전, 신자였던 아버지 손을 잡고 천주교에 다녔다. 천주교 성당에 가면 성모마리아 상을 꼭 바라보았다. 너무나 곱고 착한 어머니가 거기에 있었다. 3년이 지나자 죽향리로 천주교(1909.5)가 옮겨 갔다. 지용은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천주교 성당과 더불어 자라왔다. 이 체험은 그에게 종교시를 쓰게 하였고 평생 가족들과 더불어 천주교인으로 살아가게 하였다.
김학동 교수는 ‘동요와 동심적 비애’를 언급한 바 있다. 이는 유년 시기에 겪었던 가난과 가족관계의 난만함이 그에게 비장미(悲壯美)를 심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유학의 먼 거리감에서 형성된 향수가 지용에게 ‘동요나 민요풍시’를 형상화하였다고도 한다. 전설 바다의 물빛과 신비와 들녘 농무에 촉촉이 젖은 비애가 슬픈 신비를 가져다주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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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지용 생가를 여러번 방문했죠.
그리고 그곳을 빠져나오며 헌책방 '옥천서점'도 꼭 들렀고-.
일년 정도 그곳을 찾지 않았네요.
정지용을 더 깊게 알 수 있는 자료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