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일상무상분에서는 깨달음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말아야 함을 말하였는데,
이 분 장엄정토분에서는 그러한 가르침을 정토장엄이라는
우리들에게 익숙한 표현을 빌려 다시 한 번 강조하시면서
정토를 장엄한다는 상을 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정토를 장엄한다거나, 불교를 수행한다거나,
중생을 구제한다거나 하는 일체의 상을 깨버릴 것을 강조한다.
깨달음에도, 정토에도, 부처에도, 그 어디에도 머무는 마음을 내면
그것은 온전한 깨달음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눈 귀 코 혀 몸 뜻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 그 어디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하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일상생활 속에서 '함이 없이 하는 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어느 때 선혜라는 젊은 행자가 있었다.
생사의 진흙 수렁 속에서 방황하는 자신과 세상의 모습을 보고 크게 발심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큰 행원을 일으켰다.
연등부처님께서 거리로 걸어오시니, 선혜 행자도 시민들과 함께
푸른 연꽃을 들어 바치었다.
마침 그 때, 연등부처님께서 걸어가시다가 진흙탕에 이르셨다.
이 모습을 본 선혜는 입었던 사슴 가죽옷을 벗어 진흙탕에 깔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자 엎드려 머리털을 풀어 길을 만들었다.
이때에 연등부처님께서 선혜 행자를 향하여 찬탄하셨다.
"아 장하다. 선혜여! 그대의 보리심은 참으로 갸륵하구나. 이같이 지극한 공덕으로
그대는 오는 세상에 결정코 부처가 되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부르리라."
이렇듯 연등부처님은 선혜 행자에게 석가모니가 되리라는 수기를 주셨다.
그런데 이 경전에서 수보리는 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도 얻은 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가.
'금강경'은 일체의 모든 방편을 파하고 근본을 드러내는 경전이다.
'금강경' 앞에는 일체의 그 어떤 방편도 설 자리가 없다.
깨달음을 전해줄 수 있는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참된 깨달음은 전해주거나 전해 받는 어떤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항상 현존하고 있다.
그대 앞에 항상 참된 모습으로 꽃을 피워내고 있다.
아니 그대의 존재 그 자체가 그대로 깨달음의 증거이며 부처의 현현이다.
우린 이미 완성되어 있다. 이미 깨달아 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받을 필요도 없고 얻고자 애쓸 것도 없다.
진리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여여부동하게 오고 감이 없이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어찌 두 부처님 사이에 법이 오고 갈 수 있단 말인가.
(금강경과 마음공부 p.188~19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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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꽃길 어딘가에 선혜 수행자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선혜의 지극한 공덕이 꽃으로 피어나는 날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