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도 쉬어 넘을 정도로 높은 고개라고 하여 부르는 문경새재.
새재 남쪽 기슭에 사철 수정 같은 맑은 물이 흐르는 실개천을 끼고 그림같이 아름다운 조그만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 위쪽 끝자락에 다른 집들에 비해 규모가 크진 않지만 아담한 한옥 한 채와 높은 담에 둘려싸인 넓고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웅장한 양옥 한 채가 서로 대조를 이루면서 나란히 서 있습니다. 한옥은 황소 할아버지 집이고 양옥은 장관 할아버지 집입니다.
새재초등학교 6학년인 봉수가 학교 공부를 마치고 한옥 대문을 들어섰습니다. 초가을 해님이 새재봉을 뉘엿뉘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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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갈 무렵입니다.
“어머니, 학교 다녀왔습니다.”
하는 소리와 함께 책보자기를 벗어 마루에 던지는 순간
“얘, 봉수야! 사랑방에 옆집 장관 할아버지 와 계신다. 어서 들어가서 인사드려라.”
라고 어머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봉수는 곧바로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가서 큰절을 올리면서
“장관 할아버지 안녕하셨습니까?”
하고 공손히 이사를 드린 후 한 발 물러서서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두 분 할아버지께서는 벌써 술이 많이 취하신 듯이 보였습니다. 장관 할아버지께서는 봉수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시면서
“아이구나 이놈! 할아버지를 닮아서 씩씩하고, 잘생겼구나. 자 절값이다.”
라고 하시면서 5만 원짜리 두 장을 봉수 손에 쥐여 주셨습니다. 봉수 할아버지께서
“예끼 이 사람, 왠 돈을 그렇게 많이 줘. 애들 버릇만 그르쳐.”
하시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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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 돈이라면 몰라도 그 외엔 내 손자에게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라고 하시면서 장관 할아버지는 쓴웃음을 지어셨습니다. 봉수가 이렇게 많은 돈을 가져 보기는 난생처음 있는 일입니다. 재수가 참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할아버지께 꾸중을 듣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두 분 할아버지께서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며 자란 동갑내기 불알친구입니다. 명절이나 무슨 일로 장관 할아버지께서 고향에 내려오시면 봉수 할아버지께서 장관 할아버지 댁을 가시는 일은 있었지만 장관 할아버지께서 봉수네 집으로 직접 오신 일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봉수는 호기심에 차서 할아버지 옆방에 들어가서 두 분이 하시는 이야기를 자세히 엿들었습니다. 그런데 장관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이야기들은 웬일인지 쓸쓸하게 들렸습니다.
“야, 황소야! 넌 참 행복한 놈이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자네야말로 돈과 명예를 다 가진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귀하신 몸이 아닌가. 자네가 행복한 사람이지 나 같은 촌놈이 행복하다니 마당에 다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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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들어도 웃을 이야기야.”
봉수가 듣기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말 같습니다. 봉수 할아버지는 올해 연세가 아흔 살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가정 형편이 어려워 4학년 때 중도 퇴학하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했습니다. 황소 같이 일만 한다고 마을 사람들이 ‘황소 할아버지’라고 별명을 붙인 것이 이름보다 별명이 더 알려져 있습니다.
옆집 장관 할아버지는 집안이 넉넉한 이 마을 최고의 부잣집 삼대독자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서울로 가서 일류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유학까지 하였습니다. 외교관도 하고, 장관을 두 번이나 한 까닭으로 이 지방에서는 장관 할아버지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야, 황소야! 넌 정말 행복한 사람이야. 아들 며느리 효도 받으며 손자 손녀들 재롱 즐기고, 동네 사람들의 존경 받지. 거기에다 영감 할마이 건강하게 사니 이게 바로 진짜 행복이야.”
“그럼 자넨.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할마이 없나. 돈이 없나, 명예와 권력이 없나. 자네야말로 천하의 복을 다 갖춘 사람이 아닌가?”
“아니야, 나는 자식들을 잘 못 키웠어. 돈 있다고 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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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것 다 들어주며 고생이란 것을 모르고 자라게 한 것이 내 잘못이었어. 지금에 와서 후회하니 이미 늦은 것이지.”
봉수 할아버지도 요즘 들어서 자신이 복이 많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있으며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뜰히 농사짓고, 산지를 개간하여 과수원도 만들어 생활이 넉넉한 편입니다.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두어 고향을 지키는 맏아들을 빼고는 다 대학을 보냈고, 결혼시켜 주위 사람들의 칭찬 받으며 잘살고 있습니다. 손자 손녀들 공부 잘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으며 아이들이 용돈도 잘 주어 호주머니가 항상 넉넉합니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니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부터 고향을 위한 봉사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고향이 관광지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면서부터 뜻이 맞는 친구들과 힘을 모아 환경오염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자연보호 활동과 고향 후배들을 위한 장학사업도 시작한 지가 20년을 넘었으니 자랑스럽기도 한 일입니다.
“돈, 권력, 명예…… 말짱 헛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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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할아버지의 말씀은 술에 너무 취한 탓인지 말끝이 흐려지고 흐느끼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장관 할아버지께서는 공직에서 물려난 지 오래입니다. 공직에서 물려난 후 이곳 고향 집에 많은 돈을 드려 집터를 넓히고, 별장처럼 꾸민 후 몇 년 살다가 서울로 올라갔고 관리인을 두어 관리해 오다가 작년부터 이곳에 혼자 와서 살고 있습니다. 관리인 할아버지 내외분이 식사와 빨래 등을 도와주고 있으며 다른 가족들은 오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몇 나라의 대사와 두 번의 장관을 지내면서 우리나라에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국에까지 집과 땅을 사서 재산이 수백억 원이 된다는 소문이 있다고들 합니다.
아들딸 남매를 두었는데 아들은 결혼하여 미국에 살고, 딸은 프랑스에 유학할 때 국제결혼을 하여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아들딸들은 멀리 있으니 못 오는 것이 이해되지만 할머니까지 왜 함께 와서 살지 않는지는 봉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아, 술맛 좋다.”
“실컷 마시게나.”
“으음, 마시고말고. 내 오늘처럼 술맛 좋고 기분 좋은 술 마시기는 평생 처음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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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술을 좋아하시는 시아버님을 위해 담가 놓은 산머루주, 다래와 산수유, 오미자 등 산에서 직접 따 온 온갖 약제들을 넣어 담근 삼 년 묵은 약술에다가 도토리묵, 산더덕무침, 감자전 등을 안주로 내놓았으니 기름지고 값비싼 안주만 잡수시던 장관 할아버지께서는 별미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두 분 할어버지께서는 주거니 받거니 밤이 깊은 줄도 모르시고 술을 드셨습니다.
텔레비전 마감뉴스가 들려왔습니다. 그 뉴스에는 공교롭게도 봉수 할아버지께는 기쁜 소식이, 장관 할아버지께는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10월 5일 환경보호의 날을 맞아 봉수 할아버지가 고향을 지키고 가꾸면서 후배들을 보살피고 환경보호 운동에 앞장선 공로가 인정되어 훈장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과 장관 할아버지께서는 재직 중 부정축재와 비리 공직자로 처벌받을 대상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갑자기 텔레비전이 꺼졌습니다. 장관 할아버지께서는 술을 더 못 드시겠다고 하시면서 일어나셨습니다. 함께 주무시자는 봉수 할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시고 봉수 할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면서 간신히 댁으로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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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봉수가 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온 마을은 웅성거리고 장관 할아버지 댁 주위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순경 아저씨가 할아버지 댁 대문에 서서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확인하고 드나들게 하였습니다. 장관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평소에 일찍 일어나시는 할아버지께서 이날은 10시가 되어도 일어나지 않아서 별장지기 할아버지가 문을 열어보니 온 방바닥에 수면제가 흩어져 있고 장관 할아버지께서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장관 할아버지께서는 시골에 내려오신 후 통 잠을 못 주무시고 자주 수면제를 잡수셨다고 합니다.
머리맡에는 봉수 할아버지 앞으로 쓴 유서 한 통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친구야, 고맙고 미안하네. 세상 사람 보기가 부끄러워 먼저 가네. 나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게나. 자넨 참 행복한 친구일세.”
라는 내용의 유서와 또 하나의 문서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자기 앞으로 등기되어 있는 고향의 모든 재산을 친구에게 맡기니 친구가 하는 장학사업과 고향 발전을 위해 보람 있게 써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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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사는 아들이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려 5일 만에야 장례를 마쳤습니다. 문상을 오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습니다. 20년 전 장관 할아버지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는 참으로 많은 사람이 왔었는데……. 그때는 자가용차가 하도 많이 와서 금테 모자를 쓴 경찰관 아저씨들이 교통정리를 하고, 마을 주변에는 차를 댈 곳이 없어서 초등학교 운동장을 주차장으로 사용해서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축구를 못 해 불평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비하면 참 사람이 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관 할아버지는 3대 독자라서 가까운 일가친척도 별로 없어 온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장례를 치렀습니다.
장관 할아버지는 별장 옆에 미리 마련해 두었던 양지바른 곳에 고이 묻혔습니다.
봉수는 장관 할아버지 장례식을 마친 날 밤에 할아버지가 주신 5만 원짜리 두 장을 만지작거리면서 자라서 장관 할아버지처럼 되겠다는 꿈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