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차를 끌고 한군데라도 다닐러 갔다와야만, 마음이 편하다.
혹자는,, "지금 현재 가장 잘할수있는것을 해야한다. " ""가장 자신이 있는 분야의것에서 방법을 찾아야한다..." 고 한다.
지금은 권리소득분의 내용으로 나머지 삶의 시간을 경영해야한다고, 힘주어 이야긴 하지 않아도 불문률 ~
그것은 입밖에 내지않아도 가장 기본적인 갗춤의 선행이었어야 한다고 다문입들은 떠드는거 같다.
초등학교 동창중 두사람 부부가 모두 초등학교 교장출신의 경우를 살펴보면, , 얼마전 세계일주를 하고 왔다고 했다.
그리고, 또 어떤 다른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고하는 이야기가 본인의 입보단 그 또 다른 친구의 입을 통해 들려온다.
그래, "모두들 행복한 시간을 향유해야지~~ " 그간 얼마나 부자유스런 틀에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란 생각을 해본다.
난, 중국무술관" 이름하여,,,, "에송무ㅜㄹ관"을 화평동 231번지에 설치한때가 1979년 12월 10일이었다. 장장 36 년차에 이르고 있다.
본래 집의 2층 20 여평의 공간에서 시작한때가 가장 머리를 잘쓴 판단이었고, 그 이후는 동구보단 남구나 중구 혹은 남동구등 그 이외의 지역에 나가 해야한다고 판단했는데, 지금은 그 자리로 다시 들어가고자 호시탐탐 방법을 골똘하고 잇는 형편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손자가 태어나자 그동안 바로 밑의 자식에겐 얼버무린 중대한 잘못이 한가지 있다.
평안북도 신의주 동외리 낙타고개부근이 내 아버지가 어린시절 살았던 동네란다. 1913년생인 아버지는 일본군이 패망하여 귀국하고난 평북 신의주지역에 있었던 "帝國纖紐株式會社(제국섬유주식회사-> 패망즈음엔 군수공장으로 가동)"의 직원이셨고, 일본국이 패망직전 회삿돈 당시 60 만원을 들고, 서울의 모 은행에 예금을 하고난직후 , 8.15 해방을 맞았던 모양이었다.
당시 60 만원이면,,, 구체적으론 알수없으나, 서울한복판의 빌딩을 살만한 돈이었다고 했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않은 일이지만, 당시 아주 현실적이고, 나쁜마음을 먹고 목숨을 걸 정도로 명예고 뭐고 다 저바리는 기회주의자적 처신을 했더라면,큰 권리소득의 생활인이 되었을지도 ~~ 모른다.
장가드는 아들에게 집을 얻을돈이나, 살돈을 보태주지못하면, 아버지로 생각지도 않는다.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다.
언젠가 아들한테, 질문을 받고도 얼버무린 이야기란게, 손자가 태어났으므로 특별히 알고, 알려주어야할 의무감때문에, 중구 필동에 있는 "순흥안씨대종회(順興安氏大宗會)"를 찾았다.
순흥 안가는 고려신종(1197년~1204년)호위상호군을 지낸 "安子美(안자미)"란 조상이 시조시다. 그분으로부터 증손되는 안향(1260년 고려원종 1년 文成公)이 우리나라 주자학의 시조라할수 있는데,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어사, 판관등 주요관직을 역임하였고, 퇴직후 "섬학전"이란 육영재단을 설립하여 후진양성과 유학학풍을 조성한 업적을 세워 귀감이 된 분이신데, 그분을 순흥안씨 제 1 파로 추존하여 모신다 한다.
내 아버지는 그런 정도의 말씀만을 하셨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지금은 "안가"도 사람이 많아져서,, 1대 시조로 부터 34대 35대에까지 이르고 있는 실정이니,, 불명확한 상태를 명확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선 줄기를 찾아 들어가야는데, 애로가 많게 생겼다.
시조부터 6 대까진 줄기가 곧지만, 7,8,9,10대부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러나, 종친회 홈페이지중 제1파 항열도를 유심히 살피던중 반가운 항열글자를 발견하곤, 내심 쾌재를 부른다. 아버지대 "병"자와 내대의 이름 끝자 "균"자가 같고, 내가 아들에게 작명한 끝자 눈금 "수"자가 같은거다.
그리고, 손자에게 줄 끝자 "구"자가 눈에 띄였다.
맘먹고 찾아 나서기전, 서초구에 있는 풍림아이원플러스 원룸에 사는 젊은아가씨의 짐을 근처의 "이즈타워"로 옮겨주는일을 했다.
어디선가 "카고'1톤트럭기사 한분이 나보다 1시간정도 늦게 나타낫고, 비가와서 나도 교통체증때문에 한시간 정도 늦었는데, 그는 나보다도 더 늦은것이엇지만, 궂은날이라 일을 오더한 자가 넘어가줬다.
짐은 많지않아 카고와 탑차에 분담하여 짐을 실어날렀다. 카고기사는 나보다 두살이 아래였지만, 애는 내 큰애보다 두살이 오히려 많았다. 38 세인데 아직 장가를 못갔다고 했다.
헌데 오늘은 그 장가못간 아들보다도 한 열살이 적은 젊은 예비부부의 짐을 세탁비누와 치솔 한개까지 아주 내물건 다루듯 잘 단도리해서 옮겨주엇다.
'이즈타워"는 강남역삼동에 하나가 있고, 서초구 서초동에도 하나가 있었다. 네비게이션하나는 강남구 역삼의 곳을 또 하나는 서초동의 타워를 가리켰다.
비오는날은 공치는 날이라고 했지만,
많은 비는 아니었더라도 가는비 속에서도 마음은 즐거웠다. 그것마치고 필동도 갈수 있었는데, 남대문 터널입구와 신세계백화점, 대연각 사거리에서 바로 직진 한국전통민속마을 직전 골목으로 우회하여, 왠 건물 3층 옥탑에 판넬로 잇댄 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장소를 확인하고, 마트에 들러 "박카스" 두박스를 한박스에 증정품으로 포장하여 방문하면서, 조상에 대한 공부도 잠간 한바있었던 날을 가졌다.
비오는 날의 궂은 날에도 25년인가 살인자 구속연한의 상한기간 페지가 국회에서 통과되었다고 뉴스는 전하고 있었다.
국민의 경제가 필요한 현실에서 정치는 또 그 이상갈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역앞 고가를 넘어가면서, 차창의 빗물을 좌우로 가르는 소리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