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내재주의 철학은 자연이 무심코 내뱉은 표현인가?
- 스피노자와 베르그송의 범신론적의 철학의 이해를 위하여 -
철학도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일반적 사유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들 한다. 그래서 그 시대를 지배하는 철학은 그 시대의 자식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 시대의 철학적 과제는 무엇인가? 과연 우리시대의 철학자들은 자신의 위상을 잘 알고 있을까? 우리는 스스로를 모르고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응답은 답변일 수 없다. 현 시대의 흐름, 간단히 전후 50년의 흐름을 되돌아보면서, 당신의 입장은 현상 속에 어떤 위상과 방향성을 지니고 있는가 라고 물으면, 그 대답으로 완곡하게 세상 문제와 흐름도 모르는 가운데 어찌 자신의 입장과 이론을 세울 수 있는가, 또는 겸손하게 그런 대가란 세기에 한사람 정도 나오는 것 아닙니까 라고 응수하며 문제제기를 회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객쩍은 이야기는 철학 분야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학문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방향을 잡기 전까지, 학문의 지난 온 과정을 다시 훑어오는 시간과 노력을 상당히 많이 기울여야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숙명이랄까? 어떤 이름난 학자라도 지난 온 과거의 학설과 내용을 곰곰이 되새기지 않은 학자 없다. 그래, 그 과거를 왜 다시 불러오는가? 학문하는 목적이 그 과거가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새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마법사의 장난인가? 또는 학문의 과거의 늙은 모습에 새로이 분장하여 또는 새로이 변장시켜 지난 학문을 계속적으로 생존하게 하려는 연금술사의 놀이인가? 사람들이 한 철학자의 사상의 부활을 말할 때, 외모의 또 다른 치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내적 분출이 새로이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인가? 사라졌다고 여긴 이 유령(le spectre)이 부활하여 여러 세기동안에 억눌림을 한풀이하려고 등장하는 것일까? 과거를 현재에 현존시키는 것, 그것은 부활인가?
어떤 한 사상이 사라진 듯 하다가 다시 등장(부활? 또는 르네상스?)하는 경우에, 그 사상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심층 속에 침잠해 있다가 폐쇄적 사회의 병폐가 심했을 때 생명을 가지고 뚫고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보자. 역사적으로 자연철학과 유물론이 - 자연이 무심코 내뱉듯이 - 두꺼운 지층을 뚫고 솟아나려 했던 것처럼, 기존의 평행론과 숙명론적 해석에 눌려있던 스피노자의 사상이 - 유신론을 가장한 범신론으로- 소생하려는 것이 아닐까 라고 의문표를 달아보자. 그리고 자기민족으로부터도 그 사회로부터도 소외당한, 범신론적이고 공화적인 인물, 스피노자의 사상에서 자연의 본래적 의미와 인간의 행복에 대해 새롭게 보아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되돌이켜 보자.
II-1
고대 그리스의 사상이 중세 말기에 "다시 태어나다"는 뜻으로 쓰이는 르네상스(Renaissance)란 역사적으로 중세에서 근대시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시대를 뜻한다. 이 르네상스는 철학적 체계를 새로이 성립하는 시기라기보다 새로운 길을 탐색하는 시기이다. 개략적으로 훑어보면, 먼저 나침반의 발명으로 새로운 항로의 개척과 신대륙의 발견이 있었고, 이로서 유럽인들은 그들의 역사에 없었던 낯선 지방과 낯선 민족과 부딪히게 되었다. 과학에서는 종교의 교리에 의해 지지 받고 있던 학설에서 벗어나,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을 세운다. 또한 인문주의를 크게 확산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 덕분에 일반인도 성경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상에 접할 수 있게 된다. 이즈음에 예술에 있어서 알베르티(Alberti)의 원근법도 빼놓을 수 없다.
두 번째로 상업과 화폐경제의 발전은 사회의 변혁을 가져왔으며, 전쟁기술의 발달은 기사제도를 낙후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신분과 위계 질서로 된 중세의 폐쇄적인 사회가 역동적인 사회로 바뀌는 과정이었다. 세 번째, 일반적으로 주목하는 것으로, 고착된 스콜라 철학의 전통을 거부하고 인문주의 운동이 일어난다. 이 인문주의적 전통에는 이탈리아에서 페트라르카(Petrarca), 알베르티, 발라(Valla), 네델란드의 에라스무스(Erasmus), 영국의 토마스 모어(Morus), 프랑스의 몽테뉴(Montaigne) 등이 있다. 이들은 다루는 주제는 인간이며, 인간의 노력과 관련하는 자연, 역사, 언어가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한마디로 '문화와 역사의 격변기'이다.
다른 한편 철학적 관심으로 보아, 이탈리아에서 시작되는 르네상스의 철학의 특징은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재발견이다. 메디치(Cosino de Medici)가 플로렌스에 '플라톤 아카데미(1459)'를 세웠고, 피치노(Marcilio Ficino, 1433-1499)와 피코 미란돌라(Pico Mirandola)등의 학자가 나온다. 피치노의 번역과 저술을 통하여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철학이 유럽에 전파된다.
그리고 새로운 학문의 개념이 등장하며, 과학의 방법에 대한 반성으로 자연과학이 발달한다. 케플러와 갈릴레오에서 과학은 본질에 대한 '왜'의 물음에서 '어떻게'라는 물음으로 바꾸고, 사물의 제반관계를 양적으로 정립하면서 자연에 대한 법칙을 세운다. 베이컨은 과학의 방법론을 바꾸어 귀납적 방법을 주장한다. 새로운 정치 사상으로 국가와 권리에 대한 견해가 도래한다. 자연권, 통치에서 계약, 주권 등의 문제가 제기되고, 곧이어 마키야벨리는 도덕적 가치와 정치적 사실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다. 한가지 덧붙이면, 천년이 지나면서 천상의 왕국이 지상에 도래했다는 믿음이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교회의 세속적 태도와 교직자 타락이 만연한 가운데, 점점 더 성숙한 백성의 의식은 구습과 권위에 젖은 종교에 대한 개혁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르네상스는 문화와 역사의 변화이며, 철학과 과학의 새로운 경험과 해석이며, 인간 본연의 자연권에 대한 자각이다.
천상의 원리의 보편 타당성으로부터 인간의 문제에로 접근이란 인간의 예속성으로부터 인간다운 삶에 대한 반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르네상스시기에 종교라는 굴레에 매인 인간이 자신을 되새겨볼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이 문제제기에서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의 존재, 신의 권능보다 그 권능을 실행하려는 인간의 문제에 더 주목하고자 한다. 사실 14세기에는 이미 인간의 고유한 존재적 특성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논의가 팽배하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던가? 아니면 우주관에 대한 어떤 다른 이유에서 교회의 교리에 맞설 수 없는 난점이 있어서인가?1) 르네상스시기에 제기된 플라톤주의와 플로티누스주의에 영향으로 우주의 관념에 대한 발전과 이행을 보면, 스피노자를 이해하는데도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우주 속에서 인간 존재와 인간의 지위에 대한 반성에 있기 때문이다. 이 반성에서 인간의 근본적 이상은 보편적 인간(uomo universale)으로서 인간 전형의 추구이다.
II-2
보편적 인간이란, 사회적 차이를 넘어서 완전한 교육을 부여받은 자로서 인식(지식)의 확장으로 자신의 존재적 본질을 완성할 수 있는 자이다. 고대 그리스의 이상을 모델로 삼는 인간은 도덕적 자질을 부여받은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 중용, 공정, 감성, 자연과 조화의 덕목을 드러낸다. 이 사회적 덕목들이 나중에 시민사회에서 매우 유용하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의 점진적 확장 속에서 인간의 능력을 새롭게 보는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가 등장한다.
여기서 브루노의 사상에 접근해 보자. 그의 사상은 각 부분들이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고 평가할지라도, 절충적이고 폭 넓은 형이상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플로티누스, 쿠자누스(Cusanus, 1401-1461), 코페르니쿠스(Kopernicus, 1473-1543)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코페르니쿠스로부터 태양 중심설을 받아들였으나 우주를 행성계 정도로 폐쇄된 세계관을 거부하고, 우주가 '무한'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우주에서 개별 세계(개별자)들은 변하고 흩어지지만, 우주 총체는 영원하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우주는 자기 바깥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 자신이 모든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근거로서 '무한한 신'은 무한한 어떤 것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한한 원인과 무한한 원리의 작용과 결과로서 이 공간이 무한한 방식으로 무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은 세계 밖에 있지 않고 세계 속에 있다.2) 모든 존재는 신적 원리인 '총체-일자'(Tout-Un) 속에 엉켜있으며(complicatio), 그 속에서 모든 대립자들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 동시성은 사방으로 동시에 일자의 유출 때문에 개별물들의 동시적 생산과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단일사물들은 대립자들의 전개(explicatio)이며, 자기 전개에서 대립물들의 단일성(l'unite)은 상실되고 그래서 가능성과 실재성이 분리된다.
단일사물은 자신이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아니므로, 불완전하고, 변하고, 부스러기가 된다. 하나이자 전체인 자연 가운데에서 작용하는 원인은 '세계의 영혼'(l'Ame du monde)이라 한다. 세계의 영혼에서 나오는 정신이 '내적인 기술자(l'artiste interieure)'이며 내부의 질료를 자연의 외적 다양성으로 만든다. 이것은 형상이 외부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각인 시키기 위하여 질료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질료가 자체 내에서 형상을 품고 있으면서, 그 형상을 밖으로 전개한다. 여기서 존재(Un), 속성으로서 형상과 질료차원, 그리고 외부로 드러나는 형상의 양태들로 도식화가 가능하다.
이런 브루노의 범신론적 성향이 스피노자에 미친 영향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브루노는 우주에 부합하는 인간 정신은 무한한 인식으로 향한다고 한다. 무한성은 중심이 되고, 인간정신은 무한성의 중심 주위를 돌고 있다. 그런데 인간 정신은 우주의 무한성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에는 의식을 점진적으로 증가하게 하여 신성과 닮아가려고 운동으로 이끄는 '영웅적인 정열'이 있다.
브루노는 자신의 철학적 체계를 진실한 종교적 통일성의 원리에 맞게 사용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불만을 일으키는 종교개혁가들(그는 종교개혁가들을 부조화의 씨를 뿌리는 자들이라 생각했다), 자연에 적대적인 광신적 카톨릭교도들, 너무 과도한 질투로 피에 흠뻑 젖은 신을 믿는 유태교들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3) 자연에 관한 범신론적 사상은 그가 로마 광장에서 산채로 화형 당함으로서 표현의 기회를 잃고 침잠하였다.
이 유일형상론자들의 광기는 둔스 스코투스(Dus Scotus 1265-1308) 이래로 퍼져가던 개체 존재의 특이성과 그 존재 속에 내포된 근원적 자유(인간의 행복)를 억압하였다. 그 새로운 분출은 루소에 이어 프랑스 대혁명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브루노의 화형은, 서구 사상에서 자연을 대상 또는 피조물로 보는 철학과 다른 자연의 자기 생성과 발전의 철학, 유심론의 철학과 다른 범신론의 철학, 형상형이상학의 원리와 다른 질료형이상학, 자연(본성)의 철학이 서구 2500년 철학사에서 억압된 두 번째의 역사적 장면일 것이다.
II-3
그러면 자연에 대한 외적 원리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내재적 힘을 보았던 그리스 자연철학 즉 생성의 철학이 왜 전개되지 못하였는가에 대해 되 돌이켜보자. 여기서 자연철학이란 자연을 대상으로서 다루는 '자연에 대한 철학'(la philosophie naturelle)이 아니라 자연의 본성을 파악하는 '자연(본성) 철학'(la philosophie de la nature)'을 말한다.4) 물론 고대 그리스의 유물론들도 자연 철학이다.
이상하게도 플라톤 이상으로 또는 아리스토텔레스만큼이나 데모크리토스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고 알려졌으나 전해지는 저술은 없다. 그리고 스토아 학파의 사상을 받아들인 로마인들에 자신들의 보수적 입장을 불안하게 한다는 이유로, 로마의 원로원은 BC 186년에 피타고스 학파의 책들을 없애버렸으며, 그리고 나서 BC 173년과 161년에는 에피큐로스 사상도 쾌락주의와 정치적 포기를 함축하고 있다는 이유로 금지하였다.5) 그러나 그 여파로 서구 사상사에서 에피큐로스 사상이 류크레티우스(Lucretius, 98/94-51 BC)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 라는 시집 속에 표현되어 전해지며, 그 시집도 완전하게 전해진 것이 아니라, 시작법에 중요한 것만을 부분적으로 발췌하는 형식으로 전승되었다고 한다. 이런 자연 철학이 억눌려 있었던 것은 로마의 금서조치에 이어서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가 너무나 오랫동안 지내온 것도 한몫을 했으리라. 서구 2500년 철학사에서 자연 철학에 대한 사유 행태를 억압한 첫 번째의 역사적 장면일 것이다. (물론 기독교가 그리스 철학 전반에 대한 억압으로 529년 아테네 학당 등 학교를 폐쇄한 것은 학문 전반에 대한 가장 큰 억압의 사건일 것이다.)
이런 사상이 철학사에서 다시 태어난 것(자연 철학의 르네상스)은, 15세기 르네상스처럼, 프랑스 대혁명이후 유럽사회가 유일 신앙의 힘이 쇠퇴하고 산업혁명의 물결이 휩쓰는 격변기였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류크레티우스의 저술이 새로이 편집되어 요즈음의 완성본으로 새롭게 알려진 것이 1835년에서 1840년사이에 독일인 라흐만(Lachmann)의 체계적 연구에 의해서이다. 마르크스가 『데모크리투스와 에피큐로스의 자연 철학의 차이』로 박사학위를 한 것은 바로 그 다음 해이다. 유물론이 제대로 소개될 수 있는 것도 류크레티우스의 저술에 대한 시인들의 공론화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피노자 사상의 전수과정에는 창조의 신과 별개로서 "자연"을 이해하고자 했던 괴테, 이어서 칸트의 동시대의 유태인 철학자 멘델스죤, 시인 슐레겔 형제, 헤겔 좌파에 속하는 유태인 바우어(Bruno Bauer)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유물론의 철학은 류키포스(BC 500년경)에게 배웠다고 전해지는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460-370 BC)에서 출발한다. 그는 세계(자연)가 무(le neant)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들(les atomes)로 이루어졌고, 원자들의 상호충격과 회오리 운동으로 기계적인 결합에서 사물(물체)들이 생겨난다. 에피큐로스(Epicuros, 342-271 BC)는 데모크리토스의 무와 원자의 학설을 이어받아, 세계형성에서 원자들이 낙하도중에서 빗금운동(clinamen, deviation)을 통하여 서로 부딪히면서 우연적(hasard) 결합에 의해 원자들이 집적된 것이 물체가 된다고 설명한다. 데모크리토스가 필연의 생성과 이법(raison)을 설명하면서 정태적 결정론에 머물러 있었다면, 에피큐로스는 개체를 자유롭게 하는 우연을 인정하고 개체의 자치를 인정하려 하였다.
류크레티우스는 자연의 다양한 변화 속에서 그 무엇을 보고자 했으며, 이 무엇을 결합하고 이완하는 힘이라고 보았다. 결합과 이완에는 서로 연결되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그는 이러한 것이 수학적으로 예견되는 것이며 결정적인 귀결을 갖는다고 보았다. 이런 과정을 모르는 인간은 무능함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데모크리토스는 현상의 배후의 법칙이 있음을 보았고, 에피큐로스는 현상을 통하여 자연에 대한 사랑, 자연 현상에 기하학적 인 것이 있음을 깨닫고, 자연 자체에 새로운 힘을 부여하고자 했다.6)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보면, 류크레티우스는 에피큐로스 사상에서 인간 자유의 기초로서 빗금운동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마르크스도 이런 의미에서 "에피큐로스가 그리스의 가장 계몽된 사상가이다"7) 고 말했다. 우리가 보기에 마르크스 철학적 형성과정에서 스피노자와 에피큐로스의 사상이 스며들어있다면, 우선은 자연에 대한 종교적 도그마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고, 나중에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요청을 옹호하기 위하여 역사 변증법을 수단으로 삼게 될 것이다.
II-4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플로티누스가 하나의 태양에서 누스(nous), 그 다음에 영혼으로 자발적 유출을 한다는 것은 샘물이 솟아나서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어떤 힘이 넘쳐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에서 하나의 자연, 여러 속성 가운데 두 속성, 다수의 단독적 몸(영혼, 생명)과 관념들의 생산 과정이 필연적이라는 것도 여러 속성으로 생산은 그 방향이 한 방향이 아님을 의미한다.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이 아니라 자연의 자기 생산과 자기 무한 확장을 의미하는 브루노의 자연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에서 다시 소생하고 나아가 스피노자의 자연의 생산성은 베르그송의 자연의 역동성으로 나아갈 것이다.
현대 프랑스 사상의 변천과정을 보면, 지난 19세기말에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은 비결정성과 심층성을 강조하고, 본성(la nature)의 자기 발전이란 의미에서 근원적 자유를 말했다. 본성의 자유의 발현은 현상의 결과물들이 상충된다는 점에서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을 겪으면서 실존주의는 본성의 총체와 개인 관계를 개인들 사이의 관계로 바꾸면서 인간의 부조리 상황에 더 주목하였다.
사실 이런 부조리는 '배 떨어지자 까마귀 나는' 것과 같이 두 항 사이의 관계는 불가사의이며 우연(hasard)이다. 두 사실의 서로의 관계는 외적 한계에서 수많은 사고중의 한 사고(accident)이다. 그러나 각 항들에서 각 연쇄 계열의 내재적 연관이 있음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구조적'(소쉬르는 체계라는 말을 쓴다)인 해명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구조적'이란 유기체의 기능과 구조라는 의미와는 달리, 최고존재 또는 근원적 원인이 그 무엇(의미)을 담지 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이 무엇이 '구조적'으로 '빈 상자'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 빈 것(의미의 공간)에서, 형상론자들이 규정한 개념이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음소(phoneme), 친족소(parenteme), 신화소(mytheme), 형태소(morpheme), 문학소(littereme), - 우리가 덧붙인다면, 욕망소(desireme) 등이 뒤엉켜 있으면서 시대와 지정학적 지위에 따라서 달리 표출된다.
이처럼 비결정, 부조리, 빈구조로 이어지는 프랑스 사상의 지형에서 보면, 형상적 일원론에서 말하는 신의 세계창조 또는 세계의 형상적 선구조(전제)와 세계 형성은 자기 동일적 구조일 뿐이고, 창조적 신의 직위 해제(니체)와 인간의 개념 형성의 무능(푸고)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저항은 철학사뿐만 아니라 기성 종교의 페쇄적 일원성에 대한 거부일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가 유일 신앙에 대한 범신론의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 가톨릭에서 천상의 원리와 세속에서 절대 권력 아래에서 억눌린 학문과 인간 자연권(인간 본성)이 프랑스 대혁명에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1789년 이후 프랑스가 1830년, 1848년, 1870년 혁명의 과정에서 사회 현상과 인간 현상을 경험적이고 실증적으로 겪는 동안에 학문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무매개적으로 접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변혁기에 스피노자의 {소론}이 발견(1852)되었고, 이것은 스피노자의 관심이 신과 그 속성이라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행복임을 보여주는 증거였다.8) 이런 관심은 라뇨(Lagneau, 1851-1894)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시각, 즉 자연 내재주의적 시각으로 나타난다. 그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알랭(Alain, 1868-1950)은 스피노자의 사상에서 개체의 존엄성을 보게된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서야 플로티누스와 브루노의 영향을 입은 스피노자 철학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프랑스 지성인은 한편으로는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과 유일 신앙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속 좁은 이성의 절정(제국주의의 광기)에 대한 회의를 갖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알제리의 독립 전쟁, 부다페스트 봉기에 대한 소련의 장갑차 진압 등 일련의 사건에서 근대 이성(제국 속의 제국)에 대한 비판한다. 앞서 언급한 구조적 표현의 의미와 더불어, 철학의 대안의 하나로서 스피노자를 다시 읽기 시작하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1960년대는 스피노자 철학 연구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물로서, 프레포지에(Preposiet)의 『스피노자와 인간의 자유』(1967), 들뢰즈(Deleuze 1925-1995)의『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1968), 게루(Gueroult, 1891-1976)의 『스피노자: 제1권 신』(1968) (그 후에(1974) 『스피노자: 제 2권 영혼』), 마트론(Matheron)의 『스피노자에서 개인과 공동체』(1969), 미스라이(Misrahi, 1926-)의 학위논문『스피노자 철학에서 욕망과 반성』(1969) 등이 있다. 이러한 성과물들에 힘입어서 좌파에서 알튀세(Althusser, 1918-1990)의 영향하에 마슈레이(Macherey, 1938-), 발리바르(Balibar. 1942-), 모로(Moreau), 또젤(Tosel) 등의 스피노자에 대한 유물론적 재해석도 나오게 된다.
이쯤에서 베르그송의 스피노자에 대한 관심을 언급하자. 그는 스피노자에 대한 강의를 콜레즈 드 프랑스에서 하곤 했으며, 그리고 1911년에 쓴 「철학적 직관」에서 한 철학자의 이론의 구성요소와 이론의 표현 수단 사이에서 일반인이 속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오류는 유기체를 조합체로 보는 것과 진화를 조합으로 파악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는 스피노자가 그 시대가 아니라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다른 표현을 썼을 것이라고 의미 심장한 말을 한다.
그리고 1932년 네델란드에서 열린 스피노자 탄생 300주년 기념 학술 대회에 그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보낸 편지에서 "모든 철학은 두 가지 철학이 있다. 하나는 스피노자의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각자의 철학이다"라고 말한다. 하나의 철학은 자연의 자기 생산의 역동적 과정의 철학으로, 다른 하나의 철학은 각각이 자신의 잣대와 원칙에 따라 자연을 재단하는 철학으로 해석할 수 있다. 생물학과 심리학이 실증의 학으로 성립한 후에 우주(자연) 자체가 자기에 의한 자기 생산으로 간주하는 베르그송은 스피노자의 물체의 생명적 관점을 기하학적 표현에서 심리학과 생물학의 표현으로 옮겨놓은 것일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의 무한성의 의미를 베르그송의 {의식에 무매개적인 자료에 관한 시론}(1889) 제3장에서 비결정성이라하고, 그 본성을 자연의 양면성, 즉 기계적 자연과 역동적 자연으로 구분한다. 그 역동적 자연의 내재적 의미는 스피노자의 '생산하는 자연'과 같다. 다시 말하면 베르그송의 지속-시간론(DI와 MM)과 생명의 진화(EC)를 자연의 자기 재생산(생산하는 자연)으로 읽으면 스피노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런 존재의 실재성은 아직 전부 표출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라깡의 상징으로서 '빈 자리', 구조주의자들의 말하는 '채워 넣어야 할 어떤 것(구조)' 또는 '완성되지 않은 그 무엇', 들뢰즈의 '반복의 비밀스런 주체', 데리다의 '구조 없는 실재성(desconstruction)'일 것이다.
III
우리가 이미 암시하였듯이, 서구 철학사에서 형상철학자들은 그 무엇을 원리, 공준, 공리로서 먼저 받아들이고, 그 무엇을 먼저 정의하여 자신의 사상 또는 사유체계를 정립하는 것이 당연하고 명석 판명한 것으로 여긴다. 여기서 보편 타당성을 가져다주는 것은 당연히 전제로서 그 무엇에 대한 믿음, 즉 직관이다. 이 믿음의 원리 또는 공리로서 제공하는 것이 동일한 것은 동일하다(A=A)라는 동일률이다.
그리고 동일 한 것과 동일 한 것이 아닌 것이 동시에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동일한 것만이 있다. 결국 그 무엇만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자연철학은 불변의 형식적 동일률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정체성을 인식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에서 '전체가 부분 보다 크다'는 것과 '원인은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을 공리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형식적 논리의 동일률과 변화하는 정체성과 매우 다른 차이를 갖는다는 것을 잘 인식했던 사람들은 종교가인 것 같다. 브루노를 처형했던 유일신앙자들이 300년 이상이나 스피노자를 무신론자 또는 범신론자로 공격했다.
범신론의 측면에서 보면 그 무엇이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생성에서도 우주의 생성에서도 근원은 하나이다. 이 하나가 다수로 보이는 것은 자연의 모습의 단면을 재단하는 방식에 따라서 형상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공간적 형상에서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서 한 단면의 형상화는 시간의 단면을 자르는 수만큼의 형상들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공간적으로거나 시간적으로 자른 단면의 원형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세계는 하나의 모습에 대한 다양한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하나의 모습도 인간이 재단한 형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의 모습에서 완성과 완전에 대한 선전제는 인간 인식의 가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로티누스, 브루노, 스피노자로 이르는 하나의 자연은 무한하며 추론적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향하는 인식 노력을 강조하며, 그 존재를 인정하고, 또 인간 자신의 불완전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관계를 공정하게 하려는 노력을 한다. 존재의 무한한 능력의 부분을 가진 각 존재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려는 것도 공통적이다.
우리는 형상론자들의 철학의 공리로서 전제하는 동일률과 두 개의 상반된 존재가 동시에 함께 있을 수 없다는 배중률을 배척하지 않는다. 존재는 존재이지 무일 수 없고, 존재와 무는 동시에 있을 수 없다는 이런 공리는 기본적으로 공간적 사유로서 지속-시간(과거)에 관계없다. 그러나 자연 철학 또는 질료형이상학은 위의 두 공리보다 전체는 부분보다 더 크다라는 공리를 우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어떤 인간의 사유도 전체일 수 없고, 단지 전체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두 개의 상반된 것이 동시에 있을 수 있어야 만이 인간 인식은 전체와 합일 할 수 있기 때문에, 상반된 일부분이 함께 존속 할 수 있다는 공리를 인정하고자 한다. 여기서 과거가 현재 속에 존속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전체가 부분보다 크다는 것은 시간의 대립 항에서도 성립한다. 말하자면 과거를 전부 현재에 동시에 가져다 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얼마간의 과거가 현재에 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과거의 존재의 역사, 생명의 역사, 인류의 역사, 개인 인격의 역사가 현존(presence)함을 어떻게 인식하겠는가? 그 과거 모두 제거하고 현재(present)만 있다는 것, 과거가 현재하지 않기에 과거가 없다는 점은 동일률과 배중률의 원리를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온몸에는 인간의 과거의 역사가 현전하고 있고, 자연의 현전에는 자연의 과거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역사(과거)를 배중률로서는 설명할 수 없다. 이런 배중률과 동일률의 방식에서 벗어나서, 자연의 자기 재생산 즉 우주의 자기 재생산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 것은 인간 자신의 자기 재생산의 과정을 반성하는데서 나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형상 형이상학의 기본적 토대로서 순수공간의 사유는 동일률에 근거하며, 자기 반복적 자기 재생산이다. 그런데 범신론의 철학, 즉 자연의 철학으로서 질료형이상학은 동일률을 형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내용 전체의 과정을 정체성(주체의 자의식, 자연의 자기 생성)에 주목하고, 이 정체성에는 현재 있지 않은 것(무의식)까지를 포함한다. 문제는 동일률의 철학이 자기 확대 재생산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나아가 자기 미래의 결과(결정론, 목적론)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명목적(형식적)으로 그렇다고 하는 것이지, 미래에 대해 규정할 어떤 실증도 실험도 없다는 것은 그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질료론자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목적 없음, 나아가 최후의 심판도 알 수 없다는 미래 비결정론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후자의 철학은 인간의 무능함과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다. 여기서 인간의 비극적 우울한 자화상을 보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내적 연관이나 인간들의 조직화(인류공동체)는 통로 없는 관계의 조화가 아니라, 무한한 열린 통로의 연관이다. 이 연관을 확장하는 기본적 근거로서 스피노자의 "작용하는 권능(puissance d'agir)"를 강조한다.9) 이런 권능은 수학적 점에도 원자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몸(corps)에 있다는 것이다.10) 이것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이 베르그송의 이마쥬(image)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이 형상철학과 달리 질료철학(la philosophie materielle) 을 읽을 수 있다.
IV
스피노자의 인간관을 이해하기 위하여, 인간에 관한 문제제기는 보편성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성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999명이 다 행복하기 위하여 단 한사람의 행복을 짓밟을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999가지의 경우가 충족된다고 해서 한가지를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한가지가 현재의 유용성(l'utilite)이 없다고 해서 미래에도 쓸모가 없다고 판단할 현재의 근거는 없다. 달리 말하면 한 종족이(한 도그마가) 현재에 쓸모 없다는 이유로 구성원 한사람을 단죄했을 때, 인류라는 공통의 미래 확장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모범과 영향을 끼쳤는가를 알기 위하여 소크라테스, 예수, 로베스삐에르, 수운 최제우, 전태일, 장준하 등을 나열할 필요는 없다. 스피노자도 자기종족으로부터, 그 사회로부터 소외당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간의 행복을 기초하는 자유, 그리고 인간의 본성의 이해를 위한 자연(la Nature), 본성의 생산적 확장의 능력(작용할 권능)을 왜 어린 시절에서부터 교육시키지 않는가? 이런 교육이 중요하고 필연적이라고 여기면서도, 서구 사회(프랑스의 철학교육에서도 마찬가지)가 어떤 지적 성숙 단계이후로 미루고 있는가? 근원적 자유가 사회적 경제적 관계에서 자유에 적용되기에는 총체로서 국가(작용할 권능으로서)라는 조직화가 가지는 능력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이해는 단독자로서 자아와 총체로서 자연 사이의 연관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지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런 연관을 이해하고 인식하기 위하여, 현재의 관습과 전통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하면 현재의 다수의 평범한 삶의 양식을 무시하고 새롭게 삶의 양식을 구축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사회를 구축하고 있는 지금까지의 기제가 쓸모 없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 과거의 현재화로부터 다음에 미래로 확장이 필수적이다. 그 필수적 기제를 이해하는 청소년기에까지 서구교육은 자신들의 전통적 사회 규범과 덕목을 익히게 하고, 성장하면서 다른 삶의 태도(다른 방식)에 대처 할 수 있는 길을 터주고, 타문화의 접촉으로 새로운 방식의 이해의 길을 열어준다.
이런 사회 체제 내에서도 교육받은 만큼만 익숙하여, 사람들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의 타성에 젖어서 인습에 따라서 살아갈 뿐이다. 이들에게 습관적 반복은 과거 삶의 반복이며, 미래에 대한 삶도 과거의 반복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과거의 타성적 삶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자는 우리가 지적한 스피노자의 사상 즉 하나뿐인 철학에 접근할 것이다.
그러면 변장된 유물론으로서 범신론 사상에 접근한 사람들이 자기와 동시대의 다음세대에게 그 사상을 왜 전수하지 못하는가? 각 개인이 생산적 능력(권능)을 발현하는 것은 이미 말했듯이 결정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선각자가 예상 참여하는 미래는 이미 다음세대에서보면 과거이며, 다음세대에 맞는 미래 예참의 방식을 누구도 미리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예참 방식을 알았다면 인류가 지금 이대로 살아가고 있을까? 다른(관점) 한편으로 인간은 태어나서 태어나기 이전의 과거의 능력(생산적 권능)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 권능의 활용방식의 일부를 또다시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숙제이다. 이 성장 과정에서 어린이가 이미 자기의 권능의 발전만을 위하여 일방적으로 나아간다면 그대로 나아가게 내버려 두어야하느냐는 것이 문제거리이다. 생체적 성장에는 제재가 필요하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어린 시절의 유아적 상상력이 어른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끄집어낼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성장과정은 변하고 또한 스스로 생성하며, 보다 완전하게 연관을 넓히는 길을 모색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마치 가족과 사회보다 인류를 위한 희생에 더 고귀하게 여기듯이, 이 변화, 발전, 승화의 길은 우선은 시대와 환경에 구속되나, 점진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형성해 간다.
이런 과정에서 그 시대의 지정학적 환경에 따라서 사유를 전개하고, 자유를 성취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먹고살기에 바쁜 사람들이 몸만이라도 아끼는 경제적 태도를 취하며,11) 사유를 확장(연관의 확장, 그 확장의 극한에서 자연의 본질 즉 인간의 본성을 깨달음)할 여유가 없다. 이를 가로막는 고착된 제도 바꾸는 것이 더 급선무이며, 기본적인 경제적 토대 위에 교육(보통, 평등, 일반, 무상)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보는 철학자들이 사회변혁에 대한 관심에서 스피노자를 과거와 달리 읽는다. 이런 새로운 독해는 서구사상사에서 스피노자 르네상스라기보다, 스피노자의 유령의 현전화이리라. 마치 19세기 마르크스가 말했던 공산주의의 유령이 자본주의 사회에 아직도 좌파라는 이름으로 떠돌고 있듯이.
인간 본성의 자기 발전을 인정하는 자들이 유아적 상상에 대해 제재를 가하듯이 한시적으로 유령을 잠재우는 것을 인정하는가? 유령을 잠재우려는 폐쇄적 사회에서 우화적 제재는 사회의 안전망을 구축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론 어린이가 자라서, 어린 시절에 고착하지 않고 성숙하게되면,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우화적 기능임을 자각할 것이다. 그러나 앞선 세대가 어린이에게 성적 제재를 가하는 것은, 마치 단 것을 좋아하는 어린이에게 사탕을 무한히 주는 것처럼 어린이에게 성의 자유가 무한히 주어진다 것이 역기능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의 제도는 일정한 기간동안 사회적 규범으로 제재를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제재가 한 개인의 성적억압에서 신경증을 낳듯이, 사회의 고착화가 굳어져서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 되어서 안 된다.12) 성숙한 자율적 인간은 이 제재를 넘어서 인류의 역동적 자유의 발현, 확장, 성취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자연의 확장인 스피노자의 사상은 개체(살아 있는 존재)에서 전체(자연)로 향한 인식을 통하여 성숙한 인간에게 스스로 자유를 확보하는 길을 제시하고, 개체의 자기 형성에서 또한 공동체의 조직화 형성 속에서 인간의 행복(즐거움, 인격의 성취)의 실현을 제시할 수 있다.
* 이 글은 철학잡지『아카필로』2001년 7/8월호 5권에 실린「왜 스피노자 르네상스인가?」 의 초고입니다. 이 글의 게재를 허락해주신 "아카필로"에 감사 드립니다.
** I 머리글, II-1 르네상스, II-2 자연내재주의 소생, II-3 자연내재주의 부흥, II-4 자연내재주의 배회, III 자연철학의 범신론, IV 본성철학에서 행복
(주석)
1) 이 당시 우주에 대한 관심은 자연과학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종교재판을 받은 갈릴레오는 우주의 생성의 비밀을 풀기 위해 성경을 읽기보다, 플라톤의 우주 생성론인 『티마이오스』편을 탐독했다고 한다.
2)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전체로서 우주(자연)는 하나이고, 그 속에 대립자들이 함께 있으며, 그리고 소위 물체라는 것은 대립자들이 전개된 양상들이다. 이런 점에서, 일자 속에 다질적 속성들이 있고, 이 속성들 중에 두 개의 방식으로 전개(explictio)하는 두 속성을 생각할 수 있으며, 이 속성들의 외양이 사물들인 셈이다. 신이 세계 밖에서 창조한다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사상이 그들에게 배척 당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가?
3) 브루노의 입장은 우리말 번역본『그림으로 보는 철학사』에는 없는 프랑스 번역본의 관점을 따랐다(KUNZMANN Peter, BURKARD Franz-peter, WIEDMANN, Atlas de la philosphie, Livre de poche, 1994(1991)). (우리 나라 번역본은 프랑스 번역본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제법 있고 또한 많은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독일어 원본을 참조하는 사람의 견해가 나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강대 중세 철학연구소에서 발표했고001/05/26) "서강철학포럼"에 실린 김영건님의 「조르다노 브루노의 형이상학」과 박우석님의 「논평」을 참조할 수 있다.
4) 이런 구분을 『자연 철학』(Les Philosophies de la Nature, AMBACHER Michel, PUF: QSJ-1589, P.128, 1974.)에서 참조할 수 있다.
5) 제르파뇽의 『사상의 역사 I, 고대와 중세』(Lucien Jerphagnon, Histoire de la pens e I: Antiqui et Moyen ge, Livre de Poche, 1992, p.220) 에피큐로스 학파 설명에서.
6) 이런 평가는 베르그송의 『류크레티우스의 발췌』(Extraits de Lucr ce, 1883)에서 빌어왔다 (Bergson, Ecrits et Paroles, PUF, 1957, pp. 17-56).
7) Marx: Diff rence de la philosophie de la nature chez Democrite et Epicure, Ducros, 1970(마르크스의 학위논문 1841)의 불어판을 참조했다. 그는 학위 논문에서 에피큐로스를 이렇게 평가한다. "Epicure est donc, des Grecs, le plus grand philosophe des lumi res, et l'eloge de Lucr ce lui revient." (위 불어판 p. 238.)
8) 스피노자의『소론』(Court trait de Dieu, de l'Homme et de son bonheur, 1651-1650)을 통하여 그의 윤리학적 관심의 동기를 엿볼 수 있다. 『소론』은 『윤리학』(L''Ethique, d monstr e selon la m thode g om trique, 1661-1675)보다 앞서 쓰여졌으며, 『소론』에서는서 신과 그 속성에 관해서 매우 간략하고 인간의 심성에 관해서 길게 다루는 반면에, 『윤리학』 1661-1675)에서 신, 영혼, 심성 등이 거의 같은 비례의 분량으로 쓰여져 있다.
9) 이런 견해는 모로(P-F, Moreau)교수의 『스피노자』(Spinoza, Seuil, 1975)에 잘 나나타 있다. 그리고 모로 교수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자연은 생명(la vie)이며, 그리고 스피노자의 몸(corps)에 대한 재해석에서 몸은 너비속성의 생산된 물체(corps)라기보다 살아있는 몸(corps)으로 읽기를 강조한다.
10) 들뢰즈는 이것을 스피노자 철학의 첫 번째 장점으로 파악했다. 이 신체(corps) 속에 무의식 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다.(Deleuze, Spinoza, PUF, 1970). 데카르트 이후로 수학적 점에 어떤 기능을 부여하고 라이프니츠에 이르러 단자가 기억을 보유한다하더라도, 각 몸이 겪고 지닌 기억, 또는 몸에 연관된 기억들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도 단자론으로는 어렵다. 들뢰즈에 따르면, 라이프니츠의 단자는 가루로 빻는 듯한 미분적 차이(미분화)를 잘 표현하지만,, 생물학적 진화처럼 분기의 현상에서 생기는 가지치기의 차이(분기화)를 드러내지 못한다. (Deleuze, Diff rence et R p tition, PUF,)
11)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경제(아낌)란 상품의 교환을 지칭하는 경제적 활동이라기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개인이 "자신이 살기 위해 자신을 아끼는 행위"를 지칭한다. 이 개체의 생존 행위를 위하여, 인간은 오랫동안 지배자나 타인의 권력의 지배 밑에서 생존을 구걸하고 있었고, 지금도 노동자는 자본가의 피고용인이 될 수밖에 없다. 생존의 최소한의 행위에 대하여 개인이 구속받지 않는 삶을 살 수 없었던 것은 우선 총체적 생산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 생산력의 발달시기에 개인이 생존 때문에 구속 당하지 않는 구체적 실질적(mat riel) 경제적 제도를 구축하려고 한 것이 자본주의에 대립하는 공산주의이다. 이 제도의 성립한다면, 개인의 자유나 조직화된 공동체 내에서 개인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평등이라는 개념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끼는 행위"가 생존 때문에 예속상태에 있는 한, 개체의 자유와 조직화 내에서 평등이란 개념은 신화(mythe)일 뿐이다. 즉 우화적 자유와 평등이란 어떤 굴종과 예속 상태에서도, 심지어 감옥에서도 자유와 평등을 맛볼 수 있다. 왜냐구? "자본가는 잠 안자고 안 먹냐, 감옥에 있는 우리도 자고 먹는다"고 말하듯이, 심지어 고착된 사회에서 평등이라는 우화가 언제나 이렇게 끝난다. "(자본가) 지는 갈 때 다가지고 가나, 갈 때 빈 몸으로 가는 것은 나와 마찬가지다 - 자본가가 죽을 때 빈손으로 간다 그리고 노동자도 빈손으로 간다." 이렇게 우화적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12) 베르그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MR)에서, 금단의 열매의 신화가 지속적으로 생명을 가지는 것이 유아들의 금지의 수단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유와 동인』(PM)에서 인류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여전히 어린이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고, 계몽기처럼 이제 막 성년이 된 것(청소년기를 막 넘어선)도 아니고, 성숙한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유가 우화적 기능에 머물고 있음을 한탄한다.
출처 : [기타] http://www.masilga.com/philosophy/General/Piece01.as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