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죽을 때까지 초점 맞춰야 할 네 가지,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표대로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오늘은 2024년 새해 첫 주일입니다.
이틀 전, 교회 가기 위해 운전할 때, 갑자기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 평생 초점을 맞춰야 할 가장 중요한 것들이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강조하고 싶은 네 가지가 생각났습니다. 이 네 가지는 올 한 해뿐 아니라, 평생 초점을 맞추고 추구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래서 새해 첫 주 설교로 어울릴 것 같아서 준비해 보았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입니다. 이것은 회개가 가장 급선무고,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줍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리화 되어, 오직 믿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오직 믿음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처럼 회개하라고 외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수많은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외친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회개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하나님의 메신저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회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탕자의 비유는 회개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 비유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애타는 마음으로 우리가 회개하길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회개하지 않으면 아무리 교회에 다니고 열심히 신앙 생활해도 탕자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에 다니지만 탕자와 다름없는 삶을 사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게 다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대다수의 목사들과 달리 성경은 구약과 신약 모두 회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회개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보여주는 구약 성경의 대표적인 구절은 에스겔 18장 30절에서 32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 것이다.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을 돌이키는 것이 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행위 심판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신약 성경에 나오는... 회개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은 베드로후서 3장 8절과 9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구절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회개하지 않은 자는 모두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회개의 절대적인 필요와 중요성을,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가장 실감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비유에서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절규했어요?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것은 부자가 믿는 자였으며, 회개하지 않아 지옥에 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또 이것이 교회에 다니지만 회개하지 않은 모든 목회자와 신자들의 운명입니다. 안타깝게도 부자는 지옥에 떨어진 후에야 회개의 사활적인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회개하라는 이 설교를 듣고 있는 것 자체가 한량 없는 은혜요, 복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새해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급하고 중요한 것이 회개라는 것을 깨닫고, 꼭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회개는 자백이 아닙니다.
자백할 뿐 아니라, 죄를 끊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사도행전 26장 20절, 먼저 다메섹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와 이방인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그러므로 새해에는 습관적인 죄들을 반드시 끊어버려야 합니다. [1]사랑하는 여러분, 회개하면 살고, 회개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회개를 생명 얻는 회개라고 불렀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8절,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더 나아가 회개하면 생명을 얻지만, 더 깊이 회개하면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고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실제로 평양 대부흥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또 이문동 부흥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회개였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생명을 얻게 되고, 더 깊이 회개하면 풍성한 생명을 얻습니다. 내가 살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즉, 내 안에 생명 샘이 솟아날뿐 아니라,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에스겔 47장에서 본 환상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다시 천 척 측량하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라. 그가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내가 돌아가니,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다.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 예수님의 몸된 교회인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즉 우리 교회를 통해 바로 이 일을 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가 회개하길 원하시고, 더 나아가 깊이 회개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열리고 있는 2차 나라와 교회를 위한 특별 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존전에서 이사야처럼 깊이 회개하여, 큰 부흥을 위해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룩 마음의 청결. 이슬람교는 거룩, 즉 마음의 청결에 관심이 없습니다. 꾸란은 음란을 거룩으로 둔갑시켰다.
깨끗했었던 바리새인들처럼 살면서 자신들이 거룩하다고 착각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참신, 즉 거룩한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그분의 눈은 불꽃 같고, 우리의 말과 행동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다는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단은 이와 다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이처럼 그들의 외식을 폭로하고, 화 즉 지옥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말과 행동은 바른 듯하나, 마음이 방탕한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도 똑같은 기준으로 판단하십니다. 그것이 산상수훈에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또 가늠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가늠하였느니라. 만일 내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떼어내 버리라.
내 몸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참 거룩, 즉 마음이 정결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류에게 거룩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는 굉장히 불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영적인 어두운 밤입니다. 예수님이 예언하신 노아의 때와 롯의 때입니다. 한마디로 음란하고 방탕한 시대입니다.
과거에는 여자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화장하고 옷을 입었습니다. [2]그러나 지금은 많은 여자들이 섹시하게 보이려고 화장하고 옷을 입습니다. 또 인터넷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도 19금 투성이입니다. 안방에서 온 가족이 보는 연속극들, 지나치게 선정적인 장면들이 많습니다.
또 틈만 나면 역겨운 동성애를 미화하려고 합니다. 또한 우리나라뿐 아니라 많은 나라들이 간음죄를 폐지했고, 심지어 동성애를 합법화하려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온 세상이 노아의 때와 롯의 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 우리가 참 거룩이 마음의 청결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룩은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고, 오직 성령으로만 됩니다. 그런데 성령은 기도하는 자에게 임하십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말씀에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가득했던 방탕함을 지적하시고, 그렇게 살면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하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한마디로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즉 기도가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또 베드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시간을 정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러므로 새해 첫 주인 오늘, 오늘부터 매일 기도하기로 결심하십시오.
또 나라와 교회를 위한 특별 기도회가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매 시간 빠짐없이 참석해서 온 마음으로 부르짖으십시오. 그래서 경건의 능력인… 성령으로 충만하여 모두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용서, 오늘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거짓 교리 때문에,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그들은 죄 가운데 살아도 천국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용서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용서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복음서들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이처럼 우리가 용서해야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용서하지 않아 용서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럴 경우 죄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의 값은 사망이고, 둘째 사망인 지옥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지 않는 자들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실제로 성경에 그 사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내가 빌기에 내가 내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내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말씀에 보면 주인이 형제를 불쌍히 여기지 않은 자에게 대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해 준 것을 취소하고,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넘겼습니다.
그러니 구원이 취소된 것이지요. 또 "그 빚을 다 갚도록"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용서해 주지 않고 스스로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죄값을 자기가 갚을 수 있나요? 없습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구원자가 필요 없고,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갚아야 할 빚이 무려 1만 달란트로 대략 20만 년에 품입니다. 절대로 갚을 수 없는 거액입니다.
그러므로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는 말은, 즉 죄 때문에 영원히 지옥에서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마태복음의 권위자인 양용의 교수님도 새로 나온 마태복음 주석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가 빚진 모든 것이 신 만 달란트라고 아했던 때, 그가 감옥에서 풀려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처럼 그는 영원히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주인의 형벌은 최후의 심판을 시사한다.
이처럼 성경은 용서하지 않는 자가 지옥에 간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용서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3]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용서하지 않은 결과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용서가 쉬워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 쓴 뿌리가 생기고, 계속 쓴 물이 올라옵니다. 즉, 증오와 미움과 원망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괴롭힙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이처럼 해가 지도록 분을 풀지 않아도 마귀가 틈을 탑니다. 그런데 용서하지 않고 계속 분노하면서, 한 주, 한 달, 1년을 지내 보십시오. 마귀가 들어와 아예 거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고통당하고 병에 걸리고, 저주스러운 일들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또 끝내 용서하지 않고 죽으면 지옥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상대가 끼친 해보다 이것이 더 큰 손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것을 생각하고, 다 용서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용서해야 할 죄가 아니라, 용서받은 죄를 생각하십시오. 우리에게 용서는 덕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사랑에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용서해야 합니다.
더구나 백 데나리온은 1만 달란트에 160분의 1밖에 안 됩니다. 때문에 이것에 초점을 맞추면 용서가 한결 쉬워집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롭다는 것을 믿고,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전에 박세훈 목사님이 지옥에 대해 설교할 때, 악인들이 지옥에서 받을 끔찍한 형벌에 대해 자세히 말하면서, 이것을 기억하면 용서가 매우 쉽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이 제게 굉장히 공명이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용서한다고 우리에게 죄를 지은 악인들이 전한 것이 아닙니다. 또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 차이만 있을 뿐, 심판을 통해 자기들이 지은 죄값을 다 받게 됩니다.
다만, 내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이 모든 진노를 내게 쌓는 도다. 이처럼 지금은 아무 일이 없고 악인들이 형통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진노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중입니다. 심판 날 홀연히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진노가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그날 회개하지 않은 자는 자기의 죄값을 홀로 남김없이 온전히 받게 됩니다.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거절이 일어나는 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지 아니하실로, 그 찌꺼기까지 땅에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라.
또한 죄값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지옥 형벌이 때문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 주기 바랍니다.
보십시오, 그러면 억울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동시에 두려움으로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사, 예수님 사랑! 천국에는 누가 들어갈까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만 들어갑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이처럼 천국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만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신랑이 신부를 위해 마련한 신혼 집이고, 신부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와 요한계시록 19장의 어린양 혼인 잔치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7절에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나 했습니다.
그러므로 준비해야 합니다. 즉, 신부 단장을 해야만 합니다. 그럼 신부 단장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절, 즉 거룩이요, 또 하나는 신랑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가 해야 할 신부 단장입니다. 그래야 신랑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룩은 앞에서 다뤘으니,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람은 주님을 위해서 살든, 자기를 위해서 살든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실제로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이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다릅니다. 목회자들 중에도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를 위해 사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주님을 위해 살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를 위해 살고 있는지 냉정하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마지막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기심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말세의 의미가 광범위하기 하지만 아무튼 말세 때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기를 사랑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음심 탐심이 아니라 바로 이기심입니다. 실제로 이기심은 이 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국민들의 이기심이 큰 문제입니다.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얼마나... 북한 인권에 무관심합니다. 국민뿐 아니라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들이 개교의 이기주의에 푹 빠져 있습니다. 자기 교회 문제가 아니면, 아무리 악하고 거짓되고 불리해도 나서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도, 교회도, 나라도 결국 이런 이기심 때문에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기심을 회개하고 버려야 합니다. [4]한편,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매일 기도로 교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나타나,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반복해서 물으시고, 그때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을 위한 최고의 사랑은 단순히 말씀대로 살거나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그때도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훗날 그는 예수님이 예언한 대로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랑을 가졌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우리는 현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기 원해야 합니다. 찬송가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이라는 제목이 우리의 소원과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각종 황당한 사고로 허무하게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오늘날까지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죽지 않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값지고 영광스러운 죽음입니까?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사랑이 더욱 커져서, 바울과 바나바처럼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공부를 잘하려면 복습과 예습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제가 설교를 통해 수없이 가르친 것을 복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빌립보서 3장 1절을 포함시켰습니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 그런데 복습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복습은 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한 네 가지를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올 한 해뿐 아니라 평생 이 네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맞추고 신앙 생활하십시오. 바울은 평생, 대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의 대는 위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 즉 궁극적인 구원이었다.
우리가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려야 하는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를 통해 궁극적인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해 힘차게 달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생 이 네 가지의 초점을 맞추고 신앙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궁극적인 구원을 받고, 나아가 면류관과 큰 상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