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그물을 생각한다
오늘은 하늘 그물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천망(天網)은 하늘이 있는 한 작동한다. 어릴 적 유월은 늘 아팠다. 봄가뭄 끝에 비가 내리면 산록에는 안개가 피어올랐다. 겨우내 먹을만하던 댓잎의 달부드레한 꿀도 눅눅해지다가 끝내 곰팡이가 생겼다.
꽃을 떨군 대나무밭 울타리 탱자나무는 검푸른 색의 가시를 사정없이 세우고 길을 막았다.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는 자연은 사나웠다. 농사일이 바빠지면서 엿장수도 개 장수도 보이지 않았다. 하얀 옥당목 한복을 차려입은 팔자 좋은 양반은 밭이나 논에 나가는 적 없이 마을 숲을 떠돌았다. 지나가는 객들을 붙잡고 앉아 막걸리 몇 잔에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완장을 차고 죽창을 어깨에 메고 다녔다는 최씨 박씨 아재 이야기가 떠돌았다. 반목하고 질시하며 서로를 탓하고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이 벌게진 얼굴로 골목길을 배회했다. 총에 맞은 인민군 패잔병이 물을 마시다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는 진개골 웅덩이 진흙은 유난히 핏빛으로 변했다.
와룡산 수정굴에 빨치산이 남기고 간 반합이며 수저를 찾으러 가자는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꿈속에서 따발총 소리를 듣고 한밤중에 일어나 앞산 위에 뜬 달을 올려보기도 했다. 해마다 뻐꾸기가 찾아와 울었다. 전쟁 이후 행방불명된 아재를 서울에서 보았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북으로 간 형님 탓에 몇 번이나 순경 공채에서 떨어졌다는 이는 우체부가 가지고 오는 날 지난 일간지를 받아 자신이 보는 신문인마냥 매일 읽었다.
첫째 주는 늘 망종(芒種)이 들고 현충일이 찾아왔다. 선생님은 며칠 전부터 집에도 국기를 달아야 한다면서 반기를 달라고 했다. 대문에 꽂으면 딱 맞게 만들어진 깃봉에 반기를 달기는 쉽지 않았다. 안방 장롱 서랍에 넣어둔 국기를 끄내 그냥 달았다. 금빛 연꽃 봉우리가 멋진 깃봉과 태극기를 들고 대문 가로 갈 때는 나이답잖게 늠름하고 엄숙해졌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고부터 현충일만 되면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했다. 아픔도 슬픔도 크게 느끼지 못할 어린 나이였지만 묵념 소리만 듣고도 울컥했었다.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친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은 언제나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때는 망종을 죽음으로 알았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알 수가 없다. 망종이란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을 뜻한다. 벼를 논에 심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보리가 익는 시기도 이때다.
망종을 지나서 심은 열매 수확용 씨앗은 자라지 못한다. 모를 심고 모가 심어진 논두렁에 지게 작대기로 구멍을 뚫어 서리태를 심으면 한 해 씨앗 심기는 대충 끝난다.
지금도 기억 속 망종은 보리그스름을 해먹는 날이다. 청보리나 막 익어가는 밀을 베어다 불에 구워 먹어도 별 나무람이 없었다. 구수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보리그스름 맛은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어릴 적 맛이다.
며칠 전 가깝게 지내는 동기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동기생을 추념하러 국립현충원에 가는 길이라 했다. 오지 않겠냐 물었다. 갈 수 없다고 했다. 가고 싶고 또 가야 할 곳이지만 지금의 마음은 그런 여유가 없다. 그냥 아프기 때문이다.
절망의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바라보는 아픔은 쉬이 치유될 것 같지가 않다. 순간 회한이 몰려왔다. 지금의 시대 상황을 생각한다면 청춘의 푸른 꿈을 하늘에서 보낸 것에 도대체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배우고 익혀서 몸과 마음을 조국과 하늘에 바친다」던 교훈이 주던 무게감을 이제는 내려놓아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청춘을 바친 것이 보상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된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망종이 지나는 날, 지인들은 아픔을 이야기한다. 누구는 「사랑으로」라는 대중가요의 가사를 인용하며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있다는 것이며 바람 부는 벌판에 서있어도 외롭지 않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어떤 이는 아리고 저려서 삶의 끝에 다다른 느낌이라며 더 단단해지고 더 강건해질 것이라 자신에게 다짐하기도 한다. 나라로부터 지도자로부터 희망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자유와 정의가 살아있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온 청춘을 바친 날들이 떠오른다.
오직 정직하고 공정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간들도 기억한다. 침묵과 행동의 경계에서 어떤 것이 국가와 민족에 도움이 될까 고민에 빠졌던 날들이 아름다웠던 시절이라 생각한다.
국가가 필요하다고 부르던 시간은 이제 끝났다. 나이가 들면서 인자한 사람은 산으로 들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가를 찾는다는 논어 옹야(翁也) 편에 나오는 말을 끄집어내어 되새긴다.
낙망을 지난 절망 앞에서 제행무상의 법구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성경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 지혜롭지도 못하고 마음이 어질지도 않은 그냥 필부필부의 삶이라고 하찮게 취급받을 이유는 없다. 사사로운 욕심과 개인의 영달에 단 한순간도 목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인생길을 걸었다.
젊음이 아름다움이요 태양과 달이 특별히 다르다고 느끼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마음은 늘 허기졌고 몸은 항상 배고팠다. 숲에는 푸름이 가득했다. 학교가 파하면 소를 몰고 산으로 갔다. 억새가 자라는 언덕배기에서 늙은 암소는 천천히 풀을 뜯었다. 따라간 송아지는 이리저리 겅중거리며 뛰고 어미소는 낮고 긴 울음으로 송아지를 불렀다. 하늘에는 흰 뭉게구름이 낮게 흘렀다. 갈맷빛 산등성을 따라 푸른 하늘이 내려앉고 산골짝 너럭바위에 누워 바라보는 풍경은 가끔 쓸쓸했다.
뒷집 형은 늘 산에서 살았다. 호드기를 만들고 부는 실력이 남달랐다. 버들개지 가지를 꺾어만든 호드기 소리는 청아하면서도 질박했다. 할머니는 풀피리 소리에 진저리를 치셨다. 뱀이 나온다고도 하고 지리산에 숨어든 빨치산들이 연락하는 소리 같다고도 했다.
풀을 뜯는 소를 그대로 버려둔 채 찔레꽃이며 때죽나무 꽃향기에 취했다. 찔레 순은 억세졌고 삘기는 솜뭉치를 머리에 얹고 바람에 흔들렸다. 나무 아래 그늘에서 올라오는 국수나무 새순을 꺾어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상큼함과 쌉쌀함이 어우러진 묘한 맛이 입안 가득 느껴진다.
꼴망태를 가득 채운 뒷집 형이 불을 지핀다. 푸르뎅뎅한 밀을 한 아름 베어다 모닥불 위에 던진다. 흰 연기가 천천히 오르고 약간 덜 여문 밀이 익는 향기가 산골짝 가득하다. 자기네 밭가 소담스레 달린 완두 콩도 훑어와 불에 넣는다. 타닥타닥 콩과 밀이 익어간다. 같이 먹자며 소리쳐 부르더니 잔불 위에서 익어가는 것들을 막대기로 골라 내어놓는다. 해 긴 유월 배고픔을 이기기에 밀 서리 콩 서리만 한 것이 없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뒷집 형 곁에 있었던 탓에 함께 위로를 받았다. 그래도 허기지고 배고팠다.
그 시절 유월이나 지금이나 아프긴 마찬가지다. 무찌르자 오랑캐로 아팠던 그때는 조금 막연한 아픔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아픔은 선명한 아픔이다. 꿈꾸고 지향했던 자유와 정의가 사라지는 아픔이다. 정의가 권력 앞에 굴복하는 모습은 처연하다.
서가 한 쪽에 처박아 두었던 사마천의 <사기>를 꺼내 다시 읽는다. 한 국가의 종말과 권력의 부침이 얼마나 사소한데서 시작되는 것인가도 생각한다. “하늘 그물은 성글지만 어느 것 하나 놓치는 것이 없다. 天網恢恢(천망회회) 疎而不失(소이불실)”는 노자의 도덕경은 지금도 유효하다. 위로가 필요한 이를 하늘은 외면하지 않는다. <끝>
첫댓글 사마천의 사기를 번역했던 문병항 선생님(세무대학교수하시던 분) 책을 제가 출판하기도 하였습니다. 2쇄로 교수님은 93세로 몇해전 작고 하셨습니다. 지지난달 사무실 이전관계로 원판 보존을 못하였네요.. 기흉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한번 바람이 들면 최소한 오년은 간다지요.. 어쩌다 뉴스에서 얼굴이 보이는 그날은 영 재수가 없습니다. 잘 버텨야할텐데 말입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저도 망종이 그런줄 알던 때가 있었습니다. 공감글 감사합니다...
기흉도 문제겠지만
흉기가 도처에 깔렸습니다
거북이 등뼈를 불에 구워 나라의 안녕을 살펴야할 듯 합니다
궁형을 당하고도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 위해 사기를 집필하던 사마천
그 사마천의 집념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요
국가가 필요하다고 부르던 시간은 이제 끝났다// 한푼이라도 저금을 해야 나라가 잘산다고 하던 때가 그립습니다./
ㅠㅠ!
凡人의 탈을 쓴 사기꾼이 대한민국의 얼굴이라며 활기 치고 있지만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모든일은 바르게 갈 겁니다. 事必歸正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음에 공감합니다!!!
고맙습니다
소이불실을 믿습니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은 탓에 소인은 조급할 뿐입니다.
하늘 그물이 제 머리 위에 있다면
그 누군가의 죄업도 보고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하늘과 땅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은 속일 수 없지 않겠습니까
속이고 우기고 괜찮은 척 사는 그 마음은 이미 천망에 걸린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