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의 뉴질랜드 꽁트] 220회. 뉴질랜드 타임즈. 22/8/2019. 금.
우리 자리
“앤디! 여기 창가로 와. 우리 자리로 미리 잡아두었어.”
“오~ 테디! 미리와 있었구먼. 그 자리 참 좋네.”
뉴질랜드의 8월 둘째 주 토요일 저녁
시간. 추운 겨울비가 연일 내리는 날씨다. 비를 맞았는지
앤디가 음식점에 들어오며 옷자락을 툴툴 털었다. 테디가 따뜻한 차를 한잔 따라 내밀었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차를 한 모금 후루룩 넘겼다. 목 안이 따스하게
데워졌다.
“앤디~ 고국에서 아버님 상(喪) 치르고 오느라 참 고생 많았지? 영면하시길 기도하고 있네.”
“테디~ 참 고마웠어. 웬 화환까지 보냈나? 자네 덕분에 고국에 가서 큰일 잘 치르고 왔네 그려.”
앤디가 차 한 잔을 다 비웠다. 비
내리는 창밖을 멀거니 내다 봤다. 테디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을 언뜻 되돌아봤다.
뉴질랜드에 살아온 세월의 더께가 꽤 두터웠다.
이제 겨우 아이들이 독립했나, 했더니…. 고국의
부모님께서 연로한 터에 지병까지 더해 병상에 누워 오래 힘들어하셨다. 지난주 수요일 일 마치고 돌아오는
퇴근 발길이 왠지 무거웠다. 양쪽 어깨에 곰 한 마리씩 붙어있었다. 버거운
무게를 느꼈다.
퇴근 후, 저녁을 막 끝내려던 찰나였다. 고국에서 아버님 별세 소식을 듣고야 말았다. 아~. 그 뒤, 이어진 정신 없이 허둥댄 시간. 우선 비행기 표부터~ 꼬박 밤을 새우고 이른 아침 공항으로 향했다. 12시간을 날아서 인천 공항 도착. 인천에서 공항버스 타고 4시간. 장례식장에 자정 무렵에 간신히 뛰어 들어갔다. 발인부터 삼우제까지. 8월 겨울 나라 뉴질랜드에서 말복 무더위 여름
한가운데 있는 고국. 말 그대로 변화무쌍한 세상을 오갔다. 심정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롤러코스터를 타다 왔다.
세트 메뉴로 나온 깐풍기와 메운 짬뽕을 들었다.
입안이 얼얼하고 매웠다. 둘 다 식성이 좋아 게걸스레 먹었다. 짬뽕 국물을 다 들이켰다. 여러 개 단무지도 꼭꼭 씹어 삼켰다. 춥고 허하던 속이 다소 누그러졌다.
“자네 고국에 간 사이, 자네 집에선 많은 교우가 찾아와 여러 차례 연도를 바쳤지. 자네 아버님 사진을 보며 계송과 후렴 응송이 울려 퍼지는 기도소리가 겨울 저녁을 다 삼키더구먼. 멀리 남쪽 타카니니에서 북쪽 오레와 교우까지 왔더구먼. 한자리에
모여 앉아 바치는 위령기도, 연도 소리에 배인 정성이 훈훈했어. 자네
아내, 써니도 기도 손님 받느라 참 수고 많았지”
“진심으로 고맙구먼. 예전에는 교민들 부모 상(喪)당하면 거의 다 좇아다녔지. 요즘은 직장이 바뀌고 그리 잘 못 해 미안한 마음이야. 함께 할 우리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데.”
“이민 살이 하다 부모님 돌아가시면 얼마나 황망한가, 그 심정 알고 자기 집 일처럼 정성 들여
기도하니 고맙지. 자네 아버님께서도 연도 소리 들으시고 좋은 곳에 영면하셨을 거야.”
그랬다. 앤디와 테디는 이민 초부터
최근까지 공동체 일에 많은 참여를 해왔다. 요즘엔 다 내려놓았다. 다른
젊은이들이 그 자리에서 더 열심히 성심껏 일하고 있다. 봉사와 함께 하는 시간의 자리가 은혜로 이어졌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어땠나? 고국에서 장례 일 치르는 내내 고생도 많았을 텐데.”
“많이 느꼈지. 감회가 아주 깊어. 열흘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정말 일 년에 일어난 일 같아. 사람들도 엄청 많이 만났고. 농축된
시간을 보낸 편이지.”
“그럴 거야. 인생사에서 이런 일보다 더 큰 일이 많지 않잖아.
그래 사람은 큰일을 겪으며 인생을 깨닫게 되는 게 아니겠나.”
“어디 선산에 모셨다 했지?’
“어렸을 때 성묘 다니면서 참 많이도 걸었지. 이 산 저 산 흩어진 조상 묘소에 성묘하느라. 아버님이 그걸 마음 아파했던 것 같아. 노후 사업으로 마무리를 하셨어. 산을 사 복숭아와 매실나무를 심고, 가족 묘지를 조성했지. 참 오래 걸렸지. 흩어진 조상 묘소를 다 한 자리로 모았지. 아버지 어머니 가묘까지 만들어 놓고 가셨어.”
“그 덕에 후손들이 때 되면 모이고, 함께하는 자리를 갖게 돼 잘됐네.”
테디가 앤디의 빈 찻잔에 뜨거운 차를 가득 부었다. 앤디가 후루루 차를 들이켜더니 눈매가 촉촉해졌다.
“있잖아. 아버님을 선산에 모시고 재의식을 온 가족이 함께했지.
아버님 묘 아래쪽으로 내려오던 중이었어. 그때, 앞장서
걷던 형님이 한 말씀 하더구먼.
“이 아래 줄이 우리 자리야.”
‘우리 자리?’
“난 그 말에 그만 소금 기둥이 돼 버렸어. 얼음 땡 놀이하다 딱 멈춰선 아이가 되었지. 형님이야 하나밖에 없는 동생 생각하고 무심코 한 말이었을 텐데. 난
전류가 찌르르 흐르는 거야. ‘우리 자리?’ 난 그 말이
왜 그리 생경하게 느껴지던지. 뉴질랜드에서 인생 후반을 보내왔잖아. 아이들도
뉴질랜드에서 장성했고 독립까지 한 터잖아. 그동안 알바니 공원 묘지에 수많은 분들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자연스레 생각을 해왔거든. 나도 나이 들어 언젠가 세상을 떠나며 이곳에 이렇게 묻히겠구나.”
“그러네. 그 말을 내가 들었다 해도 뭉클했겠네. 이곳은
외국이잖아. 이곳에서 오래 살면서 터 잡고 살다 보면 의당 먼 훗날 쉴 곳도 알마니 공원묘지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지. 그런데 요즘 세상이 바뀌고 있어. 아이들도 자유롭게
호주나 고국으로 직업을 구해 가기도 하지. 더군다나 우리도 나이 더 들어 은퇴하면 고국도 자주 드나들
거고. 고국 발전 속도는 대단하지. 우리 이민 올 당시 20여 년 전 하고는 개벽을 한 셈이지. 대신 뉴질랜드는 그때 비해
적게 발전했어. 앞으로는 이중국적도 허용될 텐데.”
“맞아. 새로운 변수가 계속 나타난 거야. 아이들이
만약 고국에 뿌리를 내리면, 먼 훗날 우리만 동그마니 알바니에 묻힐 이유도 없지.”
모를 일이었다. 10년 전에는 안
그랬다. 당연히 알바니를 생각했다. 지금은 경계선에 있다. 알바니인가 고국 선산인가. 10년 후면 어떨까. 테디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다. 테디 아들은 오클랜드 대학을 나오고
고국에서 군 생활을 마쳤다. 직장도 서울이다. 손주들이야
영어 때문에 이곳에 올 수도 있겠지만. 나중은 모를 일.
“여유 있으면 은퇴 후, 뉴질랜드와 고국에서 반반씩 살아도 괜찮겠어.”
“그거 좋은 생각이네. 현실 타당성도 있고. 그러면
우리 자리가 어딘가?”
‘우리 자리?’
둘 다 이 단어에 신들린 듯 빨려들었다.
“자, 우리 건배하세. 우리 자리로.”
“우리!”
“자리!”
건배 소리에 아슴아슴한 심금이 두 사람 가슴에 뜨겁게 스며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