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으로 풀어본 한국사
□ 도봉구 도봉동의 유래
○도봉산의 아래 자락
도봉동道峰洞은 도봉산 아래에 마을이 위치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봉산은 태백산맥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려 온 광
주廣州산맥의 하나로 강원도 철원에서부터 봉우리가 일어나서 기복을 반복하여 들어오다가 큰 줄기가 여기에 와서 멈추었는데 연봉이 지금 서울의 도봉구와 경기도 양주군의 의정부시 장흥면에 걸쳐 있다. 또한 웅장한 산세가 도봉동과 의정부시의 접경 지역인 천축사天竺寺와 망월사望月寺뒤에서 크게 집결되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도봉동의 연혁은 조선 제21대 왕 영조 때 편찬된『여지도서輿地圖書1 에 경기도 양주목내 해등촌면에 속하었음을 알 수 있다.
도봉산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이 시작된 것은 일제 때인 1914년부터로 보여지는데, 부군면을 동폐합할 때 도봉산 아래의 다락원, 서원안말, 무수울 등을 합하여 도봉리로 하니 이것이 도봉이라는 동리 명의 출발이 된다. 도봉동의 자연 마을은 도봉산의 골짜기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 도봉서원의 윗마을서원내
종로구 돈의동에 있는 조광조 집터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양주목 불우조佛宇條에 청룡사靑龍寺, 망월사, 회룡사回龍寺, 원통사圓通寺, 영국사寧國寺가 모두 도봉산 아래 있다고 되어 있다. 이 중에 영국사 옛터에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짓고 유교계 정치가로 이름이 높은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를 향사享祀하게 된 것은 조선 선조 때인 1573년(선조 6)부터의 일이다. 조광조는 청년 시절부터 산수의 풍경을 사랑하여 자주 찾았으며, 또 관계에 나가 바쁜 중에도 여가만 있으면 찾아와서 마음의 여유를 찾던 곳이다.
유학에 조예가 깊고 평소 조광조의 학문과 인격을 숭앙하던 동강東岡남언경南彦經이 양주楊洲목사牧使로 부임하여 와
서 조광조의 유적지인 이곳에 서원을 짓고 그를 향사하게 하였다. 서원 건립에는 도봉산의 산수와 인연이 깊은 서민 시인이자 남언경의 제자 촌은村隱유희경劉希慶이 주선하며 감역한 노고가 컸다.
도봉구 도봉산 내에 있는 도봉서원
도봉서원은 이듬해인 1574년(선조 7)에 선조의 어필을 사액 받기도 하였으며 산수풍경이 수려한 이곳에 정전正殿과 동
서재齋를 갖춘 도봉산의 명소가 되었다.
도봉구 도봉산에 있는 도봉동문
도봉서원의 입구에는 도봉서원의 소재지를 알리는 도봉동문道峯洞門이라는 네 글자가 큰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길 위로
올라가면 넓은 마당 한가운데에 도봉서원의 옛 사당이 있다. 서원에는 1696년(숙종 23)부터 송시열을 함께 향사하여 왔다. 첩설疊設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 없앴다가 광복 후 양주 유림들의 주선으로 정전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윗서원(서원안말)은 도봉서원이 있던 마을로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영국사라는 절이 있어 영국리라고 하
였는데 선조 때 이 절을 헐고 도봉서원을 세우자 그 뒤부터 윗서원이라 하였다.
도봉서원을 중심으로 있는 마을은 윗서원이라 하고, 하천을 경계로 해서 그 밑에 지역을 서원내(서원천동書阮川洞)로 구
분하였다. 서원내는 주위에 냇물이 흐르던 마을로서 이상기후로 인한 피해가 있었으나 1999년 7월에 다리를 완성한 이후에는 비로 인한 피해가 없다. 서원내는 과거에 전형적인 논농사 지역이었으며 현재는 이 지역 모두 주택단지로 변모되었다.
서원안말에는 현재 광륜사光輪寺라는 사찰이 있는데 이는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조만영趙萬永의 딸인 조 대비가 나라
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던 곳이다. 조 대비는 신정神貞황후로서 조선 익종의 비였다, 1808년(순조 8) 태어나 1819년(순조19) 세자빈에 책봉되어 가례를 올리고 현종이 즉위한 뒤 왕대비가 되었다. 철종이 죽자 왕위 결정권을 가지게 되어 고종을 즉위케 하였으며,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고 흥선 대원군에게 정책 결정권을 내려 대원군의 집정을 이루게 하였다.
그 후 조 대비는 이곳에 팔곡 대사를 불러 나라를 위한 기도 및 자식들의 수명장수를 기원했고, 1890년(고종 27) 하세 후
수릉綏陵에 안장되었다. 따라서 동소문 밖에서부터 의정부까지 현재의 북한산국립공원 자리까지가 조 대비의 땅이었으며 지역 주민들은 이 땅에서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도봉서원을 중심으로 골짜기마다 마을 이름들이 지어졌는데 갓굴은 서원내 서쪽에 있는 골짜기를 뒷굴은 도봉서원 뒤에
있는 골짜기를, 묏굴은 서원 너머 골짜기를 말하는데 옛 분묘가 많이 있다.
○ 서낭당이 있는 무수울
무수울은 서낭당이 있는 마을이므로 서낭당 또는 무수동無愁洞이라고도 하였다. 이 지역은 조선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데, 과거 어떤 침입에도 피해가 없었다고 하여 외지인들이 무수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무수물에는 웃말과 가운데 말(가운데우무실) 그리고 아랫말이 있는데, 웃말은 웃무수을 웃무수골, 상무추동上無愁洞이라고 불렀으며 무수울 윗쪽에 있던 마을인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오른쪽에는 안동 김씨가 약 7~8호 거주하였고, 왼쪽 마을에는 전주 이씨가 4-5집 거주하였는데 그들은 세종의 서庶제9왕자 영해군寧海君과 평산平山신申씨의 후손들로 보인다. 무수울은 또 근심이 없는 마을, 신선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영해군의 묘소가 선인무수仙人橆袖형인데서 유래한 것 같다.
세종 서 제9왕자 영해군 묘소. 도봉구 도봉산
웃무수골의 양편 주민들은 서로 상대방을 보고 넘 말이 라고 불렀으며 가운데 마을에서 양쪽으로 갈라져서 다른 골짜기에 거주하였기에 서로를 웃무수울이라고 하였다.
또한 무수울에는 밤나무가 많이 있어서 밤나무골이라고도 하였는데, 현재는 고목이 되어 과거에 밤나무골이었음을 알게
해 주는 흔적 만이 있다. 현재 이 지역은 개발제한구역으로 북한산국립공원이어서 지역 주민들은 밭농사를 하며, 과거와 큰 변화 없이 생활하고 있다.
가운데말은 현재 철원상회를 중심으로 한 곳으로서 양 웃말의 분리되는 지역을 말하고 아랫말은 무수교 밑의 지역을 말하며 몇몇 지역은 아직도 무수골이라는 상표를 걸고 장사를 하고 있다.
○ 서울로 들어서는 교역의 중심지 다락원
다락원은 조선 시대에 함경도咸鏡道원산元山~강원도 철원鐵圓(현 철원鐵原지역)-경기도 포천抱川을 거쳐 서울로 가
는 길의 물품 교역이 번창하였다. 한양으로 들어서는 관문인 이곳에 누원점樓院店이라는 상점이 생기면서 다락원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누원은 상누원上樓院(웃다락원)과 하누 원下樓院(아랫다락원)으로 번창하였는데 상누뭔은 지금의 서울시 도봉동이고 하누원은 의정부시 호원동이다.
그런데『동국여 지승람』의 양주목 산천조山川條를 보면 도봉산은 주州남쪽 30리에 있다 하였고 역 원조驛院條에서는
{덕해원德海院에 대하여 도봉산 아래에 원야原野가 있으니 해촌海村이라 하고 원우院宇가 있으니 덕해德海라 하는데,
이는 경성과의 거리가 30리 이다.)
라고 하였다. 이는 도봉산 아래 덕해원은 서울과 양주읍 사이 모두 30리 거리로서 도봉산 아래 있었다는 것이니 곧 원의 소재지가 이곳 다락원이었던 것을 말해준다. 즉, 동북 방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30리 지점에 덕해원을 두었던 것이다.
누원정은 도봉1동 340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웃다락원은 다락원 위쪽 마을로서 과거에 북쪽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상인들은 주로 곡식이나 옷감 등을 다루었으며 상인들이 활동하는 번화한 지역으로서 오고가는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하였다. 이와는 달리 아랫다락원은 서원내의 옆 마을로 논농사를 하면서 지내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현재 웃다락원은 과거의 화려함은 뒤로 한 채 몇몇의 초라한 상가만이 남아 있고, 아랫다락원은 주택 단지가 형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