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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란 시인의 시 세계
순정한 삶의 시선과 풍경들
자꾸만 힘이 빠진다
당신을 놓고 나 살아갈 수 있을까!
<시詩> 전문
짧은 두 행으로 구조되어 있지만, 그 속에는 많은 말들을 함의하고 있다. 시인에게 시가 삶의 부분일 수 없다는 고뇌이면서 최소한의 자의식에 대한 기표이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시는 단순히 존재론적 가치를 전달하는 언어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처럼 다양한 시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부터 고, 현대까지 차고 넘쳐난다. 시가 갖는 기능 중에서도 시 미학적인 관점과 시적 감응을 통한 양방향의 소통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거기에 시인이 살아온 삶의 덕목까지 내재되어 있다면 그 책임은 더 무거워진다. 시인의 내면화된 세계로 쓰인 시가 언어라는 텍스트로 활자화된 이후 몫은 현시대 실존하는 대중의 것이기에 당연하다. 김수영의 <시>는 시가 가져야 할 많은 의미를 새겨보게 된다. “더러운 일기는 찢어버려도/짜장 재주를 부릴 줄 아는 나이와 詩/배짱도 생겨가는 나와 詩/정말 무서운 나이와 詩는/동그랗게 되어가는 나이와 詩/사전을 보면 쓰는 나이와 詩/사전이 詩 같은 나이와 詩/사전이 앞을 가는 변화의 詩/감기가 가도 감기가 가도/줄곧 앞을 가는 사전의 詩/詩.”를 생각해 본다. 그만큼 시는 주어진 시대정신뿐만이 아니라 삶의 미래까지도 고통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고독한 신념을 요구한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삶으로 주어진 시간만큼은 공평하다. 그 시간 속에서 사람마다 다른 삶은 연속성을 띠며 세월을 엮어간다. 김금란 시인도 문청 시절의 열정을 가슴에 묻고 살아오다, 몇 년 전부터 새롭게 시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 이면에는 더 이상 외면해선 안 될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어느새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와 반백의 세월이 된 과녁을 겨누고 있다. 그런 것을 이미 눈치챈 시인은 과녁에서 비켜 서 있다. <그리움을 숨기는 방법>마저 실행할 때가 된 것이다. 아까워서 미루던 긴 머리도 잘랐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인사차 건네는 관심마저 긴 세월처럼 불편하다. 짧아진 머리숱에 흰머리가 눈에 띄자 그 핑계를 “오래전 내가 좋아했던 시의 제목이/도대체가 생각나지 않는다고/저는 투정 같은 핑계를 쏟아”냈다 하지만, 해소되지 않는 그 무엇 때문에 공소감은 더 커져버렸다. ‘그리움을 숨기는 방법’도 결국 낯섦과 모호성을 위반하지 않는 범주에 다다르기 위한 것이라면 보편성을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쉽지 않지만, 현실에 대한 긍정을 통해 세월은 깊이를 가진 평면 위에서 이내 안정된다. 진솔한 자기 고백은 신파의 조건을 극복하고 지극함으로 삶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 당신 생각을/까맣게 잊은 척, 염색약을 바르고 앉아/그리움을 숨기는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봅니다”라는 현실은 또 다른 의미에서는 시가 되기 위한 조건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를 말하고 있다. 시인은 친숙한 언어에서 찾아내는 낯선 시의 범주로 나아가는 방법을 보편성에서 발견해낸다. 좋은 시의 조건은 다양하고 고도한 깊이를 요구한다. 그마저도 삶의 반경과 인간적인 관계의 덕목을 벗어나면 좋은 시로 기억될 수 없다.
그토록 진지하게 시의 세계랄 수 있는 삶의 전경을 돌아보며 살아왔기에 판단도 가능하다. 시인이 태어난 곳이 강원도 동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무릉리란 곳이니 상상만으로도 충분한 곳이다. 그러다 보니 심성 자체가 유유한 것도 성장지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시속에 간간히 드러낸 세계가 자연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실존에 대한 사유를 주로 근거한다면 말이다. 시의 근원적 모태는 결국 시인을 키워낸 고향에 정서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모든 부분을 문화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자연을 떠나 문화를 이룰 수 없듯 자연은 인간의 의식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관점은 동일한 가치로 인간의 삶에서 반영되거나 인간의 행위로 결과될 수만은 없다. 김금란 시인의 시속에서 발현되는 자연관은 매번 인간관계인 삶의 가치로 녹아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생명 활동의 근간이 되어준 자연은 본원적인 의미로 삶 속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시도 자연으로부터 학습된 언어 행위의 일환이라면 김금란 시인이 지향하는 문학은 자연의 생태를 인간의 감각적인 사유로 현현顯現하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자의식이 개입된 언어활동이 내면화되고 결국 시의 세계로 표출해내는 과정에서 변용과 전이로 다양하게 이미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과정이 때로는 평면적인 구도 속에서 감정 이입을 통한 이면을 배태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김금란 시인은 담담히 시를 전개하면서 그 안에 삶의 구상을 틈입시켜 읽는 즐거움을 은근하게 부여한다.
<봄날>은 어머니와 그야말로 한 때의 즐거운 커피 타임을 가지면서 있었던 담화임을 알 수 있다. “난생처음 마셔보는/거품하트가 예쁘게 그려져 있는/카페라떼를 앞에 두고/커피를 너무 끓였나보다 하시며/엄마는 스푼으로 하트 거품을 휘저어 버리고는/입으로 후후 불어 커피를 식히신다/엄마 그 예쁜 걸 좀 보고 드시라니까//봄볕도 잠깐이고/눈 깜빡 할 새지 하신다” 그냥 지나쳐 버리면 그만일 모녀간의 대화가 시의 수평을 지우고 삶의 서사를 구조하고 있다. 커피 잔에 거품으로 만든 하트는 젊은 연인에게 대단한 의미가 된다. 그 한 잔의 커피를 통해 뜨거운 가슴을 나누고 사랑의 감도를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연세 지긋한 어머니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즐길 만큼 한가하지 못하다. 여유도 다 때가 있는 것이다. 그 시기는 인생으로 치면 봄날이고 봄날도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니다. 봄날 잠깐 드는, 봄볕마저 찰나임을 경고하고 있다. 어머니의 입으로 발설한 자연의 이치는 딸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자 언어 이전 몸말의 진정성을 본래대로 보여준다. 시가 갖는 위의는 인간의 가장 진실한 말을 입술로 전해올 때 적어가는 사실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 시가 자연 분만한 아이처럼 모성을 나와 한 생명이 되듯 어머니의 “봄볕도 잠깐이고/눈 깜빡 할 새지”라는 몸에서 나온 입말은 진실한 자연의 언어임을 보여준다. 어디에도 개입되지 않는 감정은 ‘봄볕’의 소중한 가치를 더해준다. 김금란 시인의 시어는 애써 파격을 넘지 않으려 한다.
가장 민감한 봄이 오기 전 앞서 핀다는 <동백>은 “잊었던 기억 떠올린다고/떠나간 사람 돌아올까/몇 번의 봄이 다시 온들/지난 시간 그 봄날은 아닐 것인데/어쩌자고 저 동백은 매번/온몸 던져 자신을 보라하는가”에서처럼 이미 시인은 그런 동백의 속성을 꿰뚫어 보는 나이가 되었다. 예전에는 미처 읽어내지 못했고 마냥 붉어 핀 동백을 보며 그저 안타까운 감탄사만 발했을 것이다. 시인은 그 시절과 같은 동백꽃 앞에 서있다. 한 때 붉은 동백꽃을 보며 자신을 위로 삼던 시절을 떠올린 것이었을까. 외려 더 담담하게 동백에게 말을 건다. 누구나 한 시절 저토록 붉었던 적 있었다며 전하는 말은 곧 자신의 지나온 시간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홀로 붉어 더 괴로워 미워했고 사랑했기에 차마 내 마음도 되돌아서야 했다는 신파조의 넋두리를 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토록 절박했던 동백 붉은 꽃잎처럼 누구나 누군가를 향해 목매여 산다. 굳이 동백꽃뿐만이 아니라 무엇을 구분하지 않듯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까지도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것이다. 그래서 시에서 보여주는 말은 삶의 진실을 통과한 언어다. 그 언어가 시의 실체로 다가올 때는 더 큰 시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매사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시인의 시론 같은 시다. 시가 갖는 언어적 특성이 상상력으로 재현하는 데 있다면 꼭 이성적이거나 명징해야 할 이유는 없다.
비가 온 것인지 눈이 온 것인지
아니면 새벽 안개에 젖은 것인지
아침은 뿌옇고 땅은 젖었고
겨울은 깊어 가는데
어디에도 흰 눈은 쌓이지 않았다
당신은 없고 나는 자주 외로웠고 밤마다 기억도 없는
꿈을 꾸시는 머리 하얀 엄마는 종일 이마를 짚으며
기억을 찾다 힘줄 끊어 진 어깨를 늘어트린 채 멍하니
앉아계셨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찜질 팩을 데워 엄마의
어깨에 올려놓았고 왼쪽 어깨에 찜질 팩을 덮은 엄마가
등을 돌리고 모로 누우면 엄마의 뒤에 등을 대고 누워
손등으로 몰래 눈물을 닦곤 했다
-<그해 겨울> 전문
1연 “어디에도 흰 눈은 쌓이지 않았다”며 시인의 신념과 다른 현실에 대한 본의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더 불편해진 심리적 기저에는 확신이 서지 않는 꿈같은 현실에 대한 발설임을 알 수 있다. 계절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그 무엇도 보여주지 못한 겨울 날씨 탓이지만, 한편으로 시인은 힘든 겨울을 맞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 겨울은 시인의 감정 내부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겨울이며, 그 또한 스스로 감내해야 할 심리적 겨울이다. 공교롭게도 겨울이면 응당 와야 할 눈마저 내리지 않았고, 이도 저도 아닌 겨울 풍경처럼 마음은 심란하고 그래서 더 불편하다. 마치 시를 읽다 보면 꿈꾼 다음날 혼란스러운 증상이 압축과 전위로 미끄러져 기억되는 것처럼 온통 머리가 복잡하다. 그 얽힌 내면에 영향을 끼친 것은 최근 들어 엄마의 건강이 쇠약해짐으로 비롯된다. 그런 걱정으로 결국 밤잠을 설치듯 <그해 겨울>에는 유난히 날씨마저 그랬다는 것이다. 매번 겨울이면 하얗게 눈이 내렸다.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보며 마냥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면 그만이었던 시인이다. 그런 겨울은 응당 기다림의 대상이 아닌 당연하게 누리기만 하면 되는 일상이었다. 마찬가지로 엄마도 딸에게 아파 힘들어하는 모습이 아니라 항상 딸을 보듬어 다독여주는 엄마였었고 그래야 맞다. 매사에 전능全能한 모습으로 챙겨주던 엄마도 더 이상 그렇지 못했고, 이번 겨울은 어디에도 그런 풍경을 찾아볼 수가 없다.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 풍경과 엄마의 쇠약한 모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 하얀 겨울의 눈과 엄마의 아픈 모습을 딸인 시인은 받아들일 마음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아직은 빈 공간으로 남겨놓았지만, 그곳마저 시라는 언어는 고개를 내밀려 할 것이다. 시는 그런 공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불안 같은 징후는 순서를 알리지 않는다. 다만 어느 날의 상황을 인식하도록 보여줄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슬픔을 잊었다>는 아버지의 유고에서 오는 심리적 무상감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심리적 공허를 떠안은 이후 감정을 극복하고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인간은 겨울이 봄으로 바뀌었다고 겨울이 사라졌다거나 죽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가족 중 누군가가 죽게 되면 부존재로 규정짓고 모든 것을 지워내야만 한다. 겨울의 흔적은 봄 속에 고스란히 기억되는데 아버지의 부재로 떠안게 된 혼란스런 공간은 살아남은 가족들로부터 지워진다. 지난겨울은 그렇게 시인에게 혹독한 계절로 왔다 갔다. “한때 당신의 이름의 한 획 이였던 활자들이/가끔 꽃샘 추위처럼 내 머릿속을 찌르고 지나갈 뿐/죽을 것처럼 오열했던 순간들은/땅에 닿은 흰 눈 보다 더 빨리 사라졌다/나는 다시 울음보다 웃음이 더 많아 졌고/남해 여행 책자를 뒤적이고 있었다”며 계절의 변화를 핑계 삼아 마음의 틈을 지워내려 한다. 하지만, 지울 수 없는 그곳에는 아버지를 고스란히 기억하는 고향 동네였던 “무릉도원면 아랫골 길 163-12 ”가 있다. 그곳을 떠올릴 때마다 오랜 시간 침적된 인간적인 연민과 슬픔이 위안과 긍지로 되살아난다. 그래서 고향은 영원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나이 들면 이명처럼 종종 고향의 바람소리를 듣게 된다. 그 바람소리에 묻어온 오래된 것들조차 기억 속에서 낯설지 않다.
<바람 속에 들다 2>에서 “해가 저물면/산 짐승 소리도 산새 소리도 다 바람이 되는 곳/잣나무골 하늘이 숯가미실골 고무실골 당거리 새목/감동 골 무실 인천 골 앞 골 뒷골 나무랫 골 방심이/고토실 칡모재 수세골 늘어지골 김시랑골/오르매기골 돌메기골 도장골 갈쿠리재골/저 수 많은 골짜기 마다/바람 소리에 울음을 숨긴 사람들이 바람처럼 산다/그곳에 바람이 불면 사람은 바람이 되어 숲으로 가고/골짜기 마다 또 웅웅 바람이 우는 소리 들린다”. 여기에 나열된 고유한 명칭들은 지시적인 언어가 아니다. 살갑게 불러지던 지명들은 시인의 내면에서 오래도록 호흡하며 다양한 변용과 성장으로 지켜온 언어이고 시의 내부에서 또 다른 시적 세계로 끝없이 유입될 바깥이자 유한한 정처가 된다.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곳이며, 허구가 아닌 실체로 존재한다. 그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는 시인에게만 소유되는 삶과 시적 윤리의 가치이고 기준이 된다. 문학성을 앞세운 시속에 무슨 윤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시에도 정직한 삶처럼 덕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詩이기 전부터 말이었고 언어로 대체된 순간 절대적인 타자의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고향의 이름들을 떠올리며 시가 갖춰야 할 덕목을 반성하고 시로써 발설할 수 있는 경계를 가늠하며 나와 너를 생각한다. 유년의 가슴으로는 감히 불러볼 수 없던 ‘무릉리’ 산골짜기 이름들을 이제는 시인의 가슴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 시인의 것이 아닌 자연의 이름으로 불러줄 때 나를 버릴 수 있게 되었고, 그럴 때 시인은 세상 안에서 비로소 나올 수 있어 바깥이 되었다.
<시월의 북두칠성>은 머리맡의 성좌다. 사람에게 귀천이 없듯 은연중 인간은 지상의 최고를 꿈꾸며 산다. 현실과 달리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개연성은 매우 낮다. 그래서 더 희망을 품게 되고 그 유혹을 끝없이 동경하며 상상한다. “갈증이 뼛속까지 번진 날”처럼 그런 날은 유난스럽게 다가온다. 시인은 시와 소통을 꿈꾼다. 항상 시를 통해 북두처럼 빛나는 별이 되기를 소망한다. 시인은 그런 상황을 맞고 있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모두 빛나는 별이듯, 시인이 한 땀씩 써 내려간 시문장도 보이지 않는 별처럼 빛나는 것을 모르거나 잊고 산다. 어차피 별이 빛나는 것은 별이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하늘의 별과 인간의 간극이 무한하듯 그 거리만큼 시는 무수히 존재한다. 시가 존재하는 지점은 인간이 스스로 주체성을 버리고 다가갈 때 만나는 자연과의 교합점이다. 그것마저 최소만이 인간의 내면으로 수렴될 뿐이다. 나와 너의 거리를 인정할 때 그 거리만큼의 시가 보여줄 수 있는 가치가 곧 시적 윤리이다. 시인은 그 윤리적 가치를 시적 언어로 기록해내는 양심수인지 모른다. 시인이라면 갖게 되는 고통은 슬퍼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놓지 못한 마두금 연주처럼 사람들의 심금을 두드릴 때 그 지경은 시의 정처에 다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신호 체계를 모스 부호처럼 몸으로 받아들인다. 온몸의 촉수가 열려있어야 세상이 보이듯 시인의 사물적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을 향해 몸으로 다가간다.
<길냥이들의 꿈3>은 그렇게 사유되고 소통하는 대상의 일부가 되었다. 우연찮게 집안의 철 지난 옷을 정리하다 아파트의 쓰레기 분리 장소에서 만난 “표정 없는 눈빛을 마주했다/우리는 둘 다 놀라 서 있었다/슬픔이 슬픔을 마주하는 순간”을 통해 간절한 생의 의지를 교감한다. 그렇게 집안에 들인 ‘길냥이’라는 고양이가 당당히 가족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가는 과정을 적고 있다. 이번 시집에 길냥이에 대한 시가 네 편이 들어있다. 그만큼 가족 공동체로 희로애락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젖은 슬픔들이 길 위에서 살아가는 방법은/슬픔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서로의 슬픔을 이해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존재의 비참함과 우울함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은 장소에 따라 다를 수 없다. 휴일 여행 삼아 찾아간 곳이 ‘삽시도’다.
우선 지명부터 낯선 섬을 떠올리게 하는 <삽시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궁금했다. 이 섬은 대천에서 한 시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이다. 그 섬에 도착하면서부터 따라붙은 “누더기 털 북숭이” 개와 있었던 하루다. 시인은 그 개를 버려진 개라고 여기며 측은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서서히 가여워지는 마음으로 개와 소통이 이뤄지기 시작한다. 처음 만난 개를 따라 바닷가를 돌아다니다 보니 헝클어진 ‘털 북숭이’ 개처럼 시인도 바닷바람에 머리칼이 헝클어져 닮았다고 생각한다. “나를 데리고 자꾸만 더 깊은 섬으로 들어가는/저 녀석도 어쩌면 나를/이 섬에 버려 졌을 거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주머니에 주워 담은 조개껍질 하나/툭, 길 위로 떨어진다”며 그마저 미련을 갖는다. 버려진 개 한 마리와 있었던 일이 무에 그리 대단하냐 하겠지만, 시인은 은연중 소통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끼리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사물 속에 편입된 모든 대상까지 구분 짓지 않는 관계론적 사유를 말하고 있다. 시인은 엄마의 아픈 모습과 어느 날 세상을 훌훌 털치고 가신 아버지의 부재와 눈 오지 않는 겨울의 공허함 마저도 관계론적 사유 속에서 떠올리고 있다. 그런 일상을 되짚어보면 결국 살아생전 진정한 소통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되돌아보게 된다. 소통의 시작은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나가 아닌 타자에 대한 인식에서 가능하고, 말이 비로소 시詩다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궤도를 놓치다>에서 시인은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 주체적 삶이 무너지는 풍경과 만난다. 그 풍경에 등장하는 타자를 보며 안타까워한다. 누군가에게 저 사람도 한 때는 훌륭한 주체로 존재했을 것이다. 이미 왁자하게 떠들어대는 술집 거리에서도 기성세대는 어느새 밀려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거리를 메우는 사람들은 ‘젊음’이라는 특권을 가진 주체들로 가득하다. 밀려난 사람들은 맨 정신으로는 가슴속에 자폐 된 언어를 발설하지 못한다. 그마저 가능할 때는 술의 과음으로 남아있던 자존감마저 망가져야만 실현할 수 있다. 그 “누군가 놓아 버린 사랑이/누군가 놓쳐버린 사랑이/서로 다른 궤도에서/서로 다른 슬픔의 무게로 휘청이는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순서라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단번에 나빠지지는 않는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종종 등을 기대며 서로를 의지하는 법도 알고 있다.
<기대어 선다는 건> 힘에 부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준다는 것이며 “누군가에게 등을 내어 주는 것”은 사람 마음속 지극함 때문이다. 기댈 사람이 없으면 담벼락이나 버스 정류장이든 기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효과적인 대상이 된다. 서로가 서로를 기댈 수 있는 대상으로 의식하고 순서를 기다릴 줄 안다. 그러다 누군가가 다가와 시인의 등을 버팀 해주었다는 그 사람이 그리운 시간이다. 그 사람은 자기 의지일 수 있거나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실재한 대상일 수도 있다. 시인이 지명한 대상은 바로 우리 곁에서 흔하게 맞닥뜨릴 수 있는 ‘누군가’와 ‘담벼락’과 ‘나무’와 ‘버스 정류장’ 그리고 ‘가로등’이다. 시인이 스쳐온 것들에는 많은 사람들의 지극함으로 어둠을 견디어 온 곳들이다. 어차피 어둠은 이미 지나간 낮의 시간들을 좌표로 그려놓고 있는지 모른다. 그 좌표에는 소시민적 삶의 경계와 그 주변의 무정물無情物까지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다.
<서쪽은 항상 당신의 왼쪽에 있었으므로>가 확신하는 의문에 한 번 더 시를 읽게 된다. 시인이 말하는 곳은 모두가 생각하는 ‘서쪽’인가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만 시를 따라 해 보았더니 맞는 말이다. 왼쪽 가슴은 오른손의 위로가 필요한 것까지도, 누군가를 위해 필요했을 손과 가슴을 가졌을 때의 이야기다. 이제는 그마저 필요 없게 된 이후 모든 것들은 그대로 제자리만 지키고 있다. 서로를 배려할 이유가 없어진 그 배후에는 사라져 버린 ‘서쪽’이 도사리고 있다. 그 서쪽의 세계는 실재하는 대상이 아닌 상상 속에 존재하는 신의 영역을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서쪽으로 가는 길에는 슬픔이 붉었으므로”라며 심미적인 형상으로 재구성해낸다. 그곳은 누구도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곳임을 각인시킨다. 모든 사람들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어둠 너머‘서쪽’을 떠올린다. 그런 시간은 항상 어둠을 배후로 금기처럼 갖고 있다. 시도 그런 범주 속에서 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은 왜 늘 빛나는 아침이어야 했을까>라며 시인은 사람들에게 또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쉽게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만이 아는 시간으로 발신된 “어느 우주인의 간절한 모스부호 같은/똑똑 또르르 똑똑 또르르/우주를 뚫고 하늘을 뚫고 캄캄한/어둠을 뚫고 외치는 저 간절한 부름/대답 없는 지구와의 슬픈 도킹,”을 전하고 있다. 그렇게 무수한 신호음을 내며 누군가를 찾아가지만 시간의 어긋남을 비껴가지 못한다. 관제 임무만을 부여받은 시인의 전언은 애를 태우겠지만 끝내 버릴 수 없다. 그 빗방울 소리는 특정한 언어의 시간 속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인 혼자서는 불행하게도 온전한 도킹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인간이 갖는 어둠에 대한 공포감처럼 “1994년 4월22일 지구 출발/2018년10월3일 지구 도킹 실패/당신은 지금 궤도를 이탈하였습니다/다시 도전해 주십시오”라는 메시지는 “지난 밤, 먼 곳을 헤매던 얼룩 묻은 짐을 풀고/힘없이 돌아와 누운 축축한 너의 숨소리 같은” 누군가에게는 당장 실현되어야 할 절박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은 항상 아침을 수행하며 대상의 일체를 이루어 새로운 수신을 요구한다.
김경주 시인은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에서 그렇게 말한다. “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라고, 그 소리의 주체도 시간이 허락한 만큼을 욕망하다 떠났을 것이다. 우리가 인식한 시간과 시간을 공유하는 모든 것들 안에서 울려 나오는 고유한 소리가 있다. 절박한 신호 같은 소리가 닿지 못한 시간은 반복되어 다가올 것이다. 온몸을 열어 놓고 그 소리를 우린 들어줘야 한다. 언젠가 자신의 시간 앞에서 소리소리 질러가며 누군가를 향해 창을 두드릴지 모를 일이다. 김금란 시인이 부단하게 드러내는 좋은 삶의 지향은 좋은 시로 읽힐 수 있는 전제가 됨을 말한다. 그마저 불온한 욕망으로 치부해선 안 될 아름다운 욕망임을 공감한다. 그것은 문학적인 것이고 틈을 메워온 그만의 질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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