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계(羽溪)는 강원도 강릉(江陵) 남쪽에 위치했던 신라 때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의 우곡현(羽谷縣)이었는데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이 우계(羽溪)로 고쳐서 삼척군(三陟郡)에 속했고,
1018년(현종 9)에 강릉(江陵)에 속하였다.
우계 이씨(羽溪李氏)의 시조(始祖)는 알평(謁平)의 후손으로
고려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좌복야를 지낸 이양식(李陽植)이다.
그의 아들 순우(純祐)는 의종(毅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으며,
경주(慶州)에서 우계(羽溪)로 이거(移居)하였다.
그 후 양식(陽植)의 5세손으로 예빈경(禮賓卿)을 지낸 구(球)에 이르러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우계(羽溪)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구(球)의 현손인 광식(光軾)이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했으며,
광식(光軾)의 아들 감(戡)이 대사헌(大司憲)을 지내 가문을 중흥시켰다.
전의 손자 복남(福男)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나주 판관(羅州判官)·남원 부사(南原府事) 등을 지내고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이르러 정유재란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戰死) 하였다.
또한 감(戡)의 손자 명남(命男)은 참판(參判)을 역임하였으며,
경항(慶恒)의 아들 서우(瑞雨)는 시문(詩文)에 뛰어났고 명필(名筆)로 이름이 높았다.
이 외에도 상우(商雨)가 찰방(察訪)을, 경제(慶薺)가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계 이씨(羽溪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390가구, 14,09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