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현종대왕 이야기
아들아, 이번에는 좀더 세월이 많이 지나서,
오랜만에 고려시대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숭의전 (경기 연천군, 고려 태조, 성종, 현종, 원종 배향)
개성이 북한에 있어서 고려 관련 왕릉과 유적이 거의 그쪽에 있으니까..
여기서 고려를 떠올릴 수 있는것은 강화도나 아니면 연천 숭의전 정도일까?
아빠가 풀어줄 이야기는 1010년 제2차 여요전쟁(麗遼戰爭) 때의 일이고, 당시 고려의
국왕으로 고려 제8대 왕인 현종(顯宗, 王詢, 992~1031)과 그의 장인이 될 공주절도사
김은부(金殷傅, ?~1017)의 범상치 않았던 만남의 이야기란다.
고려 현종 (드라마 천추태후 中)
아들아, 고려의 34명의 왕들 중에서도 현종(顯宗)하면 범상치 않았던 어린 시절,
왕이 된 후에는 강력한 외적, 거란이 세운 요(遼)와의 전쟁이라는 시련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왕실의 권위를 다져 나라를 안정시킨 명군으로 평가받는 분이지.
현종의 휘는 순(詢), 안종으로 추존된 왕욱(王郁, ?~987)과
헌정왕후 황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왕욱은 태조 왕건의 아들, 헌정왕후 황보씨는 태조 왕건의 손녀였으니 헌정왕후는
따져보면 왕욱의 조카이면서 조카인 경종의 왕후였으니 조카 며느리가 되고..
헌정왕후 황보씨와 왕욱 (드라마 천추태후 中)
헌정왕후와 현종의 관계는 모자관계이면서 또 사촌형제 지간이 되니까
지금 따져보면 족보상 절대 있을 수 없는 그런 관계였다 할 것이다.
그리고 헌정왕후 그녀의 언니도 역시 경종의 비였던 헌애왕후이자 목종의 모후인..
그 유명한 천추태후(千秋太后)였다.
천추태후 (드라마 천추태후 中), 조카를 죽이려 한 역사상 가장 살벌한 이모
아들아, 그러나 천년전 고려시대엔 왕실간의 핏줄을 유지하려는 수단이었지
그런 의도로 족내혼, 근친혼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문제는 왕욱과 헌정왕후 황보씨의 관계는 그런 고려시대에도 용납될 수 없는
그런 관계였다는 것이지.
고려의 제5대 왕인 경종(景宗)이 승하하자 그의 비인 헌정왕후는 사가로 내려와
살았는데, 왕욱과 이웃으로 가까이 살며 왕래가 잦았던 모양이야.
그러다 이들은 눈이 맞아서 넘어선 안될 선을 넘어버렸지.
그래서 역사에서는 이들의 관계를 사통(私通)이라 기록한단다.
고려8대 임금 현종 부자상봉길 (사천시 정동면)
왜냐하면 헌정왕후 황보씨는 선왕인 경종의 왕후였던 사람이기 때문에,
왕욱은 무엄하게도 감히 선왕의 비를 범한 것이 되기 때문이야.
결국 이들의 관계를 성종(成宗, 961~997, 재위 981~997)이 알게 되어
왕욱을 경상도 사수현(泗水縣, 현재의 경남 사천)으로 유배보냈고,
헌정왕후는 홀로 아들을 출산하다가 산고로 사망하여 ..
왕순은 태어나자 마자 천애고아가 되었단다.
그래도 성종은 이 아이를 불쌍히 여겨 거두었고, 보모를 붙여 길렀단다.
하루는 성종이 왕순을 궁으로 불러 대면하게 되었는데,
이 갓난 아이가 성종의 무릎 위로 기어 올라가 아비, 아비하고 부르니..
성종이 눈물을 흘리며 왕순을 그의 아비가 있는 사수현으로 보내 함께 살도록 하였다.
왕순은 아버지인 왕욱이 996년 죽고, 다음 해에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기 까지
경상도 사수현에서 살았지.
개경으로 돌아온..왕순에게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단다.
왕순은 12살 되던 해에 대량원군(大梁院君)에 봉해졌지만, 그의 이모인 천추태후가
그를 숭교사로 보내 출가시켜 버렸어.
이는 천추태후가 대량원군 왕순을 그의 소생인 현재의 왕인 목종의 잠재적 경쟁자로
보고 견제했던 것이고, 또 천추태후 또한 김치양(金致陽)이란 역신과 사통하여 또다른
아이를 낳아 그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는 뜻에서 끊임없이 목숨을 노렸단다.
1006년, 대량원군 왕순은 선재란 이름으로 북한산 신혈사(神穴寺, 현재의 진관사)에
숨어 수차례 자객들에 의해 죽을 위기를 넘겼다고 해.
1009년, 김치양의 반역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서북면 순검사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시해하고 김치양과 그 아들, 일파를 죽이고 숙청했으며,
천추태후를 몰아낸 후에 대량원군 왕순을 고려의 제8대 왕으로 옹립하니..
이분이 바로 현종이시다.
여요전쟁도
겨우 18세의 어린 국왕, 강조의 정변..그러니까 군사 쿠데타로 얼떨결에 왕에 오른
현종의 앞날은 왕이 되어서도 험난했단다.
거란이 세운 북중국과 만주를 지배하는 강력한 대제국 요의 성종(聖宗)이 고려에서
일어난 강조의 정변을 명분삼아 무려 40만 대군을 몰아..침략해 왔지.
어린 나이에 왕이 된지 겨우 1년, 아직도 어수선한 정국까지 고려와 현종은 대위기에
몰렸단다.
고려 초, 가장 강력한 위협..거란족
요 성종의 40만 대군에 맞서 현종은 강조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맞서게 했지만,
강조가 오히려 통주(通州,평북 선천)에서 대패하여 고려의 주력군이 붕괴하고
순식간에 요의 대군이 서경(西京, 평양)을 넘어 파죽지세로 왕도인 개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단다.
고려 조정은 할지(割地), 항복 그리고 전쟁 등 의견이 분분했지만,
아프고 치욕스러우나 어떻게 보면 가장 현실적 의견을 제시한 시랑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현종의 몽진을 결정했단다.
고려 왕이 전란 중에 몽진에 오른 최초의 일이었다.
목적지는 한반도의 남쪽 끝이 가까운 전라도 나주(羅州).
태조 왕건의 비인 장화왕후 오씨의 고향, 고려 왕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줄 곳.
아들아, 현종의 피난길은..아마도 역사상 가장 험난하고 비참한 피난길이었을 것이다.
중랑장 지채문의 호종을 받아 나선 피란길에 나섰지만, 제대로 된 호위병도 없었고,
그나마 따르던 신하들, 수행해야 할 궁인들이 왕을 버리고 도망한 자도 부지기수였지.
아무도 피란길에 나선 고단한 왕을 돌아보지 않았단다.
아니, 왕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듯했어.
창화현에서는 한낱 아전에게 병장기를 빼앗기고, 적성현에 이르니 무뢰배들이 왕의
행렬에 활을 쏘고 하기를 여러 차례 ..
들리는 고을마다 아전이나 수령이 왕을 모시기는 커녕 위협을 했단다.
백성들도 돌을 던지고 차갑게 외면했지.
현종이 국사를 그르친 바없고, 폭군도 아니며..아직 제대로 나라를 다스려볼 시간도
없었는데..그런 어린 왕에게 세상은 참으로 가혹했다.
오죽했으면 현종은 공주를 지나며 임신한 왕비를 그녀의 친정인 선산으로 따로
보내기로 했을까.
현종의 그 험난한 피란길에 유일하게 따뜻하게 맞아준 곳이 바로 공주(公州)였다.
공주절도사 김은부는 술과 음식을 바치고, 토산물을 바치며 지극 정성으로 모시며
현종의 호감을 사는데 성공했다.
하공진 장군
현종의 어가가 드디어 나주에 이르고, 충신 하공진(河拱辰)이 등장해서 그 자신을
희생하고 외교로 화의를 청하여 요 성종의 대군을 되돌리는데 성공하고,
양규 장군과 김숙흥 장군의 최후..(드라마 천추태후 中)
강동6주(江東六州)와 서경에서 도순검사 양규(楊規)와 구주별장 김숙흥(金叔興)이
요에 점령되었던 성을 탈환하고, 토벌하면서..포로가 된 백성들을 구축하여
요의 배후를 압박하는 활약과 마지막의 장렬했던 희생,
은열공 강민첨, 김종현 장군 등이 서경을 고수하여..요군의 퇴로를 압박하여,
요 성종이 퇴군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제2차 여요전쟁이란 위기를 넘기는데 성공했단다.
현종은 전쟁이 끝나고 개경으로 환도하는 길에 특별히 호의를 베풀었던 공주를
기억하고 다시 공주에 들러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환대를 받고,
이때에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딸들과 연을 맺게 되어 비로 삼게 되니..
이분들이 덕종과 정종을 낳은 원성왕태후 김씨와 문종을 낳은 원혜왕후 김씨란다.
그러니까 아들아, 공주절도사 김은부는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손님 접대를 잘해서
한번에 왕의 장인이 되고 또 후대 왕들의 할아버지가 되는 영광을 받게 된 것이지.
아들아, 우리 역사 속에서 나라의 위기를 당하여 서울을 버리고 몽진이란 선택을 했던
임금과 지도자가 상당히 많다.
고려 때도 고종이 몽골을 피해 강화로 파천했다가 아주 눌러 앉았고,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 때에 복주(福州, 현재의 안동)까지 파천했던 적이 있었으며
조선 선조는 7년 조일전쟁을 만나 의주까지..
인조는 이괄의 난 때에 공주, 정묘호란 때는 강화,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대한민국에 들어서서 이승만 대통령도 한국전쟁 때 두번했지.
그런데 아들아, 그 몽진을 했던 이들중에 그때의 치욕을 딛고 나라를 재건하고,
훗날을 제대로 대비하여 나라의 치욕을 씻은 사람은 아빠 생각엔 거의 없다.
예외가 있다면..그게 바로 고려의 현종이었다.
현종은 그 험난한 몽진 과정에서 능력있고 충성스러운 신료라 중용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었고, 반대로 버려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몽진길에 도망했던 신료들이나 궁인들, 심지어 그를 무시했던
아전들까지..보복하기 보다는 그래도 포용하는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 중용되어 역사에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한 사람들 속에는 인헌공 강감찬과
은열공 강민첨 장군이 있었다.
인헌공 강감찬 장군
은열공 강민첨 장군
현종은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부터 유배지에서 성장하며 가장 낮은 곳의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봐왔고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원치 않았던 승려가 되어 또 이모와 역신 김치양으로 부터 목숨을 위협 받으며
살아남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야 했던..강한 사람이었다.
험난한 몽진길을 통해 현종은 절망이 아니라 고려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고려가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하고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세워진 고려지만 아직도 그 영향이 많이 남아있어
고려라는 울타리 안에 하나로 통합하는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하고,
고려 왕실의 권위와 힘이 없어서 강한 중앙귀족과 호족의 힘이 강해서..
고려의 통합을 저해하고 기강이 바로 서지 않으므로 왕권을 강화해야 겠다..
여요전쟁 당시 고려의 대외관계
그리고 백성의 삶을 더 나아지도록 하는 방법을 찾고
그리고 반드시 다시 쳐들어올 요에 대비하여 송과의 외교관계를 다지고,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해 지난 수모를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다.
현종은 그에 대한 해답을 어느정도 찾고, 해결해가며 성과를 내었다.
특히 1018년 제3차 여요전쟁이 압권이었다.
상원수 강감찬, 부원수 강민첨..그리고 20만의 대군이 준비되었고
이들은 한번의 패전없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고, 구주의 벌판에서 요의 대군을
격멸하여 요가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단다.
아들아, 이 전쟁에서는 현종은 요의 대군이 개경 가까이 다가와도 끝까지
개경을 사수하고 다시는 몽진하지 않았단다.
실패와 시련을 딛고, 준비하여 마침내 그 수치를 씻고 대업을 이루었으니,
아들아..고려의 현종이야 말로, 성군이고 정말로 훌륭한 임금이다.
그는 대왕으로 불릴만한 자격이 있다. 고려의 현종대왕 말이다.
현종대왕릉 (북한의 개성시)
아들아, 아빠는 공산성에 가서 한바퀴 돌아보며..고려 현종대왕을 생각했다.
사람 잘보고, 기회를 잘 잡아서 집안의 영광을 본 공주절도사 김은부란 사람도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종대왕의 험난했던 몽진길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수많은 몽진과 파천이란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던 그 수많은 임금과 지도자 중에서도
왜 현종대왕 그만이 남다른 특별한 사람이 되었는가 하고 말이다.
아들아, 너는 그 답을 알겠느냐?
잘 모르겠다면..다시 한번 현종대왕의 삶 전체를 두고 한번 음미해보는게 어떨까.
그러면 어쩌면 그 답이 나올지도 모르지.
-----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