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읽히는 수필 / 홍성암

[들미소(손수지)]

<영동수필 세미나>

좋은 수필, 읽히는 수필

                                                                             

홍 성 암  

(문학박사, 전 동덕여대 교수)   

   1. 수필의 성격

   오늘날 문학계에서는 수필의 전성시대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수필에 대한 관심이 크고 또한 많은 수필가들이 배출되고 있다. 그것은 생활수준과 지적 수준의 향상으로 여가의 시간을 문학에 관심 두는 사람이 크게 증가했고 이들이 문학 장르 중에서 가장 접근이 쉬운 수필 장르를 택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필은 특별한 기교를 필요로 하지 않고 진솔하게 자신의 체험을 서술하는 것이어서 전문적인 문학적 소양을 갖지 않아도 큰 어려움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장르적 성격을 지닌 면도 없지 않다. 그런 특성 때문에 문학의 초보자들은 수필을 쉽게 여기고 가볍게 접근하는 경향도 보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상당수의 수필들이 일상적인 신변잡기의 수준이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잡문’ 정도로 폄하될 소지를 지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수필이 문학작품 즉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문학 일반이 지니는 제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즉 그 내용에 있어서 인생의 성찰에 기여해야 하고 서술에 있어서 일정한 형식미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언어예술로서의 조건이기도 한 적절한 비유, 신선한 이미지 등도 갖추어야 한다. 동시에 참신한 내용이어야 하고 유머와 위트가 있어야 하고 철학적, 사색적 깊이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수필은 시, 소설, 희곡 등과 달리 문학적 사상과 이념을 수용할 수 있는 형식적 틀이 따로 없기 때문에 매 작품 마다 작가 자신이 자신의 이념에 맞는 새로운 틀(형식)을 창조해야 한다. 마치 시에서 정형시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자유시를 창조하는 것과도 같다. 기존의 어떤 규격화된 형식의 도움 없이 매 작품 마다 그 작품에 맞는 새로운 형식을 창출한다는 것은 상당한 갈등과 고민을 유발하게 된다. 수필을 무형식의 형식이라고 하고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그렇게 주어진 자유로움이 실제에 있어서 작가에게는 고통스러운 작업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어려움 때문에 비평가들은 젊은 열정과 감성만으로도 접근할 수 있는 시를 20대의 문학이라고 하고 등장인물의 갈등관계를 치밀한 구성으로 스토리를 만드는 소설을 30대의 문학, 그리고 인생의 경륜이 어느 정도 성숙해야 가능한 희곡을 40대의 문학이라고 했다. 그런데 수필은 50대 이상의 문학이라고 한다. 자신의 인생관, 세계관이 내적으로 성숙하고 사물과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 굳이 형식을 의식하지 않아도 그 글에 자신의 사상과 이념이 자연스레 투영되는 것이다. 그만큼 수필은 글을 쓰는 작가의 인간됨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평소의 깊은 사색과 자기 성찰, 그리고 인격적 수양과 도덕적 수련 등이 모두 글속에 용해되어 드러나기 때문이다.

   2. 좋은 수필, 읽히는 수필쓰기의 요령

   좋은 수필 또는 읽히는 수필을 위해서는 깊은 사색과 올바른 이념과 철학을 지닌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글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기본 바탕에서 출발하여 소재를 찾고 글을 구성하고 언어를 선택하는 등의 문학적 행위는 일반문학과 다를 바가 없다. 좋은 수필 쓰기의 몇 가지 요령을 살피고자 한다.

     1) 소재의 선택

좋은 수필은 좋은 소재에서 시작된다. 좋은 소재란 그 글이 우선 글 쓰는 자신을 감동시키는 종류여야 한다. 자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감동시킬 수 없다. 자신을 감동시키는 소재는 대체로 자신의 체험 영역에서 얻게 된다.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했거나 다른 사람의 경험을 들었거나 또는 독서 등의 방법으로 간접적으로 알게 된 종류로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종류가 되어야 한다. 그 소재의 양상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인간의 불완전성(우주의 불가사의, 신비함) :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인간이 살고 있는 우주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 비일비재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에 귀의하기도 하고 무당을 찾기도 한다. 인간이 스스로 아무리 조심하고 노력해도 예상치 못한 일이 운명처럼 다가오고 더러는 감당하지 못할 엄청난 재난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운명적 두려움, 본질적 고독함 같은 것은 인류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품의 소재로서 읽힐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예시)

*뱀 꿈, 구렁이알, 목 졸린 흔적(겁화경)

*정월 초하루의 점치기 (불면증)

*황소의 농부 살해(황소의 반란) -필자의 작품에서-

     (2) 인간의 욕망과 삶의 존재방식(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 사람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고 사는 문제다. 그리고 삶의 방편으로 사랑과 증오가 중심이 된다. 흔히 천국과 지옥, 또는 천사와 악마, 선과 악 같은 분류는 이런 사랑과 증오의 다른 양상이다. 이는 인간의 천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성선설과 성악설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극단적인 두 양상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선(善)을 지향하고 헌신적 사랑의 가치에 무게를 둔다. 이는 종교가 지향하는 바와 같다. 문학은 종교의 전단계라고 할 수 있다.(창세기 경우)

인간의 성적 욕망은 때로는 사랑과 동일시되기도 하고 때로는 정 반대의 폭력적 범죄가 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스스로 자제할 수도 없고 조절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프로이드는 이런 성적 욕망이 변질되어서 살인과 같은 폭력의 형태로 나타난다고도 한다. 숭고하고 헌신적인 사랑의 형태는 흔히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드러난다.

*<겁화경>에서 주인공 임 노인의 죽음

*<불면증>에서의 우연한 죽음

*<리빙웨이>에서 선장의 죽음 -필자의 작품-

*휴가병의 창녀촌 선택(홍종석 소설)

*어느 수녀 이야기 : 유방암, 유방절제 : 사랑의 고백

*화장실 구렁이 (홍기삼의 어머니)

*아침 이슬 털기(이순원의 어머니)

       (3) 삶의 성찰과 깨달음 : 수필을 “일상생활에서 그 소재를 얻는다.” 라고 말할 때 대부분 여기에 해당된다.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는 잔잔한 이야기 또는 새로운 발견 등이다. 삶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이야기들, 이웃들과의 우애, 가벼운 유머와 위트, 여행지에서 본 새로움 등이 모두 좋은 소재가 된다. 생활의 지혜나 사색, 양심의 가책 등도 해당 된다. 포스터는 작품의 소재로 <탄생, 죽음, 잠, 밥, 사랑>을 들고 여기에 <일>을 덧붙일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보면 일상사의 모든 것이 글의 소재가 되는 셈이다.

*동창회 뷔페 약속 (순덕, 영애)

* 영자야 사랑한다.(박영식, 주문진 기행) -『강릉 가는 길』에서-

*강원도 비포장 도로 (완행버스)

     2) 집필의 단계(집중화와 단일한 인상)

소재가 선택되면 집필의 단계가 된다. 어떤 순서로 이야기를 서술할 것이냐의 문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글은 일정한 길이를 지니는 것이고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머리와 몸과 다리로 되어 있듯이 글도 그런 양상이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글은 일정한 길이를 지닌다고 하는 관점도 매우 중요하다. 수필의 길이는 200자 원고용지로 10매 내지 15매가 적당하다고 보는 관점이 많다. 가급적 20매가 넘지 않아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이는 수필 장르가 지니는 인상의 집중화와 단일화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에서 서술되는 내용이 지나치게 길고 복잡하면 수용자 입장의 독자에게 혼란을 준다는 생각 때문이다. 서술단계를 처음, 중간, 끝이라는 3단계로 설정해 보자.

       (1) 처음(가벼운 실마리) : 글의 처음은 대체로 가벼운 일화로 시작한다. 사소한 사건서술, 단순한 대화로 시작해서 독자로 하여금 부담감을 주지 말아야 한다. 적절한 유머를 통하여 독자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도 좋다.

       (2)중간( 깨달음, 재발견) : 글의 중심축이 되는 부분이다. 글을 쓰게 되는 목적과 맞물린다.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나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 같은 것들이다. 철학적 사색이든 일상적인 견해든 체험적인 사실에서 얻어진 결실이어야 한다. 흔히 글을 ‘재창조’의 기능을 지닌다고 한다. 하느님이 우주를 처음 만든 것이 창조라면 글은 그런 창조물의 참된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전혀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되기도 하고 대충 알고 있었던 것을 확실하게 재인식하기도 한다. 그래서 재발견 또는 재창조란 말을 쓰는 것이다.

       (3)마지막(자기반성) : 글의 마무리 부분이다. 대체로 자기반성의 형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후회되고 아쉽고 새로운 기회를 다시 만들고 싶은 그런 마음의 상태로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다. 즉 노드롭 프라이의 『사계(四季)의 이론』에 따르면 모든 글들은 자연 순환의 주기를 따른다. 즉 <봄- 여름- 가을- 겨울 – 다시 봄> 하는 식이다. 글이 마무리되면서 새로운 시작을 예감하는 것이다. 가을의 결실(열매)에 씨앗이 있어서 봄에 다시 움트는 것이다. 그런 자연 현상이 글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3) 언어 수련

문학은 언어예술이다. 작가의 사상과 이념을 언어로 표현하고 또한 언어로 사색한다. 언어는 표현도구일 뿐 아니라 사색 그 자체다. 어떤 면에서 문학작품은 언어의 유희다. 언어로 즐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표현 못지않게 신선한 새로움이 느껴지는 언어를 발굴해야 한다. 생기 넘치는 언어, 함축미가 느껴지는 언어, 무엇보다도 작가의 음성이 느껴지는 개성적인 언어여야 한다.

모파상이 스승에게 지도받은 언어는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이다. 어떤 사물을 표현하는 가장 적당한 말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하나밖에 없는 적절한 말을 찾아 표현하는 것이 문학언어의 요체다. 그런 언어 훈련을 위해서 더러는 세계 명작을 베껴 쓰기도 하고 국어사전을 그대로 필사하기도 한다. 우리가 좋은 언어 바른 언어를 위해서 해야 하는 노력에는 다음의 경우가 있다.

(1) 다독, 다상량, 다작 :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라.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다. 문학에 정도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평소 독서를 많이 하고 많이 사색하고 많이 써보는 것이 정도다.

(2) 자신의 목소리(개성적 목소리) :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이는 글에서 개성적인 자기 모습이 들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진솔해야 한다. 쉽게 써야 한다. 소박하고 수수함 속에는 다른 거짓이나 꾸밈이 개입하기 어렵다. 그런 글속에는 자기 자신의 모습, 자신의 체취가 물씬 풍기게 된다. 모방이나 표절의 단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3.좋은 수필, 읽히는 수필을 위하여(산문기법)

   산문 문장은 사실의 정확한 서술이 중요하다. 비유나 상징 등의 방법도 정확한 전달을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런 산문 문장의 특성을 잘 감안해야 한다. 너무 잘 쓰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지나친 수식이나 과장을 하는 경우는 글의 감동을 저하시킨다. 특히 시적 리듬의 글을 삼가야 한다. 시적 비약은 글을 난해하게 한다. 또한 시적 리듬은 글의 내용을 마음에 맺히게 하지 않는다. 얼음에 굴러가는 유리알 같이 그냥 기억 속에서도 미끄러져 사라진다. 따라서 내용의 중요한 인상을 흐리게 한다.

   유창한 언설도 피해야 할 부분이다. 내용이 그 유창함 속에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한 때 일본의 유명한 변호사들은 모두 말더듬이었다는 말이 나온 적도 있다. 정확한 법률적 근거에 의해서 조심스럽게 말하다 보니 매우 더듬거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필 문장도 그런 서툴러 보이는 표현 속에서 진솔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독자들은 유창한 언설의 글일 경우 자신이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수필의 생명이 진솔한 체험을 드러낸 글이기 때문에 진실 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부록>

아버지의 삶

홍성암   

평생토록 몸담았던 교직 생활을 청산하면서 시골에 농가주택을 마련하는 것이 소망이었다. 농촌에 태어나서 자란 터라 고향에 대한 향수도 컸었고 거기에다 신통치 못한 건강도 한 몫을 했다. 그런 소망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지인의 소개로 철원 휴전선 근처에 작은 땅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교통이 비교적 편리했다. 전철 1호선으로 동두천까지 가면 철원의 백마고지역까지 통근열차가 운행되었다. 백마고지역에서 기차 시간에 맞추어 읍내로 가는 셔틀버스가 운행되는데 농가주택까지는 10여 분 걸렸다. 자택이 있는 의정부에서 대체로 2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그러다 보니 여가 시간만 있으며 농가주택을 찾게 된다. 200여 평 되는 텃밭에 욕심껏 농작물을 심었다. 상추, 쑥갓, 아욱 같은 채소와 고추, 오이, 가지, 토마토, 호박도 심었다. 검은 콩, 흰 콩, 쥐눈이 콩에다 옥수수도 심었다. 매일 자라는 농작물 바라보며 수학에 대한 기대도 한껏 부풀었다.

그런데 문제는 잡초였다. 날씨가 무더워지면서 잡초들이 무섭게 자라는 것이다. 잡초의 종류도 다양했다. 갈대처럼 억센 뿌리를 가진 놈, 쐐기풀처럼 끈질긴 줄기로 뻗어 오르는 놈, 쇠비름처럼 부드럽지만 많은 곁가지를 치는 놈, 놋날 같이 가늘고 강한 줄기를 가진 놈 등등이다. 며칠 동안 부지런히 뽑아놓고 나면 다음엔 새로운 잡초들이 자리를 잡는다. 비 온 뒤에는 더구나 잡초들이 우거져서 뽑아 놓은 잡초더미가 여기저기 산더미를 이루었다.

농사를 전문으로 하는 마을 사람들은 제초제를 사용한다. 많은 논밭에 잡초를 일일이 제거할 시간이 없다. 논밭의 잡초뿐 아니라 논둑이나 밭둑 심지어는 마을의 오솔길에도 제초제 세례를 퍼붓는다. 우리에게도 잡초를 뽑을 생각을 하지 말고 제초제를 사용하기를 권한다. 잡초를 이길 장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극구 반대다. 시골까지 와서 제초제를 사용한다면 전원생활의 명분을 잃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도록 잡초와 싸우는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때로는 잡초가 두려워 농가주택 가는 것이 꺼려지기도 한다. 텃밭 2백여 평 갖고 이 모양이니…. 문득 돌아가신 고향의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평생 농사꾼이셨다. 다섯 살 때 부친을 잃었다. 모친이 재가하는 바람에 큰집에 기숙하며 사촌들과 자랐다. 눈칫밥을 먹자니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어려서는 풀베기, 나무하기, 소먹이기로 큰집을 도왔다. 자라면서 모심기 밭갈이 같은 온갖 농사일로 잔뼈가 굵었다. 워낙 성실하고 농사일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다섯 딸을 가진 과부집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첫째 딸 둘째 딸을 시집보내고 겨우 차례가 와서 셋째 딸과 결혼을 했다. 처갓집 농사를 모두 지어주고 얻게 된 아내였다.

가정을 이루자 더욱 열심히 일해서 재산을 일구었다. 타고난 근력과 성실함으로 농사일에 매진했다. 품팔이 농사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남들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하천부지를 개간하여 논을 만들었고 산비탈 황무지를 개간하여 밭으로 만들었다. 산에 갈잎을 베어 나르고 집 둘레의 잡초들을 뽑아서 퇴비를 만들었다. 논밭에 퇴비를 충분히 뿌려서 논과 밭을 옥토가 되게 했다. 소와 돼지도 서너 마리씩 길렀다. 그런 노력으로 매년 농토를 늘리고 집도 근동에서 소문날 정도로 번듯하게 지었다. 그리하여 어엿한 중농의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자 자식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자식들에게만은 힘든 농사일을 시키지 않으리라. 그러자면 공부를 시키는 길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곧 혼자만 사용할 수 있는 책상을 마련해 주셨다. 공부만 해라. 일은 내가 감당 하마. 그렇게 되어 자식들은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모두 교육자가 되었다. 농사꾼을 만들지 않겠다던 아버지의 소망은 성취된 셈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삶은 어찌 되었던가? 아버지는 자식들 공부를 위해서 농토를 팔았다. 중농이라고 알려졌던 농토가 하나 둘 사라지면서 더 이상 농촌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러던 차에 하숙을 치기만 해도 농사짓는 것보다 낫다는 맏아들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집과 나머지 농토를 처분하고 도시로 이사를 했다. 도시에서 하숙을 치는 일은 아내의 몫이었다. 평생 농사꾼이던 아버지는 농토 없는 실업자로서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는 한 겨울 집에서 빈둥거리기가 싫다며 나무를 하러 가셨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양지쪽 모퉁이 길가에 나무지게를 벗어 괴어둔 채 갑자기 찾아 온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향년 53세였다. 사실 아버지의 죽음은 농토를 잃고 도시로 이사를 한 순간 이미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농사꾼이 농토를 잃고 무슨 보람으로 삶을 이어갈 것인가?

그런 아버지의 생애를 더듬으면서 수천 평의 논과 밭에서 잡초를 뽑아내던 아버지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작은 텃밭의 잡초만으로도 기진할 정도인데 아버지의 삶은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 것인가? 퇴비장에 산더미 같이 쌓아 올린 잡초더미. 그 잡초로 거름을 만들어 곡식을 가꾸시던 아버지의 삶. 자식들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것 밖에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헌신과 봉사가 전부였다. 아낌없이 주기만한 삶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삶을 생각할 때마다 송구하고 죄스럽다. 세상에 태어나서 받기만 한 삶, 효도로 갚아야 할 빚을 갚지 못한 고통이 영원히 가슴속에 쌓여 있다.

(『가슴이 따뜻한 사라들』, 2015. 10월 ) 

[들미소]

지난 주 목요일(11월 19일), 사천 김동명 문학관에서 영동수필 제12집 출판기념회를 열었습니다. 출판기념식에 이어 '좋은 수필, 읽히는 수필'을 주제로 홍성암 교수님의 특강을 들었습니다. 참 유익한 내용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허돌]

이 놈의 잡초!
홱 뽑아 던지면서 내가 잡초란 생각으로 씁쓸하데요.

[Moonlight]

홍 회장님의' 아버지의 삶'을 들으며 호방한 삶을 사신 제 아버지 대신
억척 농군이셨던 할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간직해오는 그리움도 할아버지 슬하에서 지낸 유년시절 때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