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이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더 워'가 충무로에 온갖 화제를 뿌리며 국내에 개봉된 해였다. 우선 감독부터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넘어지고 쓰러지던 슬랩스틱의 대가였던 한 코미디언이 대단한 투자금까지 유치하고 그러한 여세를 몰아 국내 관객 800만 명이라는 믿기지 않는 성공을 거두었다. 북미 개봉에도 도전하였지만 이후 언론에 묻힌 것으로 봐서 최소한 그쪽에서는 그리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모양이다. 북미 개봉 전 대다수의 평론가들과 영화인들은 이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깎아내리기에 급급했다. 그 중 대표적인 평론가가 진중권 교수였다. 기억나는 당시 진 교수의 박한 별점의 이유는 대강 이랬다. 개연성이나 인과성이 떨어지는 엉성한 플롯으로 인해 좌충우돌하는 B급 괴수영화라는 촌평으로 그 이유를 갈무리했던 것이다. 기와집과 초가로 배경을 이루던 조선 시대에 괴물의 공격은 가당키나 한 것이며 또한 잘 어울리냐는 비난, 마지막 주인공을 위기에서 건져내듯 구세주처럼 나타난 착한 이무기의 등장은 이른바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비아냥대던 것, 그리고 콘티가 엉망이라서 배우들의 연기마저 필연적으로 후졌다는 등 거의 악담 수준에 가까운 평가를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진 교수의 평가는 객관성, 형평성에서 많이 치우친 면이 많았다. 그가 말했 듯이 '더 워'가 플롯 면에서는 많이 후진 것이 사실이었지만, 영화가 플롯 하나로만 재단되는 것이 맞는가 싶다. 감독의 연출력, 배우의 연기력, 영화 음악, 의상, C.G. 등 다양한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영화를 바라보는 것이 온당한 일이다. 영화제에서 그런 다양한 요소에 상을 주는 것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그런데 진 교수의 평가에서 한국 영화사에서 충분히 언급되어야 할 영상에 대한 부분은 생략되거나 축소되었다. 플롯이 후져서 그 영화 모든 것이 후졌다고 폄론을 펼칠 자유가 있듯이 어느 하나가 대단해서 그 영화에 열광할 자유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개인 취향의 문제다. 별점의 경우는 좀 다르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영화의 어느 요소가 대단해서 가산점을 줄 수 있을지언정 그 영화 전체를 격찬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또한 다른 영화에 대한 비교 평가에 대해서는, 타영화에 대해 무응답으로 반응하거나 '디 워'에서 적용했던 평가는 온데간데없이 간략히 마무리짓고 말아버린다. '더 워'에 대한 혹평의 이유가 당시 문화평론에 식견이 있는 사람의 공명심이건, 지적 허영심이건, 그도 아니면 순수한 비평의 개인적 취향이건 그건 어디까지나 평을 하는 이의 고유 권한이다.
이쯤 되면 이미 해묵은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궁금해질 것이다. 영화 '더 워'의 부당한 평가와 오늘 새벽 펼쳐졌던 피겨 선수 김연아의 연기에 대한 채점이 오버랩되는 것은 나만의 억측은 아닐 것이다. 흠이 많은 한 영화가 다소 억울한 평가를 받았다면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펼치고도 러시아의 신성에게 정상의 자리를 내줘야만 했던 김연아 선수의 억울함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피겨는 스포츠와 예술의 그 어딘가라고도 한다. 심판의 주관적 평가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점프, 스핀 등에 계량화된 기술 점수를 부여한 것은 그런 문제점에 대한 안전장치이다. 그러나 기술점수 역시 가산점이나 나머지 구성 점수에 대한 주관적 평가로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심판의 입맛대로 장난도 가능한 것이 피겨 종목이다. 인종적 열패감으로 비춰질까봐, 피겨 변방국의 설움이나 심판진의 구성이 특정 대륙에 치우쳤다는 것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연맹이니 단체니 하는 데에서 보여준 작태에 너무 익숙해서 이젠 그런 것이 낯설지도 않다. 최소한 누군가를 평가할 때는 점수에 대한 기계적 해석보다는 평가 대상들 간의 비교도 필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피겨에 대한 전문가적인 식견이 없는 게 다소 아쉽긴 하지만 받아야 할 가산점이 한쪽으로 치우쳤다거나 또다른 한쪽은 박했다는 것은 꼼꼼히 지켜본 애호가라면 알 수 있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콩쿠르에서 그랑프리가 결정되고, 오디션 프로에서 1위가 뽑히고, 문학상에서 당선작이 나오고, 면접을 통해 학생이나 사원이 입학과 입사가 허락될지도 모른다. 부디 결정권이 있는 그대들이여, 심판들이여, 타인의 인생을 두고 자신의 주관적 취향이나 그릇된 애국심이나 기타 자기 소속 연고 따위로 심사라는 성스러운 직무를 오염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신이 당신들에게 준 것은 달콤한 권력이 아니라 억울한 누군가를 만들지 말라는 선택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만 읽기 아까운 글입니다. 진심이예요.
그러네요.. 진중권이 그렇게 떠벌일 때 가서 빅엿으로 패고 싶었는데, 오늘은 저 심판들을 패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어쩌면 당사자들이 먼저 알았을 '그들만의 격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는 그들의 클린 정신에 박수를 보냅니다. 동시대를 사는 나같은 사람은 엄두도 못낼... 이 댓글 쓰기조차 난 버거워 더 못 잇겠네요 ㅋ
다시금 좋은 글, 고맙습니다. 새삼 행복하고 엿같은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