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 <3> 김재성
“열반지향 목적에서는 공통점 발견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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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지난해 2월25일 남원 실상사에서 ‘간화선과 위빠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라는 주제로 열린 ‘제7회 선우논강’. |
본지가 마련한 ‘간화선과 위빠사나, 그 교리적 근거와 차이’라는 주제의 쟁론(爭論)에 동국대 강사 조준호씨가 기고,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법이 아니다. 시대가 다르면 옷을 달리 입듯 의장은 달라 보이지만 내연에 있어 큰 차이가 없다”(2013호. 3월9일자)고 주장했다. 반면 선상담연구원장 인경스님은 “위빠사나가 번뇌를 끊기 위한 것이라면 간화선엔 번뇌가 존재하지 않는다”(2014호. 3월16일자)며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다르다고 반박했다. 두 사람의 주장에 대해 경전연구소 김재성 소장이 새로운 내용의 글을 보내왔다.
지금 한국에 수행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다.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서양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자신의 삶의 질을 높여 진정한 의미에서 ‘잘 살기(well-being)’ 위한 현대인의 구도의 열기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조준호 박사와 인경스님의 글을 읽고, 간화선과 간단한 비교를 통해 위빠사나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실제적인 수행과 그에 대한 교리적 근거를 중심으로 정리해본다.
우리에게 소개되어 있는 위빠사나는 조준호 박사가 지적했듯이 최근 10여년 사이에 미얀마로부터 수입된 수행법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1904~1982)의 수행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인도의 고엔카지(1924~ )의 수행법도 점차 알려지고 있다.
필자는 1991년 여름 안거를 미얀마의 판디타라마라는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보낸 이후, 마하시 방식의 위빠사나를 수행하고 있으며, 초기불전 및 부파불교의 논서를 연구하고 있는 입장에서 마하시 방식의 위빠사나를 중심으로 위빠사나의 교리적 근거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마하시 방식이든 고엔카 방식이든 위빠사나 수행의 교리적인 근거는 초기경전 가운데 〈대념처경〉(長部 22경)에서 제시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위빠사나 수행은 자신의 몸과 마음의 현상, 자세하게는 몸(身), 느낌(受), 마음(心), 여러 가지 현상(法)을 일어나고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에 마음챙겨서(be mindful), 알아차리고(be aware) 관찰하는(observe) 것이다. 경험되는 모든 현상의 생멸을 마음 챙겨서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수행법이 위빠사나 수행법이다. 이는 이론적인 이해(聞慧)나 사유해서 얻는 이해(思慧)가 아니라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서 얻는 이해(修慧)이다.
- 순간적 마음집중에 의해서도 위빠사나 가능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챙김(sati 또는 satipatthana) 수행이라고도 한다. 마음챙김을 바탕으로 해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위빠사나에 의해 얻어지는 지혜는 물질적 또는 육체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의 진정한 본질인 끊임없이 변하고(無常), 안정되어 있지 않으며(苦),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無我)는 진리에 대한 체험적인 이해이다.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괴로움의 원인인 탐진치 근본 번뇌를 지혜로 끊어버려,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한 열반을 이루는 것, 즉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는 데 있다. 이는 초기불교와 그 해석으로 전개된 부파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접하는 위빠사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한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준호 박사가 말하는 높은 단계의 선정(第四禪)이 있어야만 위빠사나 수행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법의 한 방법이라는 점이다. 위빠사나 수행(慧)은 선정 수행(定)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다시 말하면, 마음 집중(定)이 없으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이해하는 지혜(慧)는 생기지 않지만, 그 선정이 반드시 사선(四禪)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서 확인할 수 있는 수행법이다.
조준호 선생이 말하는 사선을 바탕으로 한 위빠사나에 대한 주장은 일부 초기경전을 이론적으로만 파악한 결과이며, 오히려 풍부한 위빠사나 수행의 길을 협소하게 만들어버리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전자는 대승불교… 후자는 초기불교 전통이 바탕
방편은 서로 조금씩 달라도 궁극적 목적지는 같아
마하시 수행법에서는 순간적으로 관찰대상에 마음이 집중된 상태(刹那定)에서도 마음의 다섯 가지 번뇌(五蓋; 욕망, 분노, 혼침, 들뜸, 의심)가 일시적으로 가라앉을 수 있기 때문에 깊은 단계의 선정을 이룰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런 주장은 마하시 스님의 주장이 아니라 상좌불교의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에 나타나는 전통적인 입장이며, 이는 북방의 설일체유부에서도 공통된 입장으로 확인된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초선정에 이르지 못한 선정(未至定)에서 수타원의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을 〈대비파사론〉의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다.
특히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사리불 존자와 목련 존자의 예를 들어 이 분들이 마승(馬勝, 부처님의 초전법륜의 대상이 된 다섯 비구 가운데 한 분)의 간단한 게송만을 듣고 미지정에 의지해서 법의 눈이 열려 수타원의 깨달음(正性離生)을 이룰 수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대정장 27권, 485하21행 이하).
따라서 초기불교의 사상을 보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부파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은 초선의 포함하는 사선을 미리 닦지 않아도 대상에 순간적으로 마음을 집중할 때 깨달음의 체험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 미얀마의 위빠사나 수행은 이런 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 간화선.위빠사나 유사한 측면 있어
실제로 많은 이들이 위빠사나 수행을 찾는 데에는 그 수행을 통해서 효과를 보기 때문이다. 짧게는 7일에서 길게는 3달 혹은 1~2년을 수행하면서 얻어지는 마음의 안정과 지혜를 경험하고 실생활에서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수행은 인경 스님이 말씀하시듯이 전통적인 용어로 교(敎)라고 하기에는(불교신문, 2014호, 2004년 3월 16일, 5면)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교(敎)라는 용어는 실천 수행의 전단계로 일차적으로 교리에 대한 이해를 말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해하는 위빠사나는 이론적인 교(敎)라기 보다는 수행에 의해 얻어지는 지혜(智慧)이다. 즉, 모든 현상(諸行)이 무상과 고이며 무아임을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알고 보는 지혜이다. 이와 대비시켜 말하면 간화선은 일차적으로 화두라고 하는 의심을 일으키는 ‘언어적 개념’에 집중하는 ‘선(禪)’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위빠사나와 간화선은 지혜와 선정으로 대비시켜 보는 것이 위빠사나와 간화선을 이해하는 데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간화선이 단지 화두에 집중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화두를 들고, 성성(惺惺)히 깨어있는 마음은 바로 지혜가 드러나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혜는 깨어있는 마음을 회광반조하는 지혜로 이해할 수 있다면, 간화선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수행의 측면이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위빠사나에서 말하는 마음에 대한 관찰(心隨觀, 또는 心念處)라고 할 수 있다.
간화선은 인도의 위빠사나 수행에서 마음에 대한 집중과 관찰을 부각시킨 수행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이해는 간화선과 여러 전통의 위빠사나 수행 그리고 초기불교 등의 교학에도 밝으신 홍원사(서울 대방동)의 성오스님께서 해주신 말씀이며, 필자도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성오스님은 미얀마의 쉐우민 사야도의 말씀, ‘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위빠사나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간화선이 마음을 보는 위빠사나 수행법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하셨다.
부처님이 지도하신 수행법은 제자들의 근기에 따라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중간 길이의 가르침〉(中部) 경전의 32경 ‘고싱가대경’을 보면, 부처님의 큰 제자들이 각자 이상적인 수행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자신들의 입장에서 한 마디씩 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리불, 목련, 아누롯다, 레와타, 마하가섭, 아난 존자가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수행자상을 말하는데 모두 자신들이 걸어온 수행의 길을 근거로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며, 마지막으로 부처님이 모두의 이야기를 인정해주고 부처님이 생각하시는 이상적인 수행자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경전이 주는 중요한 교훈은 수행의 방법은 다양하며, 그 모든 방법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는 점에 있다. 위빠사나가 초기불교와 상좌불교의 전통 안에서 열반을 추구하는 수행법이라면, 간화선은 대승불교의 바탕 위에서 중국에서 피어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목적으로 한 수행법이다.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두 수행법을 통해 우리는 불교의 정수를 접 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길은 다양하다. 그 길은 탐.진.치에서 벗어나는 열반의 경지라는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한다면, 문제는 우리 각자에게 가장 적절한 길이 무엇인가에 있지 않을까.
김재성/ 경전연구소장
[출처 : 불교신문 제2016호/ 3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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