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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2 .19(일) |
대구대교구에 속한 우리 경주지역에는 2곳의 성지가 있다. 하나는 진목정 성지이며 다른 하나는 경주관아와 감옥 터이다. 전국성지 순례 이전에 지역 성지를 먼저 돌아보는 것이 순서다. 경주관아 및 감옥 터는 우리 성당과 가까운 아파트 단지 안에 있어 늘 접하는 곳이어서 우선 진목정 성지를 순례하기로 한다. 그리고 경주관아 및 감옥 터는 자료만을 정리하여 뒤에 덧붙인다.
■ 진목정 성지 - 우리 지역 최초로 받아들인 신앙의 요람 |
2023. 2.19. 교중미사 후 진목정 성지를 향했다.
3월부터 본격 실시하기로 한 전국성지 순례의 서막이다. 물론 진목정 성지는 새로운 곳은 아니다. 한때는 우리 본당 소속이라 여러 번 가본 곳이고, 성지 조성 초기에 노력봉사에도 참여한 곳이다. 먼 곳을 다니러 갈 때 부모님께 먼저 아뢰듯, 전국성지 순례에 앞서 진목정에 모셔진 순교복자 세 분께 인사라도 드릴 양으로 출발했다. 잔뜩 흐린 날씨다. 하지만 일기예보에는 비가 온다고 하여 마음이 많이 쓰였는데 걱정에 비해서는 이 정도면 다행스러운 편이다. 일행은 6명. 이영식 에릭, 장영진 라파엘, 문국진 베드로, 도영철 미카엘, 김해열 바오로, 그리고 나 김연호 요한. 모두 본당 액션단체인 바오로회 회원들이다. 2대의 승용차로 분승하여 출발했다. 산빛은 아직은 회색이나 성급한 생각에서인지 나무 잔가지가 노르께한 색감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한산한 길을 달려 산내면 소재지 의곡리에 이르렀다. 의곡리는 옛날 역촌이었을 만큼 교통의 요지다. 여기서 바로 가면 청도군 운문면으로 가고 왼쪽을 꺾으면 울산 언양으로 가는 길이다. 일단 면소재지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기에 의곡리 중심가에 들렀다. 사람들이 꾀 붐비기에 장날인가 했더니 일행 중 누군가 산내장은 2일, 7일이라고 한다. 노전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오늘은 오일장이 아니라 주말장이란다. 그렇구나. 주말에는 이처럼 수요, 공급에 의해 자연 발생적으로 장이 서는 것이다. 길가 ‘현일식당’이라는 상호가 붙은 식당에 들어가서 잡어 매운탕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웠다. 식당에는 점심시간이라서 손님이 꾀 많다.
식사를 하고나니 벌써 2시. 다시 출발했다.
언양 방향으로 약 4km를 달리니 갈림길에 진목정 성지 안내 표지판이 서있다. 여기서 좌회전을 하면 소태교라는 다리가 있고 다리를 건너 우회전을 한 후 OK그린목장 쪽으로 700m정도 가면 오늘의 목적지 진목정이 나온다.
진목정(眞木亭)
진목정(眞木亭)은 단석산 줄기인 도매산 중턱 해발 350m 고지대에 위치한 오지 마을이다. ‘진목(眞木)’은 한자 뜻 그대로 ‘참나무’를 말한다. ‘정(亭)’이란 ‘정자’라는 뜻도 있고 그리고 ‘정자나무’라는 뜻도 있다. 정자나무는 ‘큰 나무’라는 뜻이다. 또 하나, ‘정(亭)’에는 ‘역참(驛站)이 있는 작은 마을’이라는 뜻도 있다. 실제 이곳과 가까운 의곡리는 옛날에는 역참마을이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자료에는 ‘정자’라는 뜻을 취해 ‘참나무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고 그 유래를 밝히고 있다. 토속 이름은 ‘참나무징이’라고 불렀으며 표기로는 ‘참나무뎡이’라고 썼다. 근대화 이후 행정구역을 한자명화 할 때 ‘진목정(眞木亭)’이란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진목정에 교우촌이 형성된 시기는 아무래도 1830년대로 추정된다. 신유박해가 일어난 1801년 직후 기호지방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영남알프스의 험한 산중인 오늘날 울주군 상북면 살티, 죽령(대재), 두서면 상선필, 언양면 간월리 등지에 모여 신앙촌을 이루어 신앙을 지켰다. 그러나 박해가 점점 심해져 그곳들도 안전하지 못하자 다시 인근 재를 넘어 경주 산내면 진목정, 우중골, 소태골 등지에 유입되지 않았나 한다..
진목정의 순교자 - 순교봉 위에 핀 세 송이 꽃
진목정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신자들은 무수히 많지만 기록에 확실하게 남은 대표적인 순교자는 병인박해 시에 순교한 허인백 (許仁伯, 야고보), 김종륜 (金宗倫, 루카), 이양등 (李陽登, 베드로)이다.
허인백 (許仁伯, 야고보 1822-1868)
김해의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언양에 이주하여 살았으며 24세 때 입교하여 아내 박조이(朴召吏)와 서로 권면하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여 교우들에게 많은 신임을 받았다. 1860년 경신박해 시에도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으며 병인박해 시 울산 대재공소(울산 살티라는 설도 있음)에서 만난 이양등(베드로)와 김종륜(루카)와 함께 경주 산내지역으로 이주하여 약 2년간 숨어 지내다가 경주관헌에게 체포되어 1968년 울산병영 장대벌에서 순교하였다.
김종륜(金宗倫 루카 1819-1868)
충청도 공주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천주교에 입교한 다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평소에 이웃들과의 화목을 중시하였고, 교양과 학식이 풍부했으며 동정부부 순교자인 이순이 루갈다의 옥중수기를 직접 필사하여 갖고 다녔다고도 한한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부모님을 모시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언양 간월리를 거쳐 대재공소에 와서 허인백, 이양등과 만나 이들과 함께 같은 때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였다.
이양등(李陽登 베드로 ? -1868)
서울 태생으로 박해를 피해 울산의 대재공소(죽림굴)로 내려왔다. 본디 성품이 선량했다고 한다. 꿀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였으며 대재공소 회장을 지냈다. 이곳에서 만난 허인백, 김종륜 가족과 함께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들과 같이 체포되어 울산 장대벌에서 순교하였다.
이 세분 순교자들은 진목정 부근 소태골 범굴에서 가족과 함께 목기를 만들어 팔며 피신생활을 이어가다가 끝내 경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 관아에서 문초를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굳게 지켰다. 결국 경상좌병사가 있는 울산 병영으로 호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장대벌에서 순교하였다. 이들은 2014년 8월16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영광의 복자품에 오르게 되었다.
이곳 진목정 성지에 오늘 찾아볼 곳은, 진목정 순교자기념성당, 순교자 묘소, 진목공소이며 또 한 곳, 세 분 순교자 가족이 숨어 지냈던 범굴이다. 제일 먼저 맞이해 주는 곳은 순교자 기념성당.
진목정 순교자 기념성당 -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2011년 대구대교구는 교구설정 100주년을 맞아 ‘진목정 성지개발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성지 개발에 착수하였다. 2014년 3월 세분 순교자를 현양하기 위해 순교자 묘소가 있는 이곳에 순교자 기념성당을 착공하여 2017년에 준공했다.
성당건물은 철근콘크리트조로 지하 1층, 지상 2층 총면적 350여 평 규모인데, 특히 성당 앞부분을 성전으로 꾸미고, 뒷부분은 순교자들의 유해와 함께 신자들의 유골을 안치하는 봉안당(납골묘)인 하늘원을 조성했다. 산 자들과 선종한 이들이 공존하는 공간으로서, 순교자 현양과 함께 죽음의 의미를 묵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하에는 성지 사무실과 순례를 오거나 하늘원을 방문할 때 쉴 수 있도록 한 휴게공간과 성묘 오신 분들이 가족들과 함께 위령기도를 할 수 있도록 연도실이 갖추어져 있다.
언덕 도로변에 주차를 해놓고 성당 입구에 이르니 진목정 성지 표지석이 우뚝 서있고 그 아래에 성당이 내려다보인다. 오늘이 공휴일이라 몇 팀 단체 순례객들이 앞서 와서 한창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성당 외관은 붉은 벽돌 건물로, 지붕와 몸체가 모두 8각형인데 이는 산상수훈에 나오는 진복팔단(眞福八端)의 의미라고 한다.
진목정 성지 표지석
순교자 기념성당 (우리 일행이 아닙니다)
진복팔단이라고 하니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갔을 때 본 바 있는 산상수훈 기념성당(일명 진복팔단 교회)과 무척 닮았다는 생각났다. 산상수훈 기념성당은 1937년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세운 성당으로, 아름다운 갈릴래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 있었다. 벽면이 팔각형이고 성당 내부에는 8각형에 따라 각각의 창문에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 때 가르치신 참된 행복 여덟 가지가 하나씩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팔각형 지붕 위의 둥근 돔은 이곳 순교자 기념성당과 매우 닮았다.
이스라엘 진복팔단 교회
기념성당 정면 오른쪽에는 성모님 단독상이 아닌, 예수님 성가족상이 흰색으로 서 있다. 어머니 성모님, 아버지 요셉과 어린 예수 상이 여느 가정의 가족상처럼 친밀감과 순결성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어린 예수님은 인류 구원의 큰 사명감을 가진 위인(偉人)이 아니라 철없고 순진한 어린이가 가족과 함께 미사에 나왔다가 성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것 같다.
성전 내부는 2층을 하나의 공간으로 시원스럽게 트여 놓았는데 돔 천정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따로 조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밝다.
팔각 벽마다 3개 한 쌍씩 아름다운 스테인글라스가 배치되었는데 자세히 보니 세 분 순교복자의 순교행적을 스토리화한 것이다.
허인백 야고보 순교 장면 이양등 베드로의 꿀장사 행상
위쪽 허 야고보 옆에는 옥졸이 칼을 짚고 서 있고 “우리의 머리는 분별하여 주시오. 이후 부활할 육신이오”라는 당부의 말이 새겨져 있고, 아래쪽 이 베드로는 꿀병을 지게에 얹어 지고 팔러 다니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늘원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하늘원은 성당 뒤편에 붙었는데 입구는 성당 정문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든 곳에 있다.
하늘원 내부에 들어가니 예수님을 안은 성모님이 반겨주고 계신다. 벽면은 언뜻 보면, 베이지색 직사각형 격자무늬의 벽지를 발라놓은 것과 같은데 자세히 보니 그 자체가 하나하나 대리석 봉안함이었다. 봉안함 마다 십자가와 함께 그 밑에 희고 작은 글씨로 봉안자의 성명, 세례명, 출생과 선종 날짜만 간결하게 새겨져 있다.
입구의 성모님과 예수님
하늘원 내부의 들어찬 봉안함들
봉분 분묘에 비하면 참으로 단촐한 유택(幽宅)이다. 그리고 참으로 죽음이 평등하다. 살았을 때 부자였거나, 가난한 이였거나, 강한 자였거나 약한 자였거나 구별 없이 똑 같이 사각형 방 하나만 달랑 차지할 뿐이다. 하기야 이 시설에도 위치에 따라 값이 다르다고 하니 평등하지 않은 면이 있기는 하다.
옛글에 “석 자 무덤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백 년 동안 몸 하나 보존하기 어렵고, 석 자 무덤 속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백 년 동안 무덤 하나 보존하기 어렵다.(未歸三尺土 難保百年身 已歸三尺土 難保百年墳)” 라고 했는데, 하기야 무슨 ‘백 년’이 보장될까? 계약대로라면 20-30년 후면 이 공간도 비워주어야 할 것을.... 문득 “내가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릴 것이다.”라고 기록된 예수님 말씀을 상기한다.
그때 뒤 따라오던 우리 일행 중 누군가 “황 라파엘이다.”라고 일러준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 살펴보니 〈황윤복 라파엘 1952.5.13.-1915.2.21.〉이라고 적힌 봉안함이 있다.
황라파엘이 잠든 곳
그렇구나, 형제여! 어느 해, 벚꽃잎이 떨어져 날리는 날 당신을 떠나보낸 지가 벌써 일곱 해가 지났구나. 정말 ‘개관사정(蓋棺事定)‘이란 말과 같이 사람은 죽은 다음에야 올바른 평가를 내리는 것일까? 항상 웃는 얼굴로 주위 사람을 즐겁게 해주었던 그리운 형제여, 그해 부활절 윷놀이 때 기막힌 춤사위로 흥을 돋구었던 형제여,
화장장 ‘하늘마루’까지 따라갔던 날 애통한 나머지 ‘꽃의 축제 속에 떠난 형제여’라는 추도사를 주보에 올린 기억이 새롭구나. 마지막 구절은 이랬지.
오늘은 너, 내일은 나, 시기가 다를 뿐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떠납니다. 세상에 슬프지 않은 이별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우리는 더 큰 만남을 예비해야 하는 신앙인이 아닙니까? 비록 당신은 떠났지만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길이 남아 해마다 꽃피는 4월이면 꽃의 축제 속에서 당신을 기억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부디 평안히 가소서.
해마다 기억하리란 약속을 지키지 못해 참 죄송한 마음이다. 그런데 당시 선종시기는 추도사 내용대로 분명히 4월인데 봉안함에는 2월 21일이라고 된 것은 아마도 음력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성전의 앞과 뒤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생과 사가 공존하는구나! 이렇게 삶과 죽음은 항상 우리 곁 한 발짝 안에 가까이 있다. 그러한데도 우리는 삶과 죽음을 얼마나 멀게 여기고 있는가? 순교자 묘소로 이동하기 전에 우리 일행도 기념촬영을 했다.
동행한 단원들
이제 발걸음을 옮겨 ‘순교자 묘지’로 향했다. 성당 건물 옆 언덕 쪽에 난 산책로변에 순교현양비가 우뚝 솟아있는데 그 밑으로 돌계단을 약 100m 정도 내려온 곳에 묘소가 하나 나타난다.
순교자 묘지 - 한 지붕 세 가족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세 분 순교자는 경주관아에서 문초를 받으면서도 끝내 배교하지 않자 경주관아에서는 경상좌도 병영이 있는 울산 병영으로 넘겼다. 고난의 80리 길을 끌려가서 다시 모진 국문을 받은 후 끝내 1868년 9월 14일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받았다, 군문효수형이란 죄인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대에 매달아 걸어 두는 형벌이다.
죽은 후 버려진 이 들의 시신은 허인백 야고보의 아내인 박조이(朴召史, 조이는 ‘소사’라고도 하며 미망인이라는 뜻)에 의해 사형장 근처 동천강변에 가매장했다가 뒷날 진목정 신자들의 도움으로 진목정 공소 뒷산인 도매산 기슭인 이곳 모셔진 것이다.
그후 1932년 5월 29일 대구대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허가를 얻어 후손 허 야고보의 손자 허명선과 김 루카의 손자 김병옥에 의해 대구 감천리 천주교 묘지로 이장됐다. 감천리 묘지 안에서도 1962년 10월, 순교자 기념비가 건립됨에 따라 순교자들의 유해를 성모상 앞으로 옮기기도 했다. 이후 병인박해 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인 대구 신천동 복자성당이 완공됨에 1973년 10월 복자성당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 진목정에는 세 분 순교자의 묘는 유해가 옮겨간 가묘(假墓)이다. 봉분이 하나뿐인 합장묘인데 비록 한 지붕 세 가족의 가묘라 하더라도 너무나 초라하다고 할 정도로 소박한 모습이다. 초가삼간이 아니라 초가단간이다. 어쩌면 이것이 당시의 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오히려 좋은 것 같다. 고대광실과 같이 호화로운 무덤은 가난했던 세 분 순교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함께 한국 순교자에게 바치는 기도문을 합송한 후 진목공소로 떠났다.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렸나이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
묘지에서 샛길로 아래를 향해 300-400m정도 내려오면 진목공소다.
진목공소 - "성건성당에 안부 전해주이소"
진목정 교우촌은 신유박해 이후 형성된 울산 지역의 상북, 언양, 두서 등 영남알프스 산간지역 일대에 형성된 여러 교우촌에서 더 안전한 곳을 찾아 흘려든 교우촌 중의 하나이다. 시기는 대체로 1839년 기해박해 후로 추정된다.
1850년대에 ‘피의 순교자’라고 일컫는 김대건 신부와 대비되어 ‘땀의 순교자’로 일컫는 최양업 신부는 전국 순회선교를 했는데 그 8곳의 교우촌 중의 하나가 진목공소였다. 기록에 의하면 최양업 신부는 경산현 모개골에서 어의현(於義峴)을 지나 언양의 간월공소로 가는 길을 따라 이곳을 방문하여 선교했다고 한다.
최양업 신부 선종 이후 1862년 10월 제5대 조선교구장인 다블뤼(안돈이)주교가 방문하여 사목지도를 하면서 20일을 머물렀다는 기록이 그의 비망기에 적혀있다.
병인박해 후 1880년대에는 나중 제8대조선 교구장이 된 뮈텔 주교의 순방도 이어졌으며 프랑스 선교사 두세(Doucet) 신부가 이 부근 상선필 공소와 이 공소에서 성사를 주었고, '영남지역의 사도'라 불리우는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이곳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었다. 1890년 영남지역 사제협의회에 의하여 진목공소는 부산교구 관할이 된다. 1926년 경주성당이 설립되자 경주성당 소속으로 바뀌었으며 1983년, 성건성당이 건립됨과 동시에 성건성당으로 소속되었다. 이후에 건천성당을 거쳐 현재는 산내성당 소속이다.
이처럼 진목공소는 경주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신자촌이었으며 경주지역 성당의 모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소 건물은 기와를 올린 나지막한 담장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조그만 슬레이트 기와 지붕의 삼간 집이다. 이 건물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00년은 좋이 되어 보인다. 문은 누구나 들어오란 듯 열려 있다.
건물 안에 들어가니 정면 벽 중앙에 십자가 고상이 걸렸고 그 좌우로 예수님 상과 성모님 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앞에 제대가 있는데 다른 시설이나 도구에 비해 사뭇 장중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제대가 벽에 붙어 있다. 이는 미사나 공소예절을 드릴 때 전례 집전자나 교우들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제대를 향했음을 말해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있었던 1960년대 이전에는 다들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이 공소 제단 배치는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양쪽 문 위 벽에 나무에 새긴 목각 14처가 있어 성전으로서 있을 것은 모두 갖추었다. 전면에 공지용 칠판, TV모니터와 전기난로, 그리고 바닥에는 양탄자가 깔려있다. 이로 미루어 현재도 이 공소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진목공소 내부
벽면 성상 액자와 목각 십사처
다시 밖에 나와 공소 건물 뒤켠으로 돌아드니 집 뒤에는 높은 벽돌 벽을 배경삼아 가운데 성모님이 모셔져 있고 좌우 벽에는 시골공소와는 어울리지 않게 Sancta Maria Ora Pro Nobis (성모 마리아님,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구절이 라틴어로 둘로 나누어져 붙어 있다.
성모 마리아님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나오는 길에 집 뒤에 있는 대밭과 계곡의 수려한 경치에 끌려 조금 덜어 걸어 들어가니 그 대밭 길 입구에 순교자기념 성당으로 가는 길이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그리고 앞쪽에 산 중턱에 이런 계곡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하는 엄청 큰 바위 돌로 이루어진 계곡이 있었다.
성당으로 통하는 대숲길 입구
풍치 좋은 계곡, 멀리 성당지붕이 조그맣게 보인다
다시 차를 타러 공소 앞을 지나는데 허리 굽은 교우 할머니 한 분과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토착민 신자라고 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길래 경주 성건성당에서 왔다고 하니 매우 반가워하면서 산내성당이 생기기 전에 연중 몇 번씩 성건성당에 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 당시는 부활이나 성탄 대축일에는 공소 신자들이 많아 와서 함께 축일 미사를 드렸었다.
건강하시라고 인사하고 떠나려는데 할머니는 성건성당 분들게 안부 전해달라고 하신다. 별생각 없이 듣고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막상 돌아서니 성건성당 누구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지 웃음이 났다. 아무려면 어떠랴? 옛날 성건성당을 방문했을 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친근감의 표시라고 하신 말씀이라 생각하며 흐뭇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제 진목정 성지에서 마지막 일정인 범굴로 향했다. 진목공소를 떠나 도로 소태교까지 내려와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OK목장 쪽을 약 2km 차를 타고 가니 터를 닦는 중에 있는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범굴로 오른다는 안내문과 함께 성모님께서 맞이해 주신다.
범굴 - “오늘에야 세상일을 마쳤구나!”
범굴 시작되는 곳에서 맞아주시는 성모님
진곡공소가 성건성당 소속이었을 때 바오로회에서 회원들과 자매님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길도 정비하고 터도 닦는 등 활동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동안 와 보지 않았더니 오히려 낯이 설다. 당시에는 조립식 건물이 있었는데 이제 허물어 버려지고 새로운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정비가 되지 않다보니 흐린 날씨에 더욱 쓸쓸한 느낌이 든다.
이미 앞서 이야기했듯,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세 분 순교자가 울산 지역에서 위기를 느껴 안전한 곳을 찾아 가족들을 데리고 온 곳이 이곳이었다. 그들은 이 산 중턱 동굴을 발견하고 여기서 살리라고 마음먹었다. 실제 호랑이 굴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호랑이가 나타나 으르렁 대었다. 허 야고보가 나서서 호랑이에게 절박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다른 곳을 찾아 떠날 때까지만 있겠다고 하니 호랑이가 물러갔다는 말이 전한다. 더 나아가 물러난 호랑이가 맞은편 산 바위 위에 울어주어서 다른 맹수들이 이 곳을 침범하지 못했다는 말도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통했던 것일까?
세 가족은 함께 이 굴에 지내면서 남자들은 목기를 만들고 여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다니며 팔거나 더러는 행상이나 동냥을 하여 가족을 먹였다고 한다. 하지만 세 분 순교자의 피신생활은 여기서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당시 남연군 도굴 사건에 분노한 대원군 치하에서 일어난 병인박해의 여파는 이곳 순교자들을 피해가지 않았다. 결국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경주 관아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순교자들은 오히려 가다렸다는 듯이 “오늘에야 세상일을 마쳤구나,” 하면서 더 이상 고난의 세상살이를 포기하고 하느님의 나라로 가기 위한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는 순순히 오라를 받았다.
성모님께 간단히 인사를 드리고 표지판 따라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관리가 되지 않아 길이 험하다는 사전 정보를 실감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 길이 매우 험하다. 아니 험한 것은 차치하고 아예 길이 없다. 계곡물에 휩쓸려 길이 떨어져 나가버렸으니 계곡 자체가 길인 셈이었다. 걸음을 옮기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계곡 따라 오르는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일이 나고 말았다. 뒤 따르던 에릭 형제가 돌 틈 사이 낙엽을 헛디디어 다쳤다고 뒤에서 연락이 왔다. 바위에 머리를 약간 부딪쳤는데 그리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으나 머리 부분이라서 혹시나 하여 오르기를 중단 하고 바오로, 미카엘 형제와 함께 병원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셋은 계속 오르기로 했다.
파인 계곡을 벗어나자마자 ‘십자가의 길’ 안내판이 나오고 이어서 제1처가 나온다. 한 때는 이 길 따라 순례객들이 예수님 수난을 묵상하며 많이 오르내렸을 것이다. 순탄한 당시의 길보다 지금의 험한 길이 어쩌면 ‘십자가의 길’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험한 골짜기를 지나니 그런대로 길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 오르기가 쉬웠다
약 20-30m를 간격으로, 그래도 그 자리를 지킨 14처가 나온다.
약 20여분을 오르자 드디어 안내 표지판과 함께 동굴이 나타났다. 하지만 입구가 무너져 내린데다가 낙엽이 덮여서 동굴의 형태는 찾을 수 없다. 안내판으로 보고 이곳이 범굴이라고 여길 뿐이다. 아마 숨을 몰아쉬고 올라온 순례객 누구라도 황당함을 느낄 것이다. 6 25 당시 이 굴은 공비들이 자주 숨어들기에 폭파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무너져 내렸든 폭파되었든 간에 겉으로 보아서는 이곳에 세 가족이 살았다는 공간이 있었을 것 같지가 않다.
대체로 그렇듯 기록에만 남고 유물이 뒷받침하지 못하는 유적은 오로지 지역민들의 구전으로만 전승될 뿐이다. 1980년대 초반 진목공소가 성건본당 관할이었을 당시에 마을 주민의 전언을 근거로 굴을 탐사하고 길을 내고 토지를 매입하여 교구로부터 승인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 교회사 연구자는 이곳 범굴과 울산 죽영리(대재마을)에 있는 동굴을 동처이칭(同處異稱)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원형을 잃은 범굴
하지만 그나마 순교자들의 행적을 찾아내려는 지역 본당과 교구 관계자, 교회사 연구자 그리고 주민신자, 순교자 후손, 땅 소유주가 한마음이 되어서 신앙유적지로 조성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이제 하루 빨리 무너져버린 굴을 복원하고 길을 닦아 누구든지 쉽게 순례할 수 있는 성지로 거듭날 수 있을 때를 기대해 본다.
여기서 한 가지 교구나 관리본당의 담당자나 관계자에게 건의하고 싶은 것은, 동굴 복원이나 탐방로가 정비되기까지는 방문을 통제하거나 최소한 홍보매체나 안내문을 통해 오르는데 위험이 따른다는 경고를 할 필요가 있다. 그냥 성지자료를 보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다. 쉽게 오르려다가는 오늘 우리처럼 다치는 경우도 있고 설령 찾는다 해도 실망을 하게 마련이다.
범굴을 마지막으로 진목정 성지 순례를 끝내고 다시 소태교를 건너서 귀로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면소재지 의곡리에 있는 산내성당에 들르기로 했다. 산내성당과 개신교 교회는 바로 이웃해 있는데 멀리서 보이는 십자가 첨탑만으로는 성당과 개신교 교회가 하나의 공간인 듯했다.
산내성당 - 지역 신앙의 선도자
의곡리는 신라 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온 전통 있는 마을로, 조선 중기 때 월성이씨가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에는 세 갈래 교통의 요충지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병인박해 전후부터 신자들이 의곡공소를 중심으로 교우촌을 형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의하면 1893년 11월 6일에 처음으로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이곳 의곡공소를 사목 방문하였다고 한다.
의곡공소 이외에도 산내면에는 진목공소, 와항공소, 범곡공소가 있었는데 신자수도 줄고 각각 따로 유지하기가 어려워 네 공소를 통합하여 이곳 의곡공소 자리에 통합 건물은 짓고 산내공소라고 했다. 1999년 7월이었다.
그후 2008년 9월 산내성당으로 승격되었고 새 성전은 2009년 9월에 착공하여 2010년 10월에 축성되었다.
부지 총면적은 670평, 전용 면적은 약 250평, 피라밋 지붕 같은 성당 건물은 지상 1층 철골조로 건평은 약 40평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성전을 가운데 두고 왼쪽 편에 ‘산내 어린이 집’이라는 별도의 건물이 있고 오른편에는 지상 2층 규모의 생활관이 있다.
성전 왼쪽에는 돌담 배경으로 성모님이 다소곳이 서 계신다. 성전 정문 오른쪽에는 ‘모든 것은 지나간다. 남는 것은 하느님 말씀뿐’이라는 구절을 새긴 머릿돌이 서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성전 내부는 작지만 아담하고 단촐하여 자리에 앉아 기도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정면 제단 위의 고상과 벽면의 예수님이 아주 독특하다. 십자고상은 검고 바짝 마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먹을 것을 제대로 못 먹은 가난한 아프리카인을 연상시키며 벽화상 역시 눈이 휑한 이국적인 모습인데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 같지는 않다. 스테인글라스도 참 아름답고 14처의 상들은 작달막하지만 한결 고뇌에 찬 진지한 모습들이다.
제단 위 고상과 벽화
아름다운 스테인글라스와 십사처
성전을 나오면서 향하는 마지막 시선은 출입문 안쪽 위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 장면이다. 커다란 포도주 잔과 두 개의 빵이 놓인 쟁반, 끼리끼리 대화를 나누면서 시선은 각각이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제자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다. 오직 도둑이 제발이 저린 유다만이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을 뿐이다.
최후의 만찬
이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신앙 자세를 말해주는 것 같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지 못해 야단을 맞으면서도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는 우리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마무리
본격적인 전국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 예행연습 삼아 지역성지인 진목정을 순례했다. 하지만 예행연습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 어떤 성지치고 연습 삼아 가는 곳은 없다. 단지 실제 순례를 한 번 경험해 봄으로 앞으로 순례의 일정을 관리하고 계획하는데 참고를 삼는다는 의미다.
오늘 일정을 마치면서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손 안에 있는 보물을 보물로 여기지 않고 멀리 있는 것을 넘보듯, 가까운 곳에 성지를 두고도 멀리서 찾으려고만 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데서부터 먼 것으로’ 이것이 진리에 가까운 말이다.
어떤 일을 하든 돌발변수가 있다. 항상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오늘 산길에서 겪은 사고도 잘만 활용하면 병이 아니라 약이 된다는 생각이다. 장기간 순례를 하는 도중에 어떤 일이 발생할 지도 모른다. 오늘 사고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전에 철저한 대비를 하라는 하느님의 경고다. 그 경고를 에릭 형제를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성당에서 병원에 갔던 일행과 다시 만났다. 에릭 형제가 목보호대를 하고 있어 많이 다친 것이 아닌가 일견 놀랐지만 여러 가지 검사를 했는데 별 이상이 없었단다.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다.
이제 내일이면 다시 삶의 현장으로 복귀한다. 오늘 우리가 접한 세 분 순교자는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위해 목숨을 가볍게 여기면서 신앙을 증거한 분들이다. 문제는 우리가 오늘의 순교성지에서 느낀 선조들의 치열한 삶을 각자의 삶의 위치에서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이는 며칠 후로 다가오는 사순절을 맞이하는 화두도 된다.
협조해 준 단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다음부터는 더 알찬 준비를 하고 계획하여 목적하는 바를 이루는 성지순례가 되도록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김요한)
■ 경주관아 및 감옥터 |
경주관아
경주관아는 경주부 행정의 중추기관으로 경주읍성의 중심부에 있다. 경주부는 전주부, 영흥부, 평양부, 의주부와 함께 부윤(府尹)이 다스리는데 종2품 부윤은 지금 도지사급의 관찰사와 품계가 같다.
경주읍성은 고려 현종 때인 1012년 토성으로 축조했으나 조선 시대에 와서 석축으로 개축하였다. 둘레는 2.3km. 조선시대 경주읍성 안에는 조선 전기에 지어진 관아를 비롯하여 다양한 기관이 밀집돼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인조 10년(1632) 사대문과 함께 다시 지었다. 읍성 안의 여러 기관은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이 되어 수령의 통치를 뒷받침 하였다. 1789년(정조22)에 제작된 ‘경주읍내전도’를 통해 이들 기관의 명칭과 위치를 잘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들어오면서 도시정비를 한다면서 동쪽 성벽 50-70m 미터 정도만 남기고 대부분이 헐렸지만 이후 300억 원을 들여 복원공사를 하여(2011-2018) 동문인 향일문(向日門)과 성벽 약 320m를 1차 복원을 했다. 이후 2030년까지 동벽 나머지 30m와 북벽 600m와 북문루인 공신문(拱辰門)까지 완료할 계획이다.
경주읍성모형도 (노란색은 감옥터, 파란색은 문화원인 경주관아)
경주관아와 천주교 박해
경주 관아는 조선말기 천주교 박해시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사학죄인으로 몰려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던 곳이다. 대표적인 박해는 다음과 같다.
△을해박해(1815, 순조15년)
경상도관찰사 이존수(李存秀)의 독단에 의해 진보, 청송, 영양, 울진 등 경상도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일어난 박해이다. 이중 청송의 노래산(老萊山 안덕면 노래리) 교우촌에서 고성운(高聖云 요셉), 고성대(高聖大), 최봉한(崔奉漢) 등 40명의 교인들이 체포되어 경주감영(慶州監營)에서 문초를 받았다. 여기서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은 14명은 다시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경신박해(1860, 철종11년)
서울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진 박해.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의하면, 감옥에 갇힌 10명 증 3명은 문초를 당할 때 굶주림과 고통 속에서도 용감히 신앙을 증거했으며, 특히 그들 중의 한 사람의 16세 아들이 찾아와 옥사장에게 간청하여 아버지 대신 형장에 나가게 해 달라고 애원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고 했다. (최양업 신부의 열아홉번째 서한)
△병인박해(1866 고종3 -1871 고종8)
최대의 피해자를 낸 박해로 서양세력에 위기를 느낀 대원군이 주동했으며, 약 6년 간 8,000여명의 순교자(전신자의 3분의 1)를 낸 사옥이었다.
1868년 진목정 순교자 허인백(야고보), 김종륜(루카), 이양등(베드로)가 진목정 부근 범굴에서 체포되어 이곳 경주 관아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들은 극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배교하지 않고 천주교 신자임을 당당히 드러내었다. 끝내 울산 좌병영으로 이송되어 사형 언도를 받고 9월14일 병영 장대벌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순교 후 허인백(야고보) 부인 박조이(召吏)는 세 분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인근 동천강변 모래밭에 가매장을 했다가 신앙의 자유가 일정 허용된 1907년 진목정 교우들의 힘을 빌려 유해를 진목정 뒷산인 도매산 중턱에 합장했다. 1932년 후손에 의해 교구의 허락을 받아 대구 ‘감천리 교회묘지’를 거쳐 1973년 이래 대구대교구 신천동 복자성당에 모셔져 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내방 124위의 일원으로 시복되었다.
남아있는 관아 부속건물
경주읍성 안의 30여 동에 이르는 건물 중 현재 남은 건물은 아문(衙門). 내아(內衙), 양무당(養武堂), 부사(府舍), 종각(鐘閣) 등이다. 이들이 현재 경주문화원 안에 있다.
관아 출입문인 아문(衙門)
출입문을 들어가면 북쪽인 맞은편에 본전처럼 차지한 건물은 내아(內衙)이며 동, 서로 각각 부사(府舍)와 양무당(養武堂)이 마주보고 있다.
▲내아(內衙) - 수령의 살림집으로 수령의 집무처인 동헌(東軒)에 대하여 서헌(西軒)이라고도 하며 경주 읍성 중 유일한 제 위치에 남은 건물이다.
일제강점기 1926년부터 온고각(溫故閣)이라는 이름으로 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전시관으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 국립경주박물관 주전시관이 되었다. 1975년 경주박물관이 현 인왕동으로 이전 후부터 경주문화원 향토사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아 앞 좌, 우에 각각 전나무가 있는데 왼쪽은 1926년 서봉총 발굴에 참여하기 위해 경주에 온 구스타프 아돌프 6세 부부를 기념하기 위해 심은 나무이다.
내아와 그 앞의 전나무
▲부사(府舍) - 향리의 우두머리 호장(戶長)이 사무를 보던 집이다. 호방(戶房)의 수석직(首席職)인 호장은 수령(守令)을 보좌하는 직으로 수령이 부재 중일 때에는 그 직무를 대리하였다. 맞배지붕에 양쪽 벽에 기대어 만든 부섭지붕이 특징이다.
▲양무당(養武堂) - 관청의 무관들이 사무를 보던 건물이다. 원래 읍성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을 옮겼는데 ㄷ자 형이 특이하다. 지금은 경주문화원 수장고로 활용되고 있다. 부사(府舍)와 같이 이 건물도 옮겨온 것이다.
△ 일승각(一勝閣) (옮겨갔음) - 원래는 제승정(制勝亭)이라고 부르다가 일승각으로 불렀다. 내아에 대하여 수령의 집무 정청인 건물로 동헌(東軒)이라고도 하며 경주관아의 중심건물이었다. 경주문화원 동쪽에 있는 현 KTG(담배인삼공사) 자리에 있었다.
문화원 담장 동쪽 옛동헌 터의 KTG 건물
1914년 부군폐합령에 의해 경주군청으로 사용되다가 1938년 관청정비 계획으로 민간에 매각되었다. 당시 경주만석꾼 부자 정두용(鄭斗鎔)의 아들 정영호가 일찍 죽자 미망인인 배씨부인(裵大蓮花)이 죽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 건물을 불하받아 문무대왕면(文武大王面) 소재 기림사(祇林寺)에 포교당으로 기증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법장사(法藏寺)이며 현재 대능원 후문 건너편 구 경주시청사 서편에 있다.
법장사 정문
법장사(옮겨간 옛 경주관아 동헌 건물)
▲종각 - 성덕대왕 신종을 걸었던 종각이다. 성덕대왕 신종은 혜공왕 7년 771년에 주조된 무게 18.5톤의 무게의 동종이다. 봉덕사가 페찰된 뒤 북천에 파묻혀 전하는 것을 발굴하여 세조6년(1460) 영묘사로 옮겨 보관하였다. 중종원년 1506년 읍성 남문 징례문 앞 봉황대 옆에 종각을 지어 옮겨 실제 통행금지 등 이용하다가 1915년 현재의 자리로 종과 종각을 옮겨왔다. 종은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이 개관하자 그곳으로 옮겨가고 종각만 남았다.
성덕대왕 신종 종각
문화원 가운데 뜰에는 청록파 시인 박목월과 조시훈의 교제와 관련이 있는 300년 묵은 산수유나무 등이 있고 문화원 뒤편에는 보호수 은행나무가 두 그루 위풍 당당하게 옛 유적을 지키고 있다.
산수유 나무 고목에 핀 꽃
▲은행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66호) - 은행나무는 일명 압각수 행목, 공손수(公孫樹, 열매가 손자 대에 열림)라고도 하며 사단(祠壇), 서원, 향교 등에 많이 심었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 500-6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19m, 둘레 6m, 지름 2.1m로 경주 관아를 지을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감옥터
이 감옥터는 원래 문화중고등학교 부지 안에 있었는데 지금은 명사마을 아파트 110동 앞에 있다. 1996년 문화중고등학교가 충효로 이전하면서 이 부지는 건설회사에 아파트 용지로 매각되었다. 1997년 3월 이 지역이 경주읍성 안이었기 때문에 발굴이 되었다. 정조 때 그려졌던 조감기법의 경주읍성전도에는 이곳에 감옥터가 명시되어 있고 원형의 부지 안에 부지에 두 동의 옥사 건물과 출입문이 그려져 있었다.
경주읍성전도의 건물배치도 감옥과 관아
지도에 그려진 감옥터
경주감영 옥사터와 관아터
그런데 국립문화재 연구소가 8개월간의 발굴조사한 결과 그 지도가 매우 정확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방형에 가까운 둥그스레한 터에 남북으로 길쭉한 두 동의 건물과 또 한 동의 부속사와 출입문 터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민간 주거지역의 특성상 발굴형태를 보존하지 못하고 공원화하여 감옥터라고 명시만 하고 있는 것이다
감옥터 표지석과 안내판
경주관아 감옥터
비록 신앙유적지로 지정이 되었지만 경주 관아 터인 지금의 경주문화원에는 박해시 신앙선조에 대한 아무 흔적도 찾을 수가 없어 허망함을 느낀다. 죄인을 문초했던 동헌마저 이전되고 그 자리에 현대식 건물이 차지하고 있다.
그나마 이 감옥 터에 와서야 박해 현장감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가 있다. 아쉬운 것은 민간 아파트 내에 있어서 순례가 자유롭지 못한 점이다. 특히 대규모로 방문할 때는 행동을 더욱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민 중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도 있고, 아직도 ‘감옥터’를 흉한 땅이라고 인식하여 이를 돌에 새겨 명시한 것을 불만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