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 신윤복(1758~)"자는 입보 (笠父) 요, 호는 혜원. 본관은 고령이며 부친은 신한평 (申漢枰) .도화서 화원으로서 벼슬은 첨사 (僉使) 를 지냈다." 미술사가였던 오세창 (吳世昌) 이 그의 책에서 단 두 줄로 그를 묘사한 것이 신윤복에 대한 전부다. 최근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혜원의 본명은 신가권 (申可權) 이며 조선중기 화가인 신말주의 7대손이란 것이 새로 알려졌다. 그림을 제외하곤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1910년 李왕가박물관이 일본인 곤도 (近藤佐五郎)에게 화첩 한 권을 사들인 속에 '아기업은 여인' 같은 그의 그림 2쪽이 들어 있어 그는 미술사 속에서 되살아나게 됐다. 그후 25년 뒤 국보 1백35호로 지정된 30쪽 짜리 '혜원전신첩 (傳神帖)' 이 간송미술관에 의해 공개되면서 그는 신기 (神技)에 가까운 솜씨로 조선시대 후기의 시정 (市井) 풍속을 그린 화가로 자릴 잡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문집에 흔히 나오는 글줄조차 그를 향한 것은 없다. ' 출생연도나 사망연도조차 없다. 그때가 1928년. 그후 10년 뒤 문일평 (文一平) 이 '점잖지 못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 라고 언급한게 그나마 그에 관해 남겨진 유일한 에피소드다.상상하기 어려웠던 조선시대 후기의 아름다운 여인 이미지를 분명하고 뚜렷하게 우리 머리 속에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배추잎처럼 부푼 담청색 치마에 약간 단이 짧아보이는 저고리. 그리고 조금 고개를 숙인 앳된 얼굴에 실처럼 가느다랗고 고운 눈썹에 다소곳한 콧날과 좁은 입 '아 사랑스러워라' 하는 감탄을 절로 일게 한다. 그가 그린 풍속화로 인해 우리들의 18세기가 한층 향기로워졌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松亭雅會
혜원은 지나친 여속도(女俗圖)를 그린다 해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여속도 전
문가여서, 그가 남긴 산수화는 많지 않으나, 송정아회는 산수화 중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부드러운
담묵 필선으로 그려 올라간 소나무들은 수려하기가 마치 여속도 속의 늘씬한 미인을 보는 듯하고, 죽
림 뒤로 자리잡은 초당 속에 반쯤 걷어 붙인 휘장 뒤로 비스듬히 상반신을 드러낸 인물이나, 초당을
찾아오는 긴 지팡이의 인물도 모두 훤칠한 키에 구성진 몸매로 미끈미끈 그려져 있다.솔숲과 대숲에
싸인 초당이 화면의 중심을 이루는데, 비교적 강렬한 붓질로 보는 이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이
는 뛰어난 기교를 보이고 있다. 특히 화면 전체를 담청으로 훈염하다시피 한 뒤, 이와 큰차이 없는 담
歸路山水圖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은 단원 김홍도와 함께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일반 서민들의 소박한 생활상을 소재로 하였던 단원과는 달리, 한량과 기생들의 풍류 생활이나 남녀간의 애정 풍속을 즐겨 그렸다. 혜원의 정확한 생졸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버지인 일재 신한평의 뒤를 이어 화원(畵員)으로 활동했던 모양이고, 결국 풍기 문란한 그림을 그린다는 명목으로 도화서(圖畵署)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인물·풍속화 외에도 산수화가 몇 점 남아 있어 산수화가로서의 혜원의 기량을 엿볼 수 있는데, 이 작품은 산밑의 외딴 기와집을 향해 두인물이 걸어가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비록 소품이기는 하나 혜원의 산수화 중 가작(佳作)에 속하는 것이다. 푸르스름한 선염으로 경물의 위치를 정한후, 갈필의 피마준(披麻??)과 둥근 태점(苔點)을 주로 사용하여 세부 묘사를 마무리지었는데, 몇 개의 윤곽 선만으로 그려낸 인물 묘사가 특히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