讓寧大君 (양녕대군) 10
고산(高山)추천 2조회 18024.01.10 10:33댓글 10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양녕대군, 폐세자 전후
조선 3대 임금 태종(1367~1422. 재위 기간 1400~1418)은 현경왕후 민씨와의 사이에 4난 4녀를 두었다.
4명의 왕자는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성녕대군 등 4명이었다.
이들 대군들의 군호
(君號)를 살펴보면, 첫 글자는 讓, 孝, 忠, 誠이고, 둘째 자는 돌림자로 편안할 녕(寧)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양녕대군의 ' 양보할 양(讓) ' 만이 조금 특이하고 이상하다.
양녕대군은 조선 건국 2년 후인 1394년에 태어났다.
9세 때인 1402년 3월8일에 이름을 ' 제(悌) '라고 지었고, 자를 후백(厚伯)이라고 하였다.
태종은 적장자 우선의 관례에 따라 당연히 그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1404년 11살 때이었다.
양녕대군은 14살이 되던 1407년에 김한노의 딸에게 장가를 들더니...
17세 때부터 사냥과 다른여자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하여...
기생 봉지련, 큰아버지 정종의 애첩 초궁장 매형 이백강의 애첩 칠점생...
지중추부사 곽선의 첩 어리 등 세자라고 하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
장안의 미인들과 주색잡기에 빠져 신료들의 근심과 비난을 한 몸에 받았고...
드디어 1418년 6월에 폐세자되는 동시에 경기도 광주로 유배 조치되었다.
1418년 6월 3일, 개성 경덕궁
태종은 3개월 전 14세 된 4남 성녕대군의 요절로 괴로움을 달랠 겸 한양을 떠나 개성 별궁에 있었다.
왕이 도성을 떠나면 세자는 왕을 대신하여 감국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것이 도리이었다.
그런데 세자는 왕이 도성을 비운기회를 틈타 오히려 색탐을 즐겼다.
개성에서 세자의 난행을 보고받은 태종은 사람을 시켜 꾸짖어도 보고 달래 보기도 하였지만, ...
그 도는 더해가기만 했다.
아예 장인 김한노와 짜고 어리를 세자궁에 불러 즐기기도 하였다.
장인이자 병조판서이던 김한노가 사위에게 다른 계집 채홍사 노릇까지 한 것을 보면....
김한노의 출세욕도 문제이지만, 세자의 다그침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성을 모르는 세자는 태종의 걱정스러운 훈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버님은 여러 후궁을 가는리는데 왜 아들은 그러면 안됩니까 ?' 하면서 항변을 하기에 이르렀다.
태종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1. 오늘 세자를 폐하고, 군호를 양녕대군에 봉해 경기도 광주로 유배할 것
2. 폐세자를 반대한 공조판서 황희는 전라도 장수로 유배할 것
(이때 황희는 이미 경기도 파주 교하로 유배 중이었음)
3. 다음 세자는 양녕대군의 5살 된 아들을 세손으로 삼는다.
그리고는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러한 태종의 결정에 중신들은 아연실색했다.
그동안 황희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신들이 폐세자를 주장했을 때는 ....
효령대군이나 충녕대군 중 세자를 책봉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손자를 세손으로 정하겠다는 것이다.
11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