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 및 민족지도 운동을 한 함재 제영근 선생과 그의 스승 심재 조긍섭 선생 그리고 그의 동문들 | ||||||||
심재 (深齋) 조긍섭 (曺兢燮) | 눌재 (訥齋) 김병린 (金柄璘) | 회봉 (晦峯) 하겸진 (河謙鎭) | 경재 (耕齋) 이건승 (李建昇) | 난곡 (蘭谷) 이건방 (李建芳) | 수주 (樹州) 변영로 (卞榮魯) | 산강재 (山康齋) 변영만 (卞榮晩) | 일석 (逸石) 변영태 (卞榮泰) | 매천 (梅泉) 황현 (黃玹) |
1873~1933 조선말기의 학자. 1910 경숙국치 이 후 동서의 학설을 비교 궁리하여 『곤언((困言)』저술-(정통 유학자로서의 주제적 사고로 서양의 문화와 제도를 비판적으로 논의) 1919.3. 「일본 총독과 동포대중에게 보내는 글」의 초안을 잡다가 구속당함. 정산서당, 구계서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 한말 지식인 가운데 황현.김택영.이건창 등과 교유함. <심재집><암서집><조명록> 등 저술. | 1861~1940 일제강점기의 유학자 본관 김해, 경남 창원 출생. 31세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문란한 과거제도를 보고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연구에 힘씀. 1910경술국치 이후 출입을 삼가고 후학양성에 전념. 혼탁한 세상에 살면서 말을 아끼기 위해 호를 ‘눌재(訥齋)’라 지음. 마을 입구 후학들이 세운 ‘눌재김선생유허비(訥齋金先生遺墟碑)’가 세워져 있음. <눌재집><용계아언> 등 저술. | 1870~1946 근대의 유학자 13세에 사서·오경의 요의를 모두 익힘. 17세에 당대 명유 허유를 만남. 24세부터 성리학을 논하기 시작. <도문작해><주어절요><명사강목><동시화><동유학안><해동명장열전> 등을 저술했는데 만년에 엮음 동시화는 후에 정인보(鄭寅普)는 그 서문에서 ““동국(東國)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진기한 시화” 라고 극찬함. 동유학안은 우리나라 유현들의 학문과 연월을 체계있게 30권으로 정리했다. 그를 위해 세운 덕곡서당(德谷書堂)에서는 1857년부터 사림들이 매년 석채례(釋采禮)를 행하고 있다. | 1858~1924 조선 말기의 양명학자·문인 본관 전주 영재(寧齋)이건창(李建昌)의 아우이며 난곡(蘭谷)이건방(李建芳)의 재종형이다. 하곡(霞谷)정제두(鄭齊斗)에서 연원하는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학맥을 이어서 양명학(陽明學)의 사상을 지녔다. 매천(梅泉) 황현(黃玹)과 깊이 교유했다. 1906. 강화도에 계명의숙 설립. 교육으로서 나라를 살리려는 운동을 전개. 또한 대한 자강회(大韓自强會)를 지지함. 황종희(黃宗羲)의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의 진보적 사상에 공감해 이건방과 함께 담헌(薝園)정인보(鄭寅普)의 스승으로서 양명학 사상을 그에게 전수. 저서로<해경당수초>가 전해지고 있음. | 1861~1939. 조선말기의 학자. 본관 전주. 작은아버지의 후사로 간지 얼마 안되어 생부 또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려운 살림으로 과거볼 겨를이 없었으나 1885년(고종 22)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곧 돌아옴.(조정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종형 건창(建昌)이 자기와 같이 활동할 것을 권하였으나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사양함.) 1894년 이후에는 가족을 이끌고 서울에 돌아와 원사(原士)」를 지어 산림(山林)에 남아 있는 선비를 기롱하고, 학문을 새롭게 하고자 다짐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난곡존고(蘭谷存藁)』 13권이 있다. | 1898~1961 시인. 영문학자. 서울출신. 서울 재동·계동 보통학교를 거쳐 1910 사립 중앙학교 중퇴.조선 중앙 기독교 청년학회 영어반에서 3년과정을 6개월만에 마침.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 산호세대학에서 수학. 1919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 1920년 ‘폐허’, ‘장미촌’ 동인으로 참가.<신민공론新民公論> 주필 지냄. 1933년 동아일보 기자. 1946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 1950년 해군사관학교 영어 교관 부임. 1953년 대한공론사 이사장 취임. 1955년 제27차 비엔나 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 이 후<코스모스><논개><명정사십년><실제><사벽송>등 저술 시 세계는 크게 3기로 나누는데. 1기는 민족시인으로서의 의식이 표출된 시기. 대표작 <논개>. 2기는 이후 광복까지의 시기로 자신을 둘러싼 절망감 속에서도 선비의 지조를 고수하려는 태도가 나타남. 3기는 강복부터 사망까지의 시기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적 시를 주로 씀. | 1889~1954 조선말 법률가·학자. 경기도 강화 출신. 대표관직 광주지방법원 판사, 변호사, 성균관대학교 교수. 1905년 관립법관양성소 입학. 이듬해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들어감. 1908년 졸업과 동시에 법관이 되어 광주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하였다가 사법권이 일본에 이양되자 법관직을 사직, 신의주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하였다. 1910년 국권 강탈된 후 중국에 망명하였다가 1918년 귀국하여 학문에 전심, 전공을 바꾸어 한학·영문학을 연구하였다. 광복 후 성균관대학의 교수로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국학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로는 『산강재문초(山康齋文鈔)』·『20세기지삼대괴물론(二十世紀之三大怪物論)』이 있다. | 1892~1969 조선말 정치가·영문학자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이회영(李會榮)의 지도를 받음. 19살에 보성중학교를 졸업. 1912년 만주 통화현(通化縣)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제1회로 졸업. 1920~1943년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서 영어교사로 봉직. 1945. 고려대학교 교수로 취임. 1949. 대통령특사로 필리핀 다녀옴. 1951.국제연합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 회의에 참석 1951~1955 제3대 외무부장관 역임. 1952~1953국제연합수석대표 1953.국무총리(외무부장관직 겸임) 1954.제네바정치협상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1956.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및 고려대학교 교수 역임. 1963.정민회(正民會)를 조직하여, 대통령선거에 출마. | 1855~1910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 시인·문장가. 강위(姜瑋)·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 등과 깊이 교우. 1883년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하여 그초시 초장에서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그가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둘째 뽑힘. 조정의 부패를 절감한 그는 귀향함. 1888. 아버지의 명으로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 당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로 청국의 적극적인 간섭정책과 수구파 정권의 부정부패가 극심했으므로 부패한 관료계와 결별을 선언, 다시 귀향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급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후손들을 위해 『매천야록(梅泉野錄)』·『오하기문(梧下記聞)』을 지어 경험하거나 견문한 바를 기록함.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자 당시 중국에 있는 김택영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망명 시도했으나 실패함. 1910 경술국치로 통분해 절명시 4수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매천집><매천시집><매천야록><오하기문><동비기략(東匪紀略)>등 있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