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저께 나는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Glaucon)과 함께 피레우스로 내려 갔었네.”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의 외항 피레우스 — 이 곳은 아테나이 민주파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 에 “내려”(walked down) 가서 벤디스(Bendis) 여신에게 “축원”을 하고 축제 행사를 “구경”한 다음 글라우콘과 함께 “시내로 돌아오고”(go back to the city) 있을때, 그들을 발견한 폴레마르코스(Polemarchos, 이 이름은 희랍어로 ‘싸움’이란 뜻을 가진 polemos와 ‘시작, 기원, 발단’이라는 뜻을 가진 archē가 복합된 것이다)가 시동을 통해 자기 일행을 기다려 달라는 전갈을 보낸다.
기다리던 소크라테스 일행에게 다가온 폴레마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말을 건다: “소크라테스 선생님! 제가 보기에는 두 분께서는 아마 시내로 들어가시느라고 서두르던 참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이것을 포함하여 이어지는 대화는 «국가»의 향후 전개를 함축하는 말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그러시다면 저희가 몇 사람인 줄은 알아보시겠습니까?”(Well, you see what a large party we are?) 소크라테스는 “왜 못 알아보겠소?”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가 그곳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두 분께서는 이 사람들을 이겨내시거나, 아니면 이곳에 머무르시거나 하셔야겠습니다.”(Unless you are more than a match for us, then, you must stay here.) 그가 제시하는 근거는 소크라테스 일행 두 명 보다 그들의 수가 더 많다는 것이고, 이것이 더 강함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보내 주어야만 되게끔 설득할 수 있을 때의 경우가 말이오”(Isn’t there another alternative? we might convince you that you must let us go.)라고 하면서 수에 의한 강함이 아니라 “설득”을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폴레마르코스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실 수가 있을까요?”(How will you convince us, if we refuse to listen?)라고 하면서 설득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이에 글라우콘은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라고 대답한다. 폴레마르코스는 마지막으로 이 대화에 쐐기를 박는다: “실제로 저희는 들으려고 하지 않을 사람들일 테니까, 그렇게 마음을 정하세요.”(Well, we shall refuse; make up your minds to that.)
이 대화를 마치고 소크라테스 일행은 폴레마르코스의 집으로 간다. 거기서 그들은 “폴레마르코스의 형제인 리시아스와 에우티데모스를, 그리고 특히 칼케돈의 트라시마코스와 파이아니아의 카르만티테스, 또한 아리스토니모스의 아들 클레이토폰”을 보게 된다. 폴레마르코스의 아우 리시아스는 아버지 케팔로스(Kephalos) 사망 후 15년 동안 유랑 생활을 하다가, 서기전 412년에 아테나이로 돌아와, 다시 아버지의 가업을 일으킨다. 그는 민주파 사람들과 제휴하여 30인 과두 정권과 맞섰다가 형과 함께 체포되어 형은 처형당했으나 도피하였으며, 서기전 403년 민주파가 집권하게 되자 아테나이로 귀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