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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인 김성우목사의 설교 패턴 중에 우리 좋은 설교 연구모임에서 경험해 보지 않은 ‘Q&A 설교 방식’의 설교가 있어 올려봅니다.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성자 김성우 목사
대전신학대학교 예배·설교학 교수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지혜!
■말씀: 마가복음 7:1-8, 14-15, 21-23
■주제: 예수님은 본질적인 의미를 잃어버린 전통에 대해 바른 정신을 불어 넣어 주셨다.
■교리: 정결함
■필요: 전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정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미지: 인정, 끄덕임, 긍정
■미션: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오래된 전통이나 형식이 아니라 그것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정신에 있다는 사실을 알릴 사명이 있다.
■설교 형태: Q&A 설교 방식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본문 배경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위한 복음서로서 ‘종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기록되었다. 1-10장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한 내용, 그리고 11장에서 16장은 예루살렘 중심으로 한 사역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중 1-9장은 1차 갈릴리 사역(1:1-3:19), 2차 갈릴리 사역(3:20-5장), 그리고 3차 갈릴리 사역(6-9장)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이 기록될 때는 주후 70년경으로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 파괴라는 로마의 박해 시대가 있었다. 유대 돌립전쟁을 일으킨 유대인들에 대하여 대박해를 시작한 로마는 나침내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 및 성전 파괴에 이르게 되었다. 그 당시 로마에 머물고 있던 마가(밷전 5:13))는 이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 파괴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 해석했다. 그리고 마가는 로마를 바벨론으로 해석했다. 베드로전서 5장 13절의 말씀이다.
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마가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었는데 마가는 로마인들을 위해 ‘아람어’를 번역해 주었다. 예를 들어 ‘보아너게’(막 3:17, 곧 우레의 아들), ‘달리다굼’(막 5:41,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고르반’(막 7:11,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에바다’(막 7:34, 열리라),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막 15:34,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등이다.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의 증언에 따르면,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관이었는데, 그는 주의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는 대로 모든 순서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했다. 마가는 직접 보고 따른 것은 주님이 아니라 베드로였고 베드로가 필요할 때마다 마가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들었던 내용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거짓 없이 적으려고 했다.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하면서 지금 당장은 박해를 당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구원의 승리를 얻게 될 것이라는 위로와 격려를 하고자 했던 이유이다. 마치 예수님도 십자가 수난으로 구원을 성취하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고난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말씀에 나오는 정결 논쟁은 순수한 토론이 아니라 처음부터 함정에 빠뜨리고자 ‘음모된 토론’이었다. 토론의 구성을 보면, 1-8절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 제기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응답을, 9-13절은 정결 예식의 한계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논증이 그리고 14-23절은 정말 부정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으로 구성되었다.
■신학적 메시지
오늘 말씀에서 신학적 메시지는 ‘부정을 부정으로 인식하는 태도’이다. 오늘 말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동안 선조들로부터 내려왔던 가르침을 그대로 전수받아 가르치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보면, 의문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는 무비판적 신앙을 답습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엇인 잘못된 것인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판단하는 기준은 그동안 배워왔고 전수되었던 내용이 기준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훌륭하게 전수를 받은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가 되었고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전혀 새로운 가르침(New Teaching)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판적 사고에서 오는(그런다고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는 비판이었다.) 비판이었다. 이 비판적 사고는 ‘부정을 부정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제공했다. 물론 이러한 용기로 인해 기득권 세력의 엄청난 반발과 모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동안 전혀 듣지 못했던 새로운 가르침이었고, 많은 사람이 이 가르침에 놀랬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이었고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회복된 삶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이 사실에 대해서 마가복음 1장 21-22절을 이렇게 묘사한다.
21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제로 그러한 가르침이 실제가 되는 놀라운 능력을 베푸셨을 때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실에 대해서 마가복음 1장 27절은 이렇게 묘사한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부정을 부정으로 인식하고 올바른 신앙의 태도를 추구했던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로운 가르침이었고 놀라운 권세 있는 가르침이었다. 우리 또한 부정을 부정으로 인식하는 신앙적 태도를 통해 우리를 부정하게 하는 요소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설교문
서론
오늘은 오순절 후 열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도 교회력에 따라 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조금은 어려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지혜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부정을 부정으로 받아들일 때 허무주의가 싹터 올라오거나 희망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서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철학자들의 수고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헤겔은 변증법이라는 연구 방법론을 통해서 현재 당면한 문제(정)에 대한 상반되는 내용(반)을 제시하면서 서로 합을 이루어가는 방법을 통해 발전하는 역사에 관해서 서술하였습니다. 심지어 아도르노는 그러한 변증법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부정의 변증법』에 대해서 주장하였습니다. 아도르노의 이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삶의 태도로 옮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존의 철학은 ‘개념’과 ‘대상’의 일치를 추구하여 진리를 파악했던 관심에서 ‘개념과 대상이 일치하지 않는’ 혹은 ‘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개념을 통해 대상에 다가갈 수 없는 세계’ 속에 살아가지만, ‘진리’을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에 대해서 ‘무의미한 세계에 살면서도 삶의 의미를 확보해 보려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무의미, 무가치, 무질서가 가득차 있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와 의미 그리고 진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부정의 변증법적인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오늘 말씀은 어쩌면 부정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긍정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대담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담대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면서 그 본질과 대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정을 긍정으로 만들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상고하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부정을 긍정으로 만들어 가셨는지에 대해서 Q &A 방식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오늘 말씀은 어떠한 배경 속에서 기록되었습니까?
오늘 말씀이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 말씀이 어떠한 배경 속에서 기록되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주후 70년경, 즉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되는 상황 속에서 기록이 되었습니다. 마가는 이러한 현상을 종말의 때의 증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임박한 종말론의 입장에서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로마를 바벨론으로 해석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13절의 말씀입니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마가는 마가복음을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서술했는데 그들을 위해서 아람어를 번역해 주었고, 유대인의 전통과 문화에 관해서 설명해 주는 방식으로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에 의하면 그는 베드로의 통역관이었는데 정확하지 않지만 주의 말씀과 행적을 대체로 정확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아마도 마가는 직접 예수님을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전해 줄 때마다 그가 들었던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하려고 했습니다.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하면서 지금 당장은 박해를 당하고 고난을 받고 있지만 결국에는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과 위로 그리고 격려하고자 했습니다. 특별히 마가는 ‘고난’이라는 관점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토론이 순수한 토론이 아니라 처음부터 함정에 빠뜨리고자 ‘음모된 토론’이었음을 증언하고자 했습니다. 이 논증의 형태를 보면, 먼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문제제기를 하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응답(1-8절)을, 정결 예식에 대한 한계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논증 (9-13), 그리고 정말 부정한 것에 대한 정의(14-23)로 결론을 내립니다.
두 번째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제기만 문제는 무엇입니까? 1절과 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오늘 말씀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왔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예수님과 토론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이나 행동을 모함하고 책잡기 위해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파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질서를 흔들어 놓고 기득권의 토대가 흔들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등은 더 심화되고 예수님의 인기는 더 높아만 갔습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의 진상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언행에 무엇인가 잘못된 점이 없는지 찾고자 했습니다. 어쩌면 더 높은 권세자들의 간계를 가지고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그들은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제자들”을 보았습니다. 마가는 왜 유대인들이 손 씻는 문제를 제기했는지 3절과 4절을 통해서 부연설명을 합니다. 3절과 4절의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손 씻는 예식을 너무나 중요한 예식으로 지켜왔던 유대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런 행동은 율법을 범하는 행위로 간주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이렇게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여기서 유대인들이 말하는 ‘장로’는 ‘연장자’ 혹은 ‘조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조금 더 확장해 본다면, 유대인의 지도자급, 즉 지방의회 의원(눅 7:3)이나, 산헤드린 회원 또는 권위 있는 율법 교사와 종교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전통’은 조상 때부터 구두로 전승되어 온 관습법을 말합니다. 이들의 관습은 성문화된 율법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온 구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A.D. 200 년경에 미쉬나에 기록되었고 이것의 목적은 사람들의 생활을 성결하게 규제하기 위함이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이러한 구전 율법이 여전히 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랍비들은 회당에서 이러한 내용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원래의 정신이 변질되어 성경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성문 율법의 권위와 맞먹는 정도로 백성들의 양심을 구속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손 씻는 문제’는 위생에 관한 문제로 이러한 관습은 하나의 거룩한 예식으로 강조되면서 하나의 규례처럼 내려왔다. 이러한 규례는 모세의 율법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었으나 당시 유대인들은 이 규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제자들 또한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앞에서 이를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행위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눈에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마가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규제의 문제로 시작했지만, 점차 발전하여 모든 규례상의 청결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검토하는 데까지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결국, 마가는 의식상의 씻음의 규례뿐만 아니라 의식상의 청결에 해당하는 모든 규정을 파기함으로 내적 청결의 새로운 도덕으로 예수님의 의도를 널리 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셋째는 마가가 전하려고 했던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장로의 전통을 강조하면서 제자들의 손 씨는 문제를 제기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인 19장 13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그들의 외식함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6절과 7절의 말씀입니다.
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외식하다’라는 말은 ‘본래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다른 사람으로 분장하여 행동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마치 연극하는 것처럼, 연기하는 배우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가 확장되어 본문에서는 자신의 나쁜 의도를 감추고 선으로 위장하는 사람, 즉 위선자, 이중인격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렇게 바리새인과 서시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게 위해서 배우처럼 살았고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오역하고 손상시키는 일까지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호세아 6장 1-3절에서도 나타납니다.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진노를 멈추시고 심판을 거두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런 하나님을 기만합니다. 우리가 잠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면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4절과 5절에 있습니다.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식적인 회개에 대해서 ‘너희들의 회개가 눈 가리고 아웅이다. 너희들의 눈물은 악어의 눈물이다. 이제 그런 눈물은 지긋지긋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회개 이제는 받지 않겠다. 그러니 너희에게 임할 심판이 곧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또한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잊어버렸습니다. 마가복음 7장 9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러한 일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고르반도 그런 맥락에서 그 본래의 뜻을 외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넷째 그런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진정한 더러움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14-16절의 말씀입니다.
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이어지는 21-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 말씀은 예레미야 17장 9절의 말씀이 떠오르게 합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폐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는 영, 혼, 육입니다. 영은 말 그대로 영적인 세계와 교통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그리고 혼은 인간 자체인 ‘나’(ego)가 되게 하는 영역입니다. 혼은 그 사람의 자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포함하여 인격이 되게 합니다. 인격 혹은 혼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지성 혹은 생각, 정서 혹은 마음, 감정 그리고 의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부분이 혼을 구성하고 있는 두 번째 요소, 즉 정서 혹은 마음과 감정입니다. 여기서 마음은 두 가지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의 원형을 담고 있는 원형, 그런데 죄로 인해 깨진 채 잔영으로 남아있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양심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마음은 상처받거나 소외당하고 폭력을 당하면서 왜곡되거나 콤플렉스 상태로 남아있는 다시 말해서 일그러진 채 존재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욕구의 불충족으로 오는 일종의 결핍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해결되지 못한 채 무의식의 공간에 가라앉아 있다가 어떤 사건이나 외부적인 자극이 주어졌을 때, 나도 모르는 사이이게 그때의 그 감정이 함께 올라와서 선하지 못한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욕망이요, 폭력적 성향이고 우울이고 회피입니다. 그런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비신앙적인 요소입니다. 교만입니다. 육체적인 욕망을 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본문 21-23절의 말씀입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다섯째, 그렇다면 더러운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그릇으로 드리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직면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직면하는 훈련은 상담을 통해서도 가능합니다. 단순한 상담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쓴 뿌리로 작용하고 있는 그 시간과 직면하는 훈련입니다. 도저히 만나고 싶지 않고 기억조차 하기 싫은 그곳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용서가 필요한 사람에게 용서를 선언하고, 격려가 필요한 나의 모습이 있다면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책감이나 자악하는 마음이 있다면, 너는 할 만큼 했다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만져주시고 회복시켜주시는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 충만하게 임재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들이 생각난다면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직면과 회복이 동시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걸까요? 무엇이 우리를 신앙없는 삶으로 이끌어 가는 걸까요? 형식과 전통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내용없는 형식은 의미가 없습니다. 형식없는 내용도 의미가 없습니다. 형식과 내용을 함께 추구할 때 올바른 예수님의 정신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것은 전통과 형식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청결을 추구하는 삶으로 안내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도덕의 정신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도덕의 추구는 십자가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상처 나고 고장난 마음이 십자가로 치유되고 회복되어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 인간의 원형을 회복하는 마음에서 진정한 청결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고 나를 괴롭게 하는 내 안에 깊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쓴 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한 청결을 유지하는 복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삶을 추구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단독자의 모습으로 대면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가장 아픈 부분, 숨기고 싶은 그 깊은 내면을 주님 앞에 솔직하게 내어놓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 저는 이런 일로 마음 아파하고 가슴 아파하고 남몰래 눈물 흘렸습니다. 주님, 이 마음을 만져주시옵소서. 십자가의 은혜로 치유하여 주시고 회복시켜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회복시켜주실 줄 믿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
오늘 주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십자가 앞에 섰습니다. 주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섰습니다. 그동안 나를 지배해 왔던 아픔, 슬픔, 배신감, 실패감, 좌절감, 미움 등을 내어놓습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사라지게 하옵소서. 나에게 아픔을 주었던 마음이 사라지게 하옵소서. 상처를 주었던 마음이 사라지게 하옵소서. 나를 분노하게 했고 폭력적이게 했던 악한 마음이 사라지게 하옵소서. 나의 마음이 십자가의 은혜로 정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깨끗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다시는 사로잡히지 않고 청결한 마음으로 주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작성자 김성우 목사
대전신학대학교 예배·설교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