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 교수의 불교 시 모음 <억울한 누명>을 읽고
김상수(문학평론가)
‘누명’이란 이미 억울하다. 그러니까 억울한 누명이란 억울하고도 억울한 불명예나 평판이나 혐의다. 누명에 이미 억울함이 들어있는데 앞에 다시 ‘억울한’이라고 쓴 것은 다음 두 가지 경우를 떠올리게 한다.
첫째, 통상적인 표현. 누명(陋名)이란 한자어에서 앞 글자 ‘누(陋)’는 더럽거나 추하거나 미천하거나 좁음을 뜻하지만, 우리말 낱말 ‘누명’에는 ‘억울한’이라는 뜻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언어생활에서 누명이 단독으로 쓰이는 경우보다는 통상 ‘억울한 누명’이라고 훨씬 많이 쓰인다. ‘그는 정말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라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써야만 더욱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둘째, 더욱 강조하고 싶다는 의미. 누군가 누명을 썼다고 했을 때는 마땅한 죄상으로 정당하게 고발당한 것이나 혐의를 받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뜻 또한 이미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더더욱 강조하고 싶어서 ‘억울한 누명’이라고 흔히 말한다는 것. 이것은 당사자가 받은 혐의나 불명예나 평판이, ‘억울하고도 억울’하거나 ‘억울한, 너무나도 억울한’ 혐의라는 점을 누차 강력하게 표현하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 무심히 / 다가갔는데 / 쏜살같이 달아나는 물고기 떼” <억울한 누명>
이 시는 위 두 가지 경우를 모두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무심히’ 다가갔는데, ‘물고기 떼’는 그들을 포획하거나 살해할 목적으로 판단하여 ‘쏜살같이 달아’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심히’는 마음에 아무런 담김 없음이니 그저 삶의 일개 상태다. 그러나 ‘물고기 떼’는 그 무심함을 알지 못하여 어느 인간의 다가감을 죽음이라는 하나의 위협으로 인식하고, 살고자 ‘쏜살같이’ ‘달아나는’ 것이다. 즉, 다가가는 ‘나는’ 무심하기만 한데 그 순간을 맞닥뜨리는 ‘물고기 떼’는 그 포획 또는 살해 위협에 ‘쏜살같이’ ‘달아’나고야 만다는 것. 삶과 죽음이 이렇게 서로 오해의 여지를 남긴다. ‘무심한’ ‘나’로서는 참으로 억울하기도 억울하겠다. 이러한 오해는 내 무심한 삶과 물고기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서로 분별할 수 없게 하며, 살았음이 죽음으로 오해되고, 결국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아 버리고 만다.
대개 철학자들은 세상일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사실 오로지 줄기차게 자기만을 말한다. 타인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는 그 순간, 그는 자기 자신을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선언하는 바로 그 순간, 자기도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어 환장한다는 것이며, ‘아름다움이란 조화와 균형이다’라고 언급하는 마음에는, 세상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아름다워지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일 따름이다. 꼭 남 말 하듯, 제 말을 한다. 이 시집은 이런 철학자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는 언어를 압축하고 운율을 넣은 글월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오히려 대체로 풀어헤친다. 여러 다른 시각과 차원으로 인간과 세상을 다채롭게 풀어헤쳐 보임으로써, 마침내 ‘부처의 진리’를 압축한다. 있음과 없음이 다르지 않고 삶과 죽음이 또한 차이가 없음을.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 가까이 가면 변 냄새가 진동한다.” <삶이란 백로와 같은 것>
기본적으로 근본적으로 삶과 죽음조차 다르지 않으니, 삼라만상 역시 다를 바가 없다. ‘아름다움’이든 ‘변’이든, 멋진 삶이든 순백으로 위장한 똥이든.
손주들이 미끄럼 타는 것을 보는 것은 30년 전 아들과 그 친구들이 미끄럼 타는 것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미 본 것 같은[데자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꼭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데자뷔> 시간과 공간, 즉 시공(時空)도 그 차이를 못 느낀다.
“거기도 / 텅 비어있는 걸 알겠다, / 네가 가는 걸 보니 …” <높이 떠가는 헬리콥터를 보며>
하늘의 헬리콥터는 언제나 굉음과 함께 널따란 프로펠러를 크게 휘돌아 치며 어떻게 보면 웅장하게 느껴질 정도로 날아간다. 그러나 그 존재는 하늘이 ‘텅 비어 있는 걸 알겠다’는 걸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거기도’ 그렇다는 건, 지상도 그렇고, 내 마음도 그렇다는 것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 공천[비어있는 하늘]이고 허심[비어있는 마음]이다. 하지만 하늘에는 ‘헬리콥터’, 지상에는 그걸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있음과 없음이 또한 다르지 않다.
존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차이가 없음은,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 차이와 분별도 생기지 않는다. 이런 걸 세상은 ‘평등’이라 부른다. 이 또한 단단하게 압축된 부처의 진리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전략……) 다 같은 인간이다 / 다 같은 인간이다 / 세상에 유별난 건 없다. / 자연도 그렇고 / 사람도 그렇더라.” <서사(敍事)>
있음과 없음은 마침내 그 차이조차 알아 볼 수 없다.
“저 멀리 / 하늘과 땅이 맞닿은 / 지평선과 만나려 걷는데 / 가는 만치 멀어지는 종착점” <끝이 없는 길>
‘끝’이라는 있음의 ‘종착점’을 향하여 살아가는데, 바로 ‘가는 만치’ 딱 그만큼 없음을 만날 수 있는 ‘종착점’은 ‘멀어’져서 다다를 수 없다. 생사(生死)를 가려볼 수 없다. 있음과 없음이 다르다는 것조차 알 수 없어진다.
“(……전략……) 밟히고 찢기는 시련 … / 너의 애씀도 너의 시련도 / 아무도 모르게 / 으깨지고 뭉개져 / 먼지가 되고 가루가 되어 / 바람에 흩어진다. / 네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 아무도 모르게 / 그냥 허공이 되어 …” <비 오는 가을 차도 위 낙엽>
‘애씀’과 ‘시련’도 살아있는 생명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언젠가 어떻게든 ‘있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모르게’ ‘그냥 허공이 되어’버릴 뿐이다. 고통스러운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은 속칭 허무가 아니라, 사라짐, 즉 없음으로 녹아들어 가고 마는 것이 자연법칙이다. 애쓰고 고통스러울 때는 그 존재의 아픔이 영원하리라 싶기도 하지만 그것도 역시 언젠가는 어떻게든 분명히 사라져버린다는 것.
이 시집에서 읽을 수 있는 여러 이야기들을 말하는 화자(話者)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부처의 진리를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이라고 절감할 수밖에 없다. 작은 생명과 자연의 조화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평등과 생로병사의 무상을 이야기하는 시(詩)들. 이 시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부처가 하신 진리의 말씀이 형상화한 것들이다. 이 시들을 읽는 이의 한 사람으로서는 부처의 진리를 전하는 말씀을 넘어 부처의 눈으로 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느낀다.
이쯤 되면 살만한 삶이다. 어디로 가는 지 전혀 모르며 냇물 위에 떠가는 잎사귀 같은 한 인생이, 그 냇물이 강물을 만나고 바다에 닿는다는 것을 잘 알고, 저 하늘의 별자리를 찾아 길을 묵묵히 걷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전략……) 세상에 대한 통찰, 끝!” <Rap시, 죽은 다음에 이어져? 불상! / 죽은 다음에 사라져? 부단!>
이에 대하여, 이 시집에 담긴 시상(詩想)에 대한 통찰, 끝!
2023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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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수(문학평론가)
1961년 서울 출생 1988년 중앙대학교 대학원 불문학과 석사학위 취득 1989년 파리10대학 현대문학 박사과정 수학 2014년 경주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학위 취득 저서: <최인훈 소설의 불교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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