又
夫譜者序世也辨族也重譜所以敦宗敦宗所以尊祖苟於紀(記)族之際有一毫疎薄之意是欲敦而不敦欲尊而不尊可(何)不愼哉惟我全州之崔實爲東方著姓而累經兵燹譜牒散逸殆盡故我七世祖參判公積年勤勞衰聚諸族家乘所記摭實辨疑以文成公爲鼻祖而有四派焉按廉使大護軍判事中郞將也宗支有序昭穆不紊間經三修譜而至于今日者亶由於參判公編始之功然至於文成公墓所兵燹之餘所傳未詳只錄以周德山云而公之玄孫烟村公墓前越四古塚下有一大墳故老相傳以公墓云故正廟丙辰四派諸宗會于山處開審封域不得誌碣同議設壇享祀者六十有餘年矣哲廟甲寅伯仲兩派謂以烟村集中參議公墓葬于先塋後參判公一卷譜文成公墓在全州周德山云一宗人齊岳家乘參議公墓在文成公墓西上節十一卷譜甲龍塚錄以文成公兆下始有墓祭議然將信將疑墓壇之祀各設按廉使大護軍派主墓祭中郞將派問于禮家依舊壇祀仍爲分譜矣丙申春嶺南僉宗侍慨然乎同宗分譜之意刱玆合譜之論而越三年戊戌春工告訖實是吾宗之大幸然壇墓之義終未歸一長仲二派以寒食墓祀季一派以三吉壇享主墓壇者異其論也合譜系者重其本也不必沒說愚昧不肖猥參校讎之名難圖其不善之責而亦不敢無一辭之贅焉
後孫羽洪謹序
또
무릇 족보라는 것은 세계와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며, 씨족의 역사를 고증하는 것이다.
족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일가들 사이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고, 일가들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조상을 받들어 모시기 위함인 것이다.
진실로 족보를 기록할 때에 그것이 비록 털끝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소홀히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가문의 돈독함을 이루려고 한다면 돈독해 질 수는 없을 것이고, 조상을 공경하려고 한다면 공경해질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전주최씨는 실로 동방에서 저명한 성씨로, 여러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족보가 흩어지고 없어져버렸으므로 나의 7세조 참판공께서 몇 년을 열심히 노력하시어 여러 일가들의 가승을 모으시고 전해오는 기록에서 의심나는 부분을 검증하시어, 문성공을 시조로 삼으셨고, 4파로 나누시었으니, 안렴사공파, 대호군공파, 판사공파, 중랑장공파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종파와 지파의 질서와 소목이 엉클지지 않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사이 세 번이나 족보를 증보 발행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은 참판공께서 처음으로 <강희보>를 만드신 공로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문성공 묘소에 관한 일에 으르면, 전쟁으로 인하여 전해오는 기록이 모두 없어져 버려서 알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오직 기록되어 있기를 “주덕산에 계시다고 한다.”라는 것이 전부이다.
공(公)의 현손 연촌공 묘소 앞에 있는 4기(基)의 고총 아래에 있는 한 큰 묘소를 두고 옛날 노인들이 서로 전해 오기를 “문성공 묘소이다.”라고 하므로, 1796년(정조 20) 4파(派)의 여러 가문 일가들이 묘소에 모여서 발굴 조사를 실시했으나 지석을 발견하지 못하여 “제단을 쌓고 제사를 모시자.”고 합의하여 단제로 시향을 모셔 온지 60여년에 이르렀다.
1854년(철종 5) 안렴사공파와 대호군공파가 “<연촌집>에 ‘참의공(월당공) 묘소를 선영의 뒤편에 장사지냈다.’라고 적혀 있고,
참판공이 만드신 <일권보(강희보)>에 ‘문성공 묘소가 주덕산에 계시다고 한다.’라고 적혀 있고(1),
한 종인 휘 제악의 가문에 전해오는 <동은공가승>에 ‘참의공 묘소는 문성공 묘소 서쪽 위에 계신다.’라고 적혀 있고,
<11권보(가경보)>에서 휘 갑룡 묘소의 기록에 ‘문성공 묘소 아래에 계신다.’라고 적혀 있는 것”을 근거로
[주덕산 사각묘가 문성공 묘소가 확실하므로] 묘제로 시향을 모시자고 처음 제의하였다.
하지만 그것에 대하여 그렇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어서, 사람마다 믿는바에 따라서 묘제와 단제를 각각 따로 모시게 되었는데, 안렴사공파와 대호군공파는 묘제를 주장하였고, 중랑장공파는 예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찾아가서 어찌하면 좋을지 자세하게 물어보고, 그 사람이 가르쳐주는 바에 따라서 옛날에 모시던 그대로 단제를 모시게 되었으니, 결국 족보도 나누어지게 되고 말았다.
1896년(고종 33) 봄 영남에 살고 있는 여러 일가들이, 같은 일가끼리 족보를 나누어 만드는 일에 대해 크게 개탄하면서, 다시 합쳐서 대동보를 만들자고 주장하여, 3년이 지난 1898년 봄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우리 가문에 있어서 크게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단제와 묘제로 나누어 제사를 모시는 것만은 끝내 하나로 합치지 못하였으니, 안렴사공파와 대호군공파는 한식날에 묘소에서 묘제를 지내고, 중랑장공파는 3월 3일에 제단에서 단제를 지내고 있다.
묘제를 주장하고 단제를 주장하는 것은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족보를 합쳐 대동보를 만든 것은 근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주장에만 빠져있는 우매한 불초(저자)가 외람되이 족보를 교정하는 일에 참여하여 해결하기 어려운 책임을 가졌으므로 그 올바르지 못한 일에 관하여 군더더기 한 마디를 보태지 않을 수 없다.
후손 우홍 삼가 서문을 지음
* 각주.
(1) <강희보>에는 문성공 묘소와 관련하여 아무런 기록도 적혀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