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유산 기획㉔ 가야 갑옷, 보물이 되다
철의 왕국 가야의 갑옷
우리는 가야를 흔히 ‘철의 왕국’이라고 부른다. 가야 유적에서 출토되는 철기 가운데 으뜸은 철기 제작기술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갑옷일 것이다.
가야가 삼국과 경쟁하던 시대는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던 시기로, 다양한 무기와 함께 갑옷도 계속 발전했다. 갑옷은 몸을 방어하기 위한 도구 이상이다. 특히 일본이 끊임없이 주장해 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자료이자, 이를 부정하는 결정적 증거로도 활용된다. 가야 갑옷에 숨겨진 이야기를 알아보자.
가야 갑옷,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다
1980년대 초까지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부산 연산동고분군(사적 제539호) 등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대금식판갑옷(가로로 긴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에 주목했다. 그들은 일본 고분시대(4~6세기) 군사력을 상징하는 이러한 판갑옷들이 가야지역에서 확인되는 것은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주요 가야고분군들을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견해는 부정되기 시작했다. 특히 김해 대성동고분군(사적 제341호)과 부산 복천동고분군(사적 제273호)에서는 일본의 대금식판갑옷보다 더 빠른 시기에 제작된 종장판 갑옷(세로로 긴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이 속속 출토됐다. 일본의 판갑옷이 오히려 가야 판갑옷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일본은 대금식판갑옷으로 무장한 보병(도보로 이동하며 싸우는 병사)이 중심이었던 반면, 가야는 이미 비늘갑옷과 투구, 말갑옷, 말머리가리개 등 철갑을 완전하게 갖춘 기병(말을 타고 싸우는 병사)을 활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과는 달리 가야의 전투력이 더 뛰어났던 것으로 밝혀져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정벌했다는 기록은 허구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가야 갑옷, 보물이 되다
지난해 3월 복천동고분군 38호분에서 출토된 철제갑옷 일괄품이 보물 제2020호로 지정됐다. 또 대성동고분군 2호분에서 출토된 갑옷 역시 현재 보물 지정을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이 갑옷들은 보존상태가 좋아 가야시대 갑옷의 모습뿐만 아니라, 제작기술까지 잘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특히 높다.
‘과연 가야 무사들은 이 갑옷을 실제로 입었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해 줄 열쇠가 복천동 38호분 출토 판갑옷의 오른쪽 가슴 부분의 둥근 철판에 숨어 있었다. 이 철판을 엑스레이로 촬영해 보니 화살이나 투겁창 등으로 관통당한 흔적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전쟁 중 파손된 부분을 수리한 후 다시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다른 판갑옷에서도 다양한 수리 흔적이 확인되면서 가야 사람들이 갑옷을 입고 전쟁에 참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가야 사람들은 갑옷에 다양한 장식을 해서 뽐내기를 좋아했다. 새나 동물의 털을 이용한 장식은 갑옷을 입은 사람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갑옷, 가야에서 부활하다
쌍영총 등 고구려의 고분벽화 속에는 철갑 기병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지만, 벽화 속 고구려의 갑옷은 발굴 사례가 극히 적어 실제 모습을 알기 어렵다.
그런데 가야시대 후기의 대표 유적인 고령 지산동고분군, 함안 말이산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등에서는 다양한 갑옷들이 확인된다.
고구려 고분벽화 속 철갑기병의 실제 모습을 가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근무하는 합천박물관에는 매우 귀한 투구와 갑옷이 전시되고 있다.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추진 중인 옥전고분군(사적 제326호)의 최고 지배자 고분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출토된 금동장식 투구와 비늘갑옷, 목가리개 세트가 그것이다. 그 옛날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번쩍번쩍한 황금 투구와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비던 가야국왕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최고의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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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가야유산 기획㉕ 가야의 옛 하늘, 무덤에 새기다
작성2020년 11월[Vol.92] 조회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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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별그림 역사
우리는 오랜 별그림 역사가 있다. 삼국시대 이전 청동기시대에는 고인돌에서 별그림을 살펴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나온 고인돌의 덮개돌에는 ‘성혈(cup-mark)’이라 불리는 홈이 다양한 크기와 패턴으로 새겨져 있다. 일부 고인돌의 홈은 별자리 모양이다. 국내 연구를 통해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묘수(Pleiades cluster), 북쪽왕관자리 등의 별자리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함안에는 별자리 홈이 있는 고인돌이 여럿 있다. 고구려와 고려의 무덤에도 별그림이 많다. 이런 청동기시대의 별그림은 가야로 이어져 한반도의 별그림 역사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가야 무덤 별그림 발견
2018년 함안 말이산 고분군의 13호분을 발굴하던 중 돌덧널무덤을 덮고 있던 뚜껑돌의 안쪽에서 별자리를 새긴 홈이 확인됐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조선총독부가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발굴을 시도한 고분으로 당시 일부가 붕괴되어 절반만 조사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꼭 100년 만에 이뤄진 재발굴 조사에서 가야 별자리가 발견된 것이다.
말이산 고분군은 한반도 남부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아라가야의 대표 유적이다. 별자리가 발견된 13호분은 말이산 고분군 중에서 가장 크고 중앙부의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아라가야 최전성기의 왕묘(王墓)로 알려져 있다. 가야 무덤에서 별자리 홈이 발견된 것도 말이산 13호분이 처음이다. 고분의 상부를 덮은 14매의 뚜껑돌 중 다섯 번째에서 134개의 별자리 홈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다양한 크기로 새겨져 있는데, 여름철 고대 별자리를 표현한 것으로 분석됐다. 현재 동정(同定)된 별자리는 방수(房宿), 심수(心宿), 미수(尾宿), 기수(箕宿)와 두수(斗宿) 등이 있으며, 이들은 현대 별자리로 은하수 주변에 있는 전갈자리(Scorpius)와 궁수자리(Sagittarius)에 해당한다.
가야 별그림의 가치와 의미
지난해 8월에는 함안에서 ‘동아시아의 고대별자리’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가야 무덤에서 나온 별자리의 가치를 되새기는 자리였다. 가야무덤에서의 별자리 발견은 우리 고대 별자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 무덤에서 발견된 별그림으로, 5세기 한반도에서 천문학의 발전과 교류를 연구하는데 새로운 이정표가 된다. 한반도 북쪽의 고구려 무덤과 함께 남쪽에 위치한 가야의 왕묘에서도 별자리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한반도 전역에서 천문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거나 천문교류가 폭넓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야 무덤 별그림은 한반도 남쪽에서 선사시대의 별그림이 역사시대로 어떻게 이어졌는지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활기차고 웅장했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수준 높은 천문 지식과 활동은 여러 사료와 연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함안에서 발견된 가야 무덤 별그림은 고구려 무덤의 별그림이 그려진 시기에 가야에서도 수준 높은 천문학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제 우리는 같은 시기 무덤에 별그림을 남긴 고구려와 가야의 천문학에 대해 함께 연구해 나가야 한다.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서 번성했던 두 왕조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별그림을 무덤에 남기게 되었는지, 그리고 두 왕조의 천문교류에 대한 궁금증 역시 풀어 나가야 할 것이다.
글 양홍진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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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가야유산 기획㉖ 가야고분에 묻힌 로만글라스
1991년 7월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옥전고분군의 네 번째 발굴조사가 경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시작됐다. 이때는 지름 20m 대형 봉토를 갖춘 M1호분과 M4호분 등이 대상이었고, 필자는 M1호분 조사를 맡았다. M1호분은 이미 두 번째 발굴조사 때 조사하려 했지만, 원로 학자들의 권고에 따라 다음 기회로 미뤄졌었다.
도굴, 후회 그리고 발굴
그런데 1991년 봄 M1호분이 도굴범들에 의해 무참하게 훼손되고 말았다. 옥전고분군이 세계유산등재 대상으로 거론되고, 1987년 두 번째 발굴조사 때 M3호분에서 왕과 왕족의 무덤에서만 발견되는 유물들이 쏟아지면서 옥전고분군의 남은 고분들이 도굴범들의 표적이 된 결과였다.
우리는 과거 발굴조사를 중단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주인공이 묻힌 중심 곽의 중앙부가 집중적으로 도굴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땅을 칠 수밖에 없었다. 후회와 안타까움을 뒤로한 채 M1호분의 매장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주인공의 발치 쪽에서 허리띠 장식과 말갖춤 3세트, 철제 말갑옷과 말투구 등 최고급 유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가야고분에서 로만글라스를 찾다
그러던 어느 날 필자의 눈을 의심케 하는 물건(?)이 드러났다. 발치 쪽에서 삼각형의 조그마한 유리조각을 발견했다. 필자는 너무 놀라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가야고분에 웬 유리조각인가? 도굴범들이 버린 음료수 병 조각인가? 아니면 M1호분의 도굴구덩이에서 확인된 일제강점기의 유리병 조각 같은 것인가?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당시까지 가야고분에서는 고대의 유리용기가 나오지 않았다. 이를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었던 필자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굴장소와 전혀 다른 곳에서 나왔다는 확신이 들자 곧바로 교수님께 알렸다. 교수님 역시 무척 놀란 표정으로 곧장 유리조각을 관찰하시고는 유리용기인 로만글라스(Roman glass)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유리조각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첫 발굴자인 필자로서는 유리조각이 로만글라스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다. 혹시 유리조각 근처 말갑옷에 나머지 조각이 있지 않을까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말갑옷을 출토상태 그대로 통째로 떠서 박물관으로 가져갔다.
이후 말갑옷을 감싼 우레탄 폼과 화선지를 하나씩 제거하면서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환호성이 박물관 전체에 울려 퍼졌다. 푸른색의 반점문이 장식된 로만글라스가 깨어진 채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환호성과 흥분도 잠시 우리는 로만글라스 조각 하나 하나를 씻고 말려 붙였더니 담녹색을 띠는 반구형 몸체에 아래 위 2단으로 푸른색의 반점문이 장식된 완벽한 로만글라스가 드러났다. 1500년 전 가야고분에 묻혔던 로만글라스가 세상의 빛을 다시 보는 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 품에 안긴 옥전고분군의 로만글라스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실에 전시돼 있다. 로만글라스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경남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고대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고고자료로서, 지금도 당당한 모습을 뽐내고 있다.
옥전 M1호분 로만글라스 출토 모습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전시도록 / 1991년 7월 M1호분 발굴당시 모습
로만글라스(Roman glass)란?
기원전 2000년 이전부터 인간이 유리를 발명했다. 대량 생산은 기원 전·후로 동지중해 지역에서 ‘대롱 불기’라는 획기적인 기술이 개발되면서 가능해졌다.
특히 로마제국의 확장과 함께 세계로 전파됐는데, 이러한 유리용기를 로만글라스로 부른다.
가야고분에서는 단 2점이 전부. 김해 대성동(91호분)의 푸른색 로만글라스 손잡이 조각은 4세기 금관가야, 옥전 M1호분 로만글라스는 5세기 후기가야(다라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글 류창환 극동문화재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