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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6장 11-15절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⑦ : 여섯째 간구
지난 시간 우리는 죄 용서에 관해서 살펴보았지만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런 용서함을 받은 자의 마땅한 자리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면 그 은혜에 대한 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이 뭐냐? 열매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마지막 간구로서 13절에 보시면 이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그러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마땅히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하지만 시험의 문제가 있다고 말함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시험을 통해 악에 빠지는 일이 있기 때문에 그런 악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이 마지막 간구입니다.
일단 시험의 문제부터 우리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마태복음 4장에서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시험이란 무엇인가 했을 때 일반적으로 시험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으로부터 오는 시험으로 구분을 합니다. 소위 영어로 ‘test’[테스트]와 ‘temptaton’[템테이션]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사실 성경 자체로서는 그런 언어적인 구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시기 위해서 시험하시는 경우가 있고, 또 사탄이 우리의 신앙을 흔들기 위하여 시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전자의 경우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인내를 만들어 내고 또한 그것으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목적의 시험이라면(약1:3-4), 후자의 경우는 자기 욕심에 끌려 죄와 맞물려서 있는 그런 시험입니다(약1:14-15). 성경에 있는 실례로 하자면 전자의 경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의 예로 들 수 있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사탄이 욥을 시험하고자 한 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욥의 시험의 경우 하나님께서 시험하신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사탄이 시험하지만 하나님의 의지 밖에서 시험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인데, 우리가 구분하고 있는 일반적인 구분을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 그리고 사탄으로부터 오는 시험을 구분할지라도 근원적인 성격에 있어서는 어떤 시험도 하나님의 의지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사탄의 시험이라 할지라도 사탄이 하나님의 의지 밖에서, 자기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비록 사탄이 우리를 시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는 그런 시험의 목적이 우리를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앙의 정도를 돌이켜 보게 하시며 또한 순종의 여부를 확인하여 자라게 하시는데(이하 웨스트민스터 총회 공과 참고), 순종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복을 소망하게 하십니다(약1:12). 그러나 불순종할 때에는 우리가 책망을 받기도 하는데, 다만 그 방향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더욱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게 하시는 방향으로 있습니다(벧전4:12-13, 시51:12).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순종만이 아니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계획과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순종케 하시는 것을 통해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와 거룩함을 열매로 누리도록 하시지만, 불순종할 때는 믿음에 기초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께 다시 나아올 수 있는 은혜도 예비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모든 시험의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시험은 로마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롬8:28). 모든 시험이 하나님 편에서는 선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하나는 야고보서의 말씀과 관련해서입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시험을 구분할 때 하나님의 시험, 사탄의 시험을 말하고 또 그런 시험에 대해서도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의지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이 시험과 무관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방향에 있어 죄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로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죄와 악을 부추김으로써 시험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야고보서 1장 13절 앞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험의 문제를 분명 언급하고 있습니다. 2절에 의하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2절에 의하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물론 야고보서 자체에서 하나님께서 시험하신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성경에 의하면 분명 하나님께서 시험하신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지식을 갖춘 사람은 하나님의 의지 밖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도 없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서 1장 2절이나 12절에서 말하는 시험은 하나님의 의지 안에 있는 시험이 분명하고, 그런 시험에 대하여 기쁘게 여기라,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라는 것은 이후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것처럼 자기 욕심에 끌려 죄악으로 치닫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약1:14). 하나님이 시험하신다고 할 때 그런 죄악된 방향을 목적으로 한 시험이 있는가? 없습니다. 특히 야고보서 1장 16절과 17절을 보시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모든 것은 바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라는 겁니다. 시험을 통해 죄가 아니라, 시험을 통해 온갖 좋은 은사 그리고 온전한 선물을 주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모든 시험이 선을 목적으로 한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굳이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를 할 필요가 있는가? 다시 말해 사탄의 시험도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위한 것이요, 그리고 불순종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식으로서 역사하신다면 굳이 이 기도가 필요한가 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수단 없이도 일하시지만 수단을 통해서도 일하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기도하지 않으면 일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기도라는 방편을 통해 일하기도 하십니다. 다만 기도보다 앞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불변의 사실로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뜻에 대하여 우리가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도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명하셨다면, 기도라는 방편을 통해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를 물을 수 있는가? 사실 이런 물음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더불어 질문을 보면 결과가 선하다는 것 때문에 시험을 통한 죄가 정당화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은 마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롬5:20)는 말씀으로 은혜가 넘치도록 하기 위해서 죄에 거할 수 있다고 보는 논리와 같습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사탄의 시험도 괜찮고, 불순종도 괜찮다”, 심지어 앞선 기도에서처럼 죄에 대하여 회개할 수 있기 때문에 “회개하면 된다”는 생각은 우리의 구속의 방향과 목적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죄에 대하여, 불순종에 대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회개를 통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회개케 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회개할 수 있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면 구속의 목적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방향,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방향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회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시험에 대하여 넘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언제나 거룩을 향해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넘어지는 경우는 있을지라도, 넘어져도 회개하면 괜찮다는 생각이 죄에 대하여 무뎌지는 방향으로 있다면 그것은 성경이 결코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시험이라고 할 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실행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험과 사탄의 시험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그런 구분은 분명 그 목적과 방향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모든 뜻과 의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타난 뜻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방향으로 있기 때문에 그런 거룩을 위해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며, 악으로 치닫지 않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는 모든 시험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몇몇 요리문답을 통해 그 내용을 살펴보자면, 먼저 제네바 요리문답(289)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간구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로 악에 빠지지 말게 해 주시라고 간구하는 것이며 우리가 악마에 의해 그리고 우리를 거스려 싸우는 육신의 악한 욕정에 의해 정복당하지 않게 해 주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롬7:23).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손으로 붙들어 주시고 보호해 주심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해 주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06문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기도의 여섯째 간구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주기도의 여섯째 간구(즉,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에 이르는 시험 당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거나, 우리가 시험 당할 때에는 우리를 붙드시고 구원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는 우리 자신을 좀 더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는 말이 덧붙여져 있는데, 127문에 보면 “여섯째 간구는 무엇입니까?”에 대해 이렇게 답변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인데, 이는 “우리가 너무 연약하여 우리 자신만으로는 한순간도 설 수 없사오며, 더욱이 우리의 철천지 원수인 마귀와 세상과 우리 자신의 육신이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오니, 주의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존하시고 강건케 하사, 이 영적 전쟁에서 굴복하지 않고,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얻기까지 언제나 강건하게 대항하게 하시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중생자라 할지라도 인간이란 존재는 매우 연약하여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시간 죄 문제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 드렸지만, 죄 문제가 해결된 사람, 즉 중생자에게 있어서는 시험을 통해 죄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 그 스스로의 능력에 의해서인가? 다시 말해 중생 이전에는 전적인 무능력을 말할 수밖에 없다면, 중생 이후로는 우리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은총의 도움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가? 성경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고 말씀합니다. 비록 중생하였을지라도 우리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없으며, 혹 은총의 도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은총이 50%, 내 의지가 50% 이런 식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란 요한복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연약함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의지에 대한 우리의 고백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유익함을 얻으리라 생각되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9장 자유의지에 관한 고백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항.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의지에 본래적인 자유를 부여해 주셔서, 강요를 당하거나 어떤 절대적인 필연성에 의해서 선이나 악을 결정하지 않게 하셨습니다(마17:12, 약1:14, 신30:19).
2항. 사람이 무죄한 상태에서는 선을 바라거나 행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전7:29, 창1:26), 변하기가 쉬워서, 타락할 수도 있었습니다(창2:16,17, 3:6).
3항. 타락하여 죄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구원을 수반하는 영적인 선을 향한 모든 의지의 자유를 전적으로 상실하고 말았습니다(롬5:6, 8:7, 요15:5). 그러므로 자연인은 그 선과는 전혀 등을 돌리고 있고(롬3:10,12), 죄 가운데 죽어 있기에(엡2:1-5, 골2:13), 자신의 힘으로는 스스로를 돌이키거나 돌이키기 위한 준비를 할 수가 없습니다(요6:44,65, 고전2:14, 엡2:2-5, 딛3:3-5).
4항.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개시켜서 은혜의 상태로 바꾸어 놓으실 때에는 죄 아래 있는 그의 자연적인 굴레에서부터 자유롭게 하십니다(골1:13, 요8:34,36). 그리고 오직 그의 은혜만을 통해서, 영적으로 선한 것을 자유롭게 바라고 행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빌2:13, 롬6:18,22). 그러나 사람은 남아 있는 자기의 부패함 때문에 선한 것을 완전하게 행하지도 못하고 바라지도 못할 뿐 아니라, 악한 것을 바라기도 합니다(갈5:17, 롬7:15,18,19,21,23).
5항. 사람의 의지는 영광스러운 상태에서만, 오직 선을 향해서 완전하고도 불변하게 자유롭습니다(엡4:13, 히12:23, 요일3:2, 유24).
여기 보면 의지와 관련해 타락 이전의 의지(2항)와 타락 이후의 의지(3항), 그리고 타락은 했지만 중생한 상태의 의지(4항)와 영광스러운 상태에서의 의지(5항)를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타락하기 이전에는 인간이 선을 바라거나 행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은 그런 자유와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전적 무능력인 것입니다. “선을 향한 모든 의지의 자유를 전적으로 상실하고 말았다. 자신의 힘으로는 스스로를 돌이키거나 돌이키기 위한 준비를 할 수가 없다.”
그럼 중생한 자들은 어떤가? 분명 죄책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은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롬8:2). 그러나 자유함을 얻었다고 해서 나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은총의 도움을 받되 일부는 은총, 일부는 내 힘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것처럼 “오직 그의 은혜만을 통해서, 영적으로 선한 것을 자유롭게 바라고 행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영적인 선을 자유롭게 바라고 행하도록 하는데, 오직 은혜만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빠지거나 혹은 그 은혜가 일부라고 생각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영적으로 선한 것을 자유롭게 바라고 행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선한 것을 자유롭게 바라고 행할 수 있다는 표현은 분명 능동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에서는 “중생한 사람은 수동적으로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도 선을 선택하거나 행한다”는 표현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제9장). 그러나 이때도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빠진 능동이라고 보시는 안 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실 뿐,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마치 우리가 한 것처럼 여겨주실 뿐 실제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 없이는 능동이라는 표현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표현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은 수고를 했지만, 그것조차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전적인 부정이었던 겁니다(고전15:10).
제2 스위스 신앙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수동적으로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도 선을 선택하거나 행한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중생한 사람에게 결점이 남아 있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자유의지는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 아담의 흔적과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는 인간성의 부패함 때문에 연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육체의 욕망과 옛 아담의 흔적이 제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사역을 전적으로 무효화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신실한 자들은 자유하다고 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제9장 4항 마지막 부분에서 “남아 있는 자기의 부패함 때문에 선한 것을 완전하게 행하지 못하고 바라지도 못하며, 오히려 악한 것을 바라기도 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중생자라 할지라도 인간의 자리가 정확하게 어디인지를 잘 알려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생했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다가 아닙니다. 선을 행하더라도 여전히 점과 흠이 있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선을 바라지도 못하는 것이 중생자의 모습입니다. 오히려 악한 것을 바라는 것이 중생자들의 모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안에는 여전히 부패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연약하다는 것은 뭐냐? 할 수는 있지만 뭔가 모자란 것이 아닙니다. 뭔가 모자라기 때문에 어떤 도움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그런 뜻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연약함입니다. 때문에 연약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의 일부가 있다는 의미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홀로 행하시며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도움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도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한명 보다는 두 명이라는 협력의 개념으로 도움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도움은 결코 협력이 아닙니다. 네게 부족함이 있으니까 내가 부족한 만큼 더하여 주겠다는 의미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홀로’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라는 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잘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연약하여 한 순간도 우리 스스로 설 수 없지만, 그래서 혹 사탄의 유혹과 또한 우리 욕심에 미혹되기가 쉽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그런 시험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구하는 기도입니다.
참고로 제네바 요리문답(290)에 보면 앞서 살핀 문답 이후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묻는데, 시험에 들지 않는 것과 악에서 구해지는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한 순간도 우리 스스로 설 수 없지만, 그래서 사탄의 유혹과 우리의 욕심에 미혹되기 쉽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그런 시험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제네바 요리문답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통치해 주셔서 우리로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며 당신의 공의를 따르고 죄를 피하도록 만들어 주실 때 그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악마와 죄와 육을 제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 스스로는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럼 협력인가? 협력도 아닙니다. 성령의 전적인 통치가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지 않게 하며, 시험 가운데서도 이길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로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구해 주옵소서”라는 기도도 덧붙이고 있는데, 시험에 들게 않도록 기도하는 것은 결국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시험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악에 빠지지 않도록 구하는 것이 마지막 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악이라고 할 때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물리적인 악과 윤리적인 악으로 구분하고, 우르시누스에 의하면 형벌의 악과 죄책의 악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니까 물리적인 악은 죄에 대한 공의의 형벌로서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환난과 같은 내용입니다. 반면 윤리적인 악은 죄와 관련된 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죄의 저자가 아니라고 할 때 그것은 윤리적인 악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물리적인 악에 대해서는 저자요, 주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장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8장 8절에 보면 이 두 가지 악에 대한 실례를 볼 수 있는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한글 성경은 ‘악’과 ‘재앙’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원문에 의하면 기본형이 동일한 단어로 ‘악’([r'[라])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나 전자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악으로서 윤리적인 악이라면, 그런 악에 대하여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신다는 의미에서 재앙, 즉 후자의 악은 물리적인 악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는 일차적으로 윤리적인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죄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는데,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과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가 이런 면에서 같은 의미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윤리적인 악에서만 구해 달라는 것인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물리적인 악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비록 공의의 형벌로서 환난과 같은 것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해서 모든 환난에서 건져 주십사 분명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는 윤리적인 악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악도 다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책의 악만이 아니라 형벌의 악에 대해서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한 시험, 그래서 죄를 짓도록 만드는 시험에서만 건져주시도록 구하는 것이 아니라, 혹 죄악에 빠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에 힘입어 형벌로서 가해지는 그런 악에 대해서도 구해주기시를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기에 앞서 시험과 관련하여 이미 살핀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한 내용을 다시금 상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가장 먼저 시험한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주리셨기 때문에 인성으로서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때였습니다. 게다가 신성으로서는 충분히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드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을 했던 겁니다. 두 번째 시험은 무엇입니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지켜 보호하시지 않겠느냐는 시험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줄 테니 나에게 경배해 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시험은 예수님께만 있었던 시험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는 시험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씀하십니다(벧전5:8). 의식주로서 시험하시도 하며, 건강과 명예와 권세 등으로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마치 세상이 있는 어떤 것도 다 줄 수 있는 것처럼 유혹하기도 합니다. 참된 하나님 지식 그리고 그 지식으로 말미암은 참된 믿음을 빼앗을 수만 있다면 부와 명예, 능력과 건강, 그리고 이적과 부흥, 성장 등 그 무엇도 아까지 않겠다는 것이 이미 예수님을 시험하는 성격에서 다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여기에 넘어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지만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사탄이 어떻게 유혹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마치 인색한 분이신 것처럼 그렇게 유혹을 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식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고, 또한 건강과 명예, 권세에 있어서도 그렇게 유혹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남아 있는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선보다는 악에 더 빠지기 쉬운 그런 모습으로 있습니다. 앞서 연약하다는 말을 했지만 그만큼 우리 스스로는 사탄의 시험을 이겨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인색한 분으로 여기지 않도록 우리의 모든 생각을 땅에서 하늘로 끌어 올려야 합니다. 대부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인색하다고 여기는 것은 땅의 것으로 비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고자 하시는 것은 땅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앞서 야고보서 1장의 내용 속에서 16절과 17절을 언급했지만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어디로부터 오는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고 말할 때 그분의 속성에 합당한 것을 주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땅의 변하는 것을 주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하늘의 것을 주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바라느냐? 땅의 것을 바랍니다. 즉 우리 욕심에 이끌려 우리 스스로를 시험에 던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면에서 우리는 더욱 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아니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모습으로 이끌림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세워지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의 말씀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아무리 험한 시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주시는 것이고, 또한 감당케 하도록 분명 붙들어 주실 것이라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십니다(사42:3).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죄와 사망의 법에 얽매이지 않도록, 오히려 하나님께 대하여 참된 순종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성령의 법으로 즐거워하며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도록, 나아가 자족함을 배워 경건에 유익이 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