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절 *
일상화된 조직생활
|
오늘날 북한주민은 누구나 일생동안 “북한식 가치관”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전에 인민학교라 부르던 소학교 시절 소년단에 입단하기 전부터 숨이 붙어 있는 날까지 일상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조직생활을 통해 “북한식 가치관”을 반복하여 학습해야 한다. 북한주민의 조직생활은 그 특유의 가치관을 확대재생산하는 기제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북한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 조직생활이란 곧 자신이 ‘사회정치적 생명체’로서 살아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북한주민들은 조직생활에서 이탈된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고 육체적 생명은 살아있어도 사회적으로는 죽은 것과 같은 상태로 인식한다. 주민들은 그런 평가를 받기 싫다는 이유만으로도 조직생활에 열성적으로 참가하게 마련이다.
실제적인 측면에서도 조직생활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는 있다. 무엇보다도 조직생활에 열심히 참가하지 않으면 조직의 다른 구성원에게 집단적으로 ꡐ모서리ꡑ 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행을 가려고 하거나 이사를 해야 할 때, 하나의 조직에서 다른 조직으로 옮겨 갈 때, 조직생활 평정에 따라 조직의 책임자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각종 증명서를 발급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이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북한주민들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조직생활은 싫어도 늘 충실하게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며 이 대열에서 빠진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로 여긴다.
1. 소년단 입단과 청년동맹 가맹
북한주민의 조직생활은 사실상 유치원 시절부터 시작된다. 11년제 무료의무교육제도에 따라 유치원 높은 반부터 누구나 다 집단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북한체제가 인정하는 기본조직에 들어가 본격적인 조직생활을 하는 것은 만 7세 이후 조선소년단에 입단할 때부터 시작된다.
소년단에 들어가는 절차를 입단이라고 하는데 입단 준비를 시작한 지 1년 안에 모든 아이들이 다 입단하게 되지만 그 아이들이 한꺼번에 입단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소학교 입학 이후 2학년까지 생활하면서 공부를 잘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집안성분이 좋은 학생들이 먼저 추천을 받아 시험절차를 거쳐 합격을 하면 입단식을 거행하게 되는 것이다. 입단식을 하는 날은 대체로 북한당국이 사회주의 명절로 내세우는 2월 16일과 4월 15일, 소년단 창건기념일인 6월 6일 등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당연히 일정한 기간 동안 같은 학급 안에서 먼저 입단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가 같이 지내게 된다. 대체로 먼저 입단식을 한 아이들은 자랑스러워하는 반면 늦게 입단하는 아이들은 친구를 시샘하여 심술을 부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먼저 입단하는 아이들의 경우, 입단식 자체도 거창하게 진행하는데 많은 사람을 모아 놓고 소년단 깃발 앞에서 선서를 하고 입단맹세를 받아 읽게 한 뒤 붉은 넥타이와 휘장을 달아주는 행사를 갖는다. 이 자리에는 시․군의 간부들을 포함하여 항일 빨치산 운동이나 다른 일로 훈장을 많이 받은 노인들이 참가하여 입단하는 아이에게 직접 붉은 넥타이를 매어 주면서 자부심을 불어넣기도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먼저 입단하는 아이들은 이제 자신은 사회의 기본조직에 들어갔으며 앞으로는 공부만 잘 할 것이 아니라 조직생활을 잘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반면 나중에 입단하는 아이들의 입단식은 상대적으로 간략하게 치르고 넘어간다.
소년단에 입단하고 난 뒤에는 학급생활도 조직적으로 운영한다. 한 학급에서 조직생활을 지도하는 학생 간부는 분단위원장과 조직담당부위원장, 사상담당부위원장 등이 있다. 소년단 조직은 학생들이 토끼 기르기, 농촌일 돕기, 자갈 모으기, 파철과 폐휴지 모으기 등 과외활동을 할 때 기본적인 단위가 된다. 학교 소년단위원회는 학급 소년단위원을 통해 각 학급별로 이와 같은 과업을 수행할 것을 지시한다. 또 토요일을 소년단의 날로 정해 놓고 분열행진을 하고 학급별 생활총화도 진행한다. 소년단 생활은 소학교를 졸업하고 만13세가 될 때까지 이어진다.
만14세가 되면 누구나 다 붉은 넥타이를 풀고 청년동맹에 가입하게 된다. 청년동맹은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의 약자로서 예전에는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이었는데 1996년에 그 명칭이 지금과 같이 바뀌었다. 청년동맹에 가입하는 것도 소년단 입단과정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복잡하고 까다롭다. 북한당국이 청년동맹을 노동당의 후비대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청년동맹에 가입할 때에도 소년단에 입단할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학급의 추천을 받아 학교 단위인 초급단체의 심의를 거치지만 그 다음 단계로 시․군 청년동맹 학생부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여기서 합격을 해야 최종적으로 소년단의 표식인 붉은 넥타이를 벗고 청년동맹 가맹식을 거쳐 맹원증을 받을 수 있다. 맹원증을 받을 때 학생들은 이것이 자신의 육체적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 사회정치적 생명을 나타내는 표식이라는 점을 인식하도록 교육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은 맹원증을 받을 때부터 물에 젖거나 훼손되지 않게 비닐 등으로 잘 싸서 지갑에 넣은 뒤 늘 허리에 차고 다닌다는 것이다.
소년단과 학교별 청년동맹에 소속하여 조직생활을 하는 학생들의 경우 담임교사의 영향력도 크지만 무엇보다도 시․군 청년동맹위원회의 지시를 받아서 학생들이 어린 시절부터 노동당의 이념을 철저하게 따르면서 그 방침을 수행하도록 교육하는 지도원의 평가를 좋게 받아야 한다. 지도원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회와 학습회, 생활총화, 이야기모임, 꼬마계획 등 조직생활을 책임지고 지도하면서 아이들이 졸업할 때 평정서에 최종적인 서명을 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필요한 각종 증명서를 발급해 주는 역할을 한다. 학생들은 지도원을 통해 노동당에 충성을 다하는 자세로 조직생활을 해야 한다는 점을 철저히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2. 노동당과 근로단체 조직
중학교 4학년이 되는 만 14세 이후 30세까지 해당조건을 갖춘 사람은 누구나 청년동맹에 가입해서 조직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데 만 18세 이후에는 자격을 갖춘 사람에 한해 까다로운 심사과정을 거쳐 노동당에 입당할 수 있다. 노동당에 입당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1년 동안 후보당원 기간을 거쳐야 한다. 후보당원 기간이 끝날 무렵, 심사과정을 거치는데 이 때 합격하지 못하면 다시 1년 간 후보당원으로 지내야 한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웠거나 김일성과 김정일 두 사람의 눈에 뜨이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의 경우에는 화선입당(火線入黨)이라 하여 후보당원 시절을 거치지 않고 바로 노동당에 입당하는 사례도 있다.
일반적으로 노동당에 입당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입당 보증인을 구하는 일이다. 이 때 보증을 선 사람은 나중에 피보증인이 당원생활을 하면서 과오를 범한다면 문책을 당하게 된다. 심한 경우에는 노동당에서 쫓겨나는 출당조치를 당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보증을 서는 사람은 몸을 사리게 마련이고 성분이 나쁘거나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을 위해 보증을 서지 않으려 하게 된다. 결국 입당하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기꺼이 자신을 위해 보증을 서 줄 후견인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화선입당을 하는 사람은 보증인을 구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으니 북한사회의 관습을 기준으로 할 때 대단한 특혜를 누리는 것이다.
18세 이후 노동당에 입당하여 당원이 된 사람은 청년동맹에서 노동당 조직으로 옮겨가게 된다. 여자들은 입당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결혼을 하고 직장에 나가지 않은 채 전업주부가 되려면 나이와 관계없이 조선민주여성동맹으로 소속을 옮겨야 한다. 한편 30살이 넘도록 당원이 되지 못한 근로자와 농민들은 각자의 직업에 따라 조선직업총동맹과 조선농업근로자동맹으로 그 소속을 옮겨서 조직생활을 해야 한다. 조선민주여성동맹과 조선직업총동맹, 조선농업근로자동맹은 각각 여맹, 직맹, 농근맹 등으로 줄여 부른다.
한 직장에 근무하는 노동당원은 5~30명 단위로 당 세포를 구성하고 세포비서의 지도 아래 철저한 조직생활을 한다. 당 세포는 노동당의 최말단 기층조직으로 당의 조직생활과 정책 수행의 최소단위라는 의미를 지닌다. 한 직장에 당원이 5명도 안 되면 별도의 세포를 구성하지 않고 주변의 다른 세포에 속하게 하거나 두 개 이상의 직장을 묶어 하나의 세포를 만들기도 한다.
직맹과 농근맹, 여맹의 조직생활은 당 세포의 조직생활만큼 강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직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근로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소속에 따라 노동당과 청년동맹, 직맹의 구성원으로 별도의 조직생활을 하게 된다. 농촌의 경우에는 당원과 청년동맹 맹원이 아닌 사람들은 농근맹의 맹원으로 조직생활을 해야 한다.
조직생활이란 크게 강연회와 학습회, 생활총화 등으로 나누어진다. 강연회란 노동당의 유일사상 체계를 튼튼하게 세우고 당의 정책을 철저하게 관철하기 위한 선전선동사업으로서 일반적으로 수요일 저녁 문화의 날 행사를 할 때 실시하는 경우가 많아ꡐ수요강연회ꡑ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학습회는 대상별 수준에 맞추어 간부반과 당원반, 근로자반으로 나눈 뒤 다시 당원반과 근로자반은 높은 반과 낮은 반으로 구분하여 노동당의 정책과 김일성-김정일 두 사람의 ꡐ교시와 혁명노작ꡑ 등을 공부하는 과정이다. 학습과정안 하나를 마치면 각 학습반에서는 그 반에 소속한 사람들이 얼마나 학습했는지 알아보는 학습총화를 실시한다. 한편 생활총화는 대체로 1주일에 한 번 실시하는데 한 주일 동안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면서 결점과 과오를 스스로 비판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한 뒤 개선할 점을 찾는 모임을 말한다. 생활총화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하는 지침은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 10대원칙」을 비롯하여 김일성-김정일이 지시하거나 지적한 ꡐ교시ꡑ 및 ꡐ말씀ꡑ 자료의 내용이다.
노동당과 청년동맹, 여맹, 직맹, 농근맹 중에서 사회적 위상이 가장 높은 단체는 물론 노동당이다. 노동당을 제외하면 청년동맹의 위상이 다른 단체보다 높다. 그 이유는 청년동맹 맹원들이 앞으로 당원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 직맹과 농근맹 맹원들은 ꡒ그 나이가 될 때까지 입당도 하지 못한 채 사람구실을 제대로 못하는ꡓ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3. 인민반의 가두조직
북한주민은 소학교 시절 소년단에 입단한 이후에는 ꡐ죽을 때까지ꡑ 조직생활에서 빠질 수 없다고 한다. 연로보장이라고 하는 정년퇴직을 신청했거나 가두여성이라고 부르는 전업주부처럼 집에 머무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조직생활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동네의 인민반과 여맹위원회에서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직생활을 지도하게 된다.
대체로 20~40세대가 1개 인민반을 구성하는데 도시에서는 아파트 한 동에 70세대가 살아도 이들이 전부 1개 인민반에 소속하는 경우도 있다. 인민반 구성원 중에서 직장에 나가지 않는 당원들이 있으면 이들은 세포를 만들어 당 조직생활을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인민반에서 세포를 구성하는 당원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 연로보장을 신청한 나이든 당원이나 가두여성 중에서 드물게 입당한 여성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한편 당원이 아닌 노인들은 인민반 내에서 노인분조를 만들어 조직생활을 하고 대다수 가두여성들은 여맹의 지도를 따라 강연회, 학습회, 생활총화는 물론 인민반 활동에도 참여해야 한다.
인민반은 동(리)사무소의 지시를 받아 학습회나 강연회를 조직하고 각종 사회생활을 지도하기도 한다. 사회생활이라고 하면 각 인민반별로 ꡒ뭐 바쳐라, 어디 동원 나가라ꡓ 할 때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 한 마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민반의 구성원이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 아이들은 학교에서 조직생활을 하고 세대주인 남자들은 각각 소속된 직장에서 노동당이나 근로단체의 구성원으로 활동을 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과업은 대체로 전업주부인 가두여성이 수행해야 할 몫으로 남게 된다.
최근에는 인민반장과 동사무소의 지시를 거부하고 이런 과업을 부과할 때 수행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일부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런 예외적인 현상을 제외하면 아무리 귀찮아도 과업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과업을 수행하지 않으면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거나 1년에 한 번씩 식량공급대상자 명단을 정리할 때 반드시 인민반장과 동사무소에서 확인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그 서명을 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근래에 들어와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과업을 수행하는 대신 일정한 금액의 돈으로 대신 내는 경우도 생겨난다고 한다.
4. 평정서 및 신원문건
평정서란 의무교육을 시작하는 유치원 높은반이 될 때부터 개인별로 작성되는 문서를 말하는데 이 문서에는 그 사람의 할아버지 때부터 출신성분과 조직생활에 참여한 정도, 평소의 행실 등을 기록해 놓는다고 한다. 또한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 행동을 했는지 적어 놓고 그런 말과 행동을 하게 된 주변상황과 증거물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해 놓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조직생활을 충실하게 하지 않거나 직장에 출근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범죄를 저지르다가 걸렸을 때, 윗사람에게 대들었을 때 등 특별한 사안이 발생하면 상부기관에서 그 사람이 속한 조직에 평정서를 작성하여 제출할 것을 지시하게 된다. 이 경우 그 사람이 당원이면 당 조직에서, 근로단체나 청년동맹 조직이면 해당조직에서 책임자가 주변의 의견도 듣고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종합하여 평정서를 작성해서 상부기관에 보낸다. 그 사람이 예전에 잘못한 일이 없고 처음 발생한 일이라면 상부기관에서 좀더 두고 보지만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 출신성분과 평소의 행동을 감안하여 잡아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북한주민은 누구나 자신의 평정서에 어떤 내용이 기록될 것인가 하는 점에 관심을 갖고 언제나 조심해서 생활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며 살아간다. 기본적으로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조직을 옮겨 갈 때마다 그 사람의 평정서도 함께 따라다닌다. 특히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이나 군대, 직장으로 옮겨 갈 때 청년동맹의 지도원이 평정서에 어떤 내용을 기록하는가 하는 점에 따라 평가기준이 달라진다.
그러나 평정서의 내용이 나쁘다고 하더라도 현재 있는 곳에서 일을 잘 하고 충성심을 표현하기만 하면 일반적으로 크게 문제를 삼는 경우가 많지 않다. 다만 김일성-김정일의 유일사상체제를 위배하는 행위를 한 내용이 평정서에 기록될 경우는 일생동안 영향을 받게 된다.
평정서와 함께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성 주민등록과에서 보관하는 신원조회 문건도 중요하다. 신원조회 문건은 대학에 입학하거나 군대에 입대할 때, 당기관이나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성, 내각 산하의 간부로 등용될 때 반드시 따라다닌다. 일반적으로 간부를 등용할 때 평정서보다 신원조회 문건의 내용을 더 중요하게 평가하기 때문에 소위 "토대가 나쁘거나 성분이 걸리는 사람"은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제 2 절
명절과 세시풍속
일상화된 조직생활과 함께 오늘날 북한주민들이 이른바 “북한식 가치관”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로 북한의 명절 풍습을 들 수 있다. 해가 바뀌면 북한주민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발표한 공동사설의 전문을 외우거나 그 내용을 받들어 모신다는 의미로 궐기대회를 하는 일로 분주하다. 곧 이어 북한에서 “민족 최대의 명절”로 대접하는 2월 16일과 4월 15일을 위해 김정일화와 김일성화 가꾸기 운동을 벌여야 한다. 북한정권을 창건한 9월 9일이나 노동당 창건 기념일인 10월 10일도 중요한 명절이기 때문에 그 전후로 큰 행사를 조직해야 한다. 그 이외에 김일성과 김정일 두 사람의 행적을 따라 각종 현지지도와 담화 및 교시 발표 몇 돌을 기념하는 행사로 시간을 보낸다. 이런 행사가 모두 직장과 학교 이외에 자신이 소속한 조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북한주민이라면 누구도 그 행사에 참여해야 한다.
분단 이후 북한당국이 주도하여 사회주의 생활양식을 적극적으로 보급해 온 결과 명절을 쇠는 방식은 많이 달라졌다. 남쪽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조상들의 생활방식을 이어받아 음력설과 추석을 민족 최대의 명절로 여긴다. 해마다 음력설과 추석이 되면 고향집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로 민족 대이동을 경험하느라 전국의 도로는 차량으로 뒤덮여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2월 16일과 4월 15일을 민족 최대의 명절로 대접한다.
북쪽에서는 1960년대 후반 이후 몇 십 년 동안 양력 1월 1일을 “기본 설명절”로 지키면서 음력설은 명절로 대접하지도 않았다. 1980년대 후반에 음력설을 비롯한 민속명절을 되살려 하루 휴식일로 지내다가 2003년 음력설을 앞두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양력설 대신 음력설을 “기본 설명절”로 지키게 되었다. [노동신문 관련기사를 그림으로 넣어 주세요]
결과적으로 남북한의 명절 풍습은 상당히 달라졌다. 새해 첫 날을 전후하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인사를 나누는 남쪽 사람에게 “새해를 축하합니다” 하는 북쪽의 인사말은 낯설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손님을 맞이하던 음식점도 음력설이나 추석날이 되면 모두 문을 닫는 것에 익숙해진 남쪽 사람에게 평소에는 문을 닫았던 음식점도 명절날이 되면 문을 열고 “명절음식을 만들어 봉사하는” 북한의 풍습도 색다르게 느껴지는 모습이다.
1. 북한의 명절 개념
1992년에 나온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은 명절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명절: ① 나라와 민족의 륭성발전에서 매우 의의깊고 경사스러운 날로서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경축하는 기념일.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탄생하신 4월 15일은 우리 인민의 민족최대의 명절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한 날인 9․9절, 조선에서의 사회주의 헌법이 선포된 날인 헌법절과 같은 명절이 있다. ② 사회의 일정한 부문이나 인민경제의 한 부문에서 경축하는 기념일. 6․6절, 교육절, 광부절 등이 있다. ③ 국제로동계급과 세계인민들의 사회계급적 해방과 전투적 련대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경축하는 기념일. 전세계 로동계급의 전투적 단결을 시위하는 5․1절과 3․8국제부녀절 같은 것이다. ④ 해마다 일정하게 지켜 민속적으로 즐겨오는 날, 곧 설, 단오, 추석 같은 것
『조선말대사전』은 명절의 개념을 이와 같이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놓았지만 막상 북한이탈주민을 대상으로 어느 날이 가장 중요한 명절인지 질문해 보면 대체로 “4대 명절”을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4대 명절이라고 하면 2월 16일(김정일 생일)을 비롯하여 4월 15일(김일성 생일), 9월 9일(북한정권 창건일), 10월 10일(조선노동당 창건일) 등을 의미한다.
북한당국은 1960년대 후반 이후 전통적으로 지켜 오던 민속명절은 사회주의 생활양식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철폐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1972년 남북대화를 계기로 추석날 가까운 곳에 조상의 묘소가 있는 사람은 성묘를 해도 좋다고 허용함으로써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1980년대 중반 이른바 “우리민족제일주의”를 들고 나오면서 추석과 설날, 단오 등 전통적인 명절을 되살리기도 했다.
2003년 음력 정월 초하루를 앞두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 때까지 기본 설명절로 지켜 오던 신년 1월 1일을 대신하여 음력 1월 1일을 그 자리에 올려놓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전통사회에서 설날 못지않게 중요한 명절로 지키던 정월대보름에도 하루 휴식하고 단오와 추석을 예전의 명칭을 따라 수리날과 한가위로 부르라는 것을 지시했다. 이와 같은 지시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최근 북한당국이 “민족대단결”이나 “우리 민족끼리” 등 민족을 앞세우는 구호를 들고 나와 남북한이 같은 민족이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그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려면 조상들이 지켜 오던 전통명절을 되살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1)
최근 몇 년 사이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 김정숙의 생일인 12월 24일을 명절로 인정하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북한당국이 이미 10년 이상 김일성▪김정일▪김정숙을 이른바 “백두산 3대장군”으로 떠받들어 온 만큼 김정숙의 생일도 나머지 두 사람의 경우에 맞추어 격을 높이고자 하는 것 같다.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92년 12월 24일을 기해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를 받았다는 점을 들어 조선중앙텔레비전이나 노동신문은 이 날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양상을 보인다.
2. 북한의 국가적 명절과 민속명절
2004년 1월 현재 북한당국이 정한 “국가적 명절”과 민속명절을 정리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국가적 명절과 민속명절은 모두 15일이다. 그 밖에 해당 직종 종사자들이 행사를 갖거나 휴일로 지키는 각종 기념일은 34일이다.
[표 7-1] 북한의 명절
명칭 |
구분 | |
국가적 명절 |
민속명절 | |
양력설 |
|
양력 1월 1일 |
음력설 |
|
음력 1월 1일 |
정월대보름 |
|
음력 1월 15일 |
김정일 생일 |
2월 16일 |
|
국제부녀절 |
3월 8일 |
|
김일성 생일 |
4월 15일 |
|
인민군 창건일 |
4월 25일 |
|
국제노동자절 |
5월 1일 |
|
수리날 (단오) |
|
음력 5월 5일 |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 |
7월 27일 |
|
해방기념일 |
8월 15일 |
|
한가위 (추석) |
|
음력 8월 15일 |
북한정권 창건일 |
9월 9일 |
|
조선노동당 창건일 |
10월 10일 |
|
헌법절 |
12월 27일 |
|
계 |
10개 |
5개 |
출처: 통일부 『2004 북한개요』 p. 364
북한당국이 정한 국가적 명절을 살펴보면 남쪽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같은 날을 기념하는 경우는 8월 15일 해방기념일, 단 하루 밖에 없다. 한편 인민군 창건 기념일인 4월 25일과 이른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인 7월 27일은 1996년에 이르러서야 법정 공휴일로 제정했다.
북한당국은 원래 분단 이후 조선인민군을 창건했던 날을 기념하여 2월 8일을 기념해 왔다. 그런데 1978년 2월 8일을 지내고 난 뒤 갑자기 일제 치하이던 1930년대에 어린 나이의 김일성이 군대를 이끌었는데 그 때부터 조선인민군이 창건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기념일을 4월 25일로 변경하였다. 또한 12월 27일 헌법절의 경우에도 북한당국이 1948년 9월 8일 정권 창건을 하루 앞두고 발표했던 북한헌법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 회의에서 “위대한 맑스-레닌주의자”이며 “혁명의 영재”인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직접적인 지도 밑에...토의”했던 이른바 “사회주의 헌법” 개정일을 기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3. 북한식 민족 최대의 명절과 각종 기념일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로 의미부여를 하는 날은 단연코 김일성과 김정일, 두 사람의 생일이다. 2월 16일과 4월 15일은 이른바 “민족 최대의 명절”로 북한당국은 이 날을 기념하여 사탕․과자․돼지고기 등 특별배급품을 공급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주민들은 이 날이 특별배급품이 없는 ‘껍데기 명절’과 다르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김일성과 김정일, 두 사람의 생일이 처음부터 민족 최대의 명절이었던 것은 아니다. 2월 16일과 4월 15일이 명절로 자리를 잡게 되는 과정을 추적해 보면 상당히 비슷하다. 우선 김일성 생일의 경우 1962년 4월 15일 50회 생일을 기념하여 임시공휴일로 정해서 명절의 의미부여를 하기 시작했다. 그 뒤 몇 년 동안 공휴일로 지키지 않다가 56회 생일이 되는 1968년에 법정 공휴일에 해당하는 “국가적 명절”로 제정했다. 그리고 60회 생일이 되는 1972년을 계기로 "민족 최대의 명절"로 규정했다. 특히 김일성 사후 만 3년이 되는 1997년 7월에 4월 15일을 태양절로 정하고 김일성의 출생연도인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주체연호”를 사용할 것을 결정하기도 했다. [그림 삽입-1997년 9월 7일자 로동신문 주체연호 사용법에 대하여]
김정일 생일의 경우에는 1975년 2월 16일 33회 생일을 최초로 임시공휴일로 지정했고 다음 해인 1976년에 공휴일에 해당하는 “국가적 명절”로 제정했다. 1986년부터 생일 다음날까지 공휴일로 연장함으로써 김일성 생일과 같은 수준의 명절로 만들었고 1995년에는 이 날을 "민족 최대의 명절"로 제정했다. 아버지에 이어 그 아들의 생일도 임시공휴일을 거쳐 “국가적 명절”이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민족 최대의 명절”로 변모하는 과정을 거쳤다.
북한의 조선중앙텔레비전과 노동신문 등 언론매체는 2월 16일과 4월 15일을 전후하여 여러 나라에서 축하편지와 꽃바구니를 전달했다는 소식을 매일 전하면서 온 세계가 함께 이 날을 축하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북한당국은 또한 이 날이 되면 각종 신비한 자연현상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2004년 2월 16일에는 백두산에서 눈보라가 불다가 아침해가 솟을 무렵, 갑자기 멎었고 밀림도 잠잠해져서 “장쾌한 해돋이가 펼쳐졌다”고 방송을 통해 선전했다.
그 이외에도 북한당국은 김일성과 김정일, 두 사람의 행적을 따라 일년 내내 각종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예를 들어 3월 6일에는 김정일이 1974년에 “경제선전선동사업을 힘있게 벌릴 데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한 것을 기념하는 중앙보고회를 열고 6월 19일에는 김정일이 1964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당 사업을 시작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를 벌린다. 10월 17일은 김일성이 1926년 당시 14세의 나이로 만주 화전현에서 최초의 공산주의운동 청년조직인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했다는 날로 각종 행사를 개최한다. 이런 기념일은 사실상 일년 내내 이어진다.
4. 민속명절과 세시풍속의 변화
우리 민족의 전통적 명절인 음력설, 단오, 한식, 추석은 1967년 5월 “봉건잔재를 뿌리뽑아야 한다”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라졌다가 1988년 이후 되살아나게 되었다. 북한당국이 민속명절의 의미를 되살리게 된 것은 이산가족찾기사업과 해외동포의 방문에 맞추어 남쪽 주민과 해외동포의 호응을 얻고자 한 측면도 있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부쩍 ‘우리식 사회주의’나 ‘조선민족제일주의’ 등 선전적 구호를 내세우면서 그에 부응하는 조치를 취하려 했다.
북한당국이 4대 민속명절 지키는 풍습을 공식적으로 다시 인정한 것은 1988년 추석을 휴무일로 지정한 이후의 일이다. 그 뒤 1989년 음력설과 단오, 한식 등을 휴무일로 지정했다. 민속명절을 휴무일로 지정한다는 의미는 해당 명절을 앞두고 며칠 전에 내각에서 올해 음력설이나 추석은 휴무일로 정해서 쉰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절차를 말한다. 이는 곧 1980년대 후반 이후에도 내각에서 그 해 민속명절을 휴무일로 지정한다는 발표를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가능성도 있었다는 뜻이다. 그만큼 민속명절을 지키는 것 자체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해마다 북한에서 민속명절을 지키는 강도가 높아져 온 것으로 나타난다. 마침내 2003년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음력설을 기본 설명절로 삼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정월대보름과 단오, 추석 등 다른 민속명절에 대한 대접도 크게 달라졌다. 특히 2004년에는 단오절이었던 6월 22일을 며칠 앞두고 김정일 위원장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당 사업을 시작한지 4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일이 있어 북한 전역에서 윷놀이와 농악무, 민족음식 품평회를 비롯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였고 2002년에 이어 “제2차 대황소상 전국 근로자들의 텔레비전 민속씨름경기”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대다수 북한이탈주민들은 민속명절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대부분 북한에 있을 때 자신은 한 번도 음력설을 명절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추석이라고 해서 특별히 놀이를 했던 기억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드물지 않다. 다만 민속명절이 되면 제사를 지내고 조상의 묘소를 찾아 성묘하고 벌초하는 풍습은 지켜 왔다는 것이 이들의 증언이다. 물론 북한당국이 강조하는 사회주의 생활문화에 따라 설날에 세배를 하지 않고 “새해를 축하합니다”라는 말로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제사를 지낼 경우에도 먼저 집 안 벽면에 걸어 둔 김일성-김정일 초상화 앞에 인사를 올리고 난 뒤에 제사를 지내는 등 어느 정도 변화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조상을 모시는 정신은 변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제 3 절
종교생활의 현황
북한당국은 분단 이후 줄곧 주민들의 종교생활을 공개적으로 억압하거나 암묵적으로 배척하는 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에 따라 오늘날 북한주민의 종교생활은 상당히 위축되어 있는 형편이다. 사실상 해방 당시 북한지역은 남쪽에 비해 종교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전통적으로 명망을 떨치던 사찰이 곳곳에 터를 잡고 있었고 기독교와 천주교 역시 남쪽보다 먼저 전파되었던 지역으로서 신도의 숫자도 많았다. 전반적으로 분단 초기까지 주민들의 일상생활에도 종교적 영향이 강하게 스며들어 나타났던 것으로 종교계 인사들은 평가한다.
그런데 북한당국이 종교를 마땅히 척결해야 할 미신적 풍습으로 비판하면서 주민들의 생활양식도 바뀌고 말았다. 다만 최근에 들어와 북한당국이 공식적으로 종교 활동을 인정하고 종교지도자를 양성하는가 하면 남쪽은 물론이고 외국의 종교단체와 교류를 추진하는 등 변화의 흐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서는 먼저 북한당국이 오늘날 종교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알아보고 분단 이후 북한주민의 종교생활이 변천해 온 과정을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1. 종교에 대한 북한당국의 관점
1992년에 나온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은 종교가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가치중립적인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 다음에 제시한 것처럼 종교란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를 믿는 신앙이며 그 유형으로는 원시종교와 기독교, 불교, 회교 등이 있다고 설명해 놓았다.
종교: 사회적 인간의 지향과 념원을 환상적으로 반영하여 신성시하며 받들어 모시는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 또는 그 믿음을 설교하는 교리에 기초하고 있는 세계관. 《신》이나 《하느님》과 같은 거룩한 존재를 믿고 따르며 그에 의지해 살아갈 때에만 온갖 소원이 성취될 뿐 아니라 래세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설교한다. 원시종교로부터 시작하여 불교, 기독교, 회교 등 수많은 종교와 그의 크고 작은 류파들이 있다.
이처럼 가치중립적인 개념 규정은 기독교와 불교에 대한 설명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조선말대사전』은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교주로 숭상하며 그의 교리를 신조로 하는 종교”이며 “기원 1세기에 로마제국의 관할 밑에 있었던 중근동에서 생겨나 널리 퍼진 세계적인 종교”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불교는 “동방에 퍼져 있는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며 석가모니의 교훈을 따르며 그를 교주로 숭상한다고 서술하였다. 한 마디로 『조선말대사전』은 종교의 기원과 현황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을 서술하고 있으며 종교를 배척하는 기색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북한당국의 관점이 분단 초기부터 시종일관 가치중립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북한당국이 “영원한 수령”으로 내세우는 김일성 은 분단 초기에 종교란 아편과 같은 것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일성이 종교를 설명하는 문장은 달라졌지만 이른바 “종교를 악용하는 반동통치배”에 대한 의혹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에서 그가 1950년 경 발언했던 내용과 1990년 이후 발언했던 내용을 비교해 보자.
종교는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입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으면 계급의식이 마비되고 혁명하려는 의욕이 없어지게 됩니다. 결국 종교는 아편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물론 국가에서는 종교를 믿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며 신앙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를 믿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종교를 믿지 말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하여서는 안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의 비과학성을 깨닫고 스스로 례배당에 가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2)
종교에 대한 옳바른 리해를 가지고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의 사업을 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게 되는것은 대체로 현실생활에서의 고통과 불행을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래세에 가서라도 행복한 생활을 누려보자는 념원으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를 믿는 사람을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생활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도록 만드는 반인민적인 정치이며 인민들의 자주의식을 마비시키고 저들의 지배에 순종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를 악용하는 반동통치배들입니다. 진보적인 종교인들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화목하게 살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3)
이렇게 종교인의 활동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던 김일성의 우려는 1972년 북한당국이 제정했던 “사회주의 헌법”에서 구체적인 조문으로 나타난다. 당시 북한헌법은 제54조에서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해 놓았던 것이다. 이 조항은 1992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제68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바뀐다. 그리고 1998년에 다시 개정한 헌법에서 “누구든지”라는 표현만 빠진 채 그대로 이어진다.
제68조: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누구든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데 리용할 수 없다.
말하자면 종교인의 활동을 통해 북한체제가 위협을 받거나 사회질서가 약화되는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점을 명시해 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1990년대에 들어 온 뒤, 김일성은 종교인의 유형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종교를 악용하는 반동통치배”와 “진보적인 종교인”으로 구분하여 그들의 활동을 서로 다르게 평가한다는 점이다. 북한당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반동통치배”는 막아야 하지만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화목하게 살 것을 바라는 진보적인 종교인”의 활동은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이들과 교류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2. 종교정책
오늘날 북한의 대표적인 종교단체로 활동하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나 “조선불교도연맹” “조선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 등 여러 단체는 1972년 남북대화를 시작한 뒤 갑자기 생겨난 조직이었다. 그 뒤 1980년대에 들어 재외동포 종교인을 상대로 북한을 방문하도록 초청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천주교인협회”와 “조선종교인협의회” 등 몇몇 단체가 새로 만들어졌다.
1988년에는 평양에 장충성당과 봉수교회를 세웠고 그 다음 해에도 역시 평양에 칠골교회를 건립하였다.4) 불교에서도 1988년 5월, 묘향산 보현사에서 석탄절 법회를 처음 시작한 뒤 매년 열반절과 성도절 등 불교의 3대 기념법회를 개최해 왔다. 한편 종교지도자 양성을 위해 1989년에 김일성대학교 역사학부 산하에 종교학과를 설치하고 기독교와 천주교, 불교, 천도교, 이슬람교 등 5대 종교의 교리와 의식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은 1990년대 이후 식량난을 계기로 남쪽과 외국의 종교단체들이 인도적인 지원활동을 하면서 더욱 활성화되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 전역의 사찰을 방문하는가 하면 종교 분야에서 외부와 교류가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다.
2002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이 러시아 극동지역을 순방했을 때 러시아 정교회를 방문하여 북한에 성당을 건립하는 문제를 논의하는가 하면 2003년 1월에 러시아 정교 신부가 평양을 방문하여 성탄절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곧 이어 6월에는 평양에 러시아 정교회 정백사원을 착공하는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2003년 3월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 4명이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주관으로 모스크바 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는 소식도 나왔다.
이런 움직임은 2004년에도 계속 이어졌다. 2004년에는 특히 불교계의 움직임이 활발하여 1999년 이후 계속해 온 개성 영통사 복원사업을 마무리했는가 하면 금강산 신계사 복원 공사를 시작하였고 59개 사찰에 대한 단청사업도 진행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북한주민의 일상적인 종교생활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외형상의 변화는 많지만 지금도 북한주민은 대부분 목사와 신부, 승려 등 종교지도자를 “무섭고 악착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이다. 이런 현상이 나오게 된 원인은 북한당국이 오랫동안 소설과 영화, 만화영화 등을 통해 종교지도자에 대해 부정적인 묘사를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부처를 미련하다고 묘사한 만화영화 그림 제시)
북한당국은 지금도 여전히 황해도 신천의 신천박물관에 기독교 선교사야말로 인민을 핍박하는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로 묘사하는 전시물을 내걸고 수많은 북한주민을 교양하고 있다. 또한 2004년에는 1800년대 말엽, 이 땅에 들어와 연희전문학교와 새문안교회를 건립하고 YMCA를 조직하는 등 4대에 걸쳐 봉사해 온 언더우드 일가가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이 나오자 그들은 “종교의 가면을 쓰고 침략의 발판을 닦아 온 길잡이”로서 “미국의 조선침략을 위한 첩보활동”을 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제 4절
의식주 생활과 배급제도의 변화 |
|
|
|
2002년 7월 1일, 북한당국은 기업의 자율권을 확대하고 개인이 경작할 수 있는 텃밭과 뙈기밭의 면적을 대폭 늘리고 배급제를 단계적으로 축소하는 한편, 물가와 임금․환율을 대폭 인상하면서 국가계획 권한의 일부를 하부 단위에 위임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경제관리 개선조치」의 전격적인 시행에 들어갔다. 그 이후, 2년 이상 지난 오늘날, 실제로 북한 전역에서「7.1경제관리 개선조치」시행에 따른 변화가 나타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은 아직도 식량을 비롯한 주요 생필품을 기존의 배급소와 동일한 기능을 하는 공급소의 영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다. 이 부분에서는 사회주의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배급제도의 운영원리와 현실의 괴리를 지적하고 「7.1경제관리 개선조치」로 인한 변화의 모습을 정리해 보겠다.
1. 배급제도의 운영원리와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운영하는 배급제도의 기본 취지는 그 사회의 구성원에게 필요한 물품의 종류와 수요량을 사전에 정확하게 예측한 뒤 이를 기반으로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생산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생산한 물품을 주민이 필요로 하는 시점에 필요한 분량만큼 공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배급제도를 제대로 운영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우선 국가는 주민들이 언제, 어떤 물품을 얼마만큼 쓰게 될 것인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생산과정에서 미리 계획한 종류의 물품을 필요한 양만큼 정확하게 생산해야 하며 수송과정에서도 예측하지 못했던 손실이 발생하지 말아야 하고 차량 부족이나 사고 등으로 물품 수송이 늦어지는 일도 없어야 한다. 천재지변으로 인해 생산과 수송․분배 과정에 차질을 빚는 일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주민들이 처음 수요를 예측하던 시점과 나중에 막상 물건이 공급되는 시점 차이에 원하는 물건의 종류와 수요량이 달라지는 일도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생산과 수송, 공급을 비롯한 모든 과정에 관여하는 사람과 주민들이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는 욕심이 전혀 없고 언제나 정해진 종류의 물건을 정해진 분량만큼 받아서 예측 가능한 소비생활에 완벽하게 만족하고 한 치의 불만도 품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품목에 대해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전제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당국도 이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생활에 꼭 필요한 품목을 공급품으로 정하고 나머지 품목은 자유판매품5)으로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아무리 공급품의 수를 줄이고 개별 품목에 대해 수요조사를 철저하게 하고 이를 토대로 빈틈없는 생산과 수송계획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천재지변과 사람의 실수와 탐욕 등에 따라 오차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북한도 사람이 살아가는 곳으로서 이와 같은 오차가 발생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문제는 이렇게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갑자기 수요가 늘어나는 경우에 주민들이 정상적인 배급체계를 통해서 필요한 만큼 물품을 더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칙적으로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는 이런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수령-당-인민이 일체감을 이루는 사회라고 강조하지만 수령과 당이 잘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주민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생존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배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던 시절, 대다수 북한의 주부들은 평소에 식량과 각종 물품을 조금씩 아껴서 모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는 방식으로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그러나 배급을 통해 필요한 물품을 구할 수 없게 된 이후에는 장마당을 활용하여 개인적으로 물품을 구입해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것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공장․기업소 등에서 생산하는 국가 소유의 상품을 가져다 개인적으로 팔아서 살아가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북한주민들은 이런 방식으로 물건을 조달하는 행위를 ꡐ조절ꡑ이라고 표현함으로써 현실적인 어려움을 인정하고 있다.
2. 배급제도하의 의식주 생활
북한당국은 오랫동안 ꡒ국가는 인민의 생활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으며, 인민생활을 골고루 급속히 향상시키면서 생활수준의 격차를 없애는 데 힘을 쏟는다ꡓ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몇 십 년 동안 유지해 온 의식주 및 생필품의 배급체계를 살펴보면 계층에 따라 공급품이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ꡐ평등ꡑ을 내세우는 사회주의 국가의 이념에 어긋나지만 막상 대다수 북한주민은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크게 불만을 토로하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ꡐ간부ꡑ들이 ꡐ평민이나 평백성ꡑ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는 것이 북한이탈주민들의 반응이다. 그 정도 특혜도 누리지 않으려면 누가 ꡐ간부ꡑ가 되려고 그렇게ꡐ아글타글ꡑ애를 쓰겠느냐 하고 반문하기도 한다.
2002년 「7.1경제관리 개선조치」의 시행 이후 북한주민의 의식주 생활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몇 십 년 동안 이어져 온 배급제도의 영향력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이 부분에서는 먼저 북한주민들이 기존의 제도 하에서 어떻게 의식주 생활을 영위해 왔는지 살펴보겠다.
(1) 식생활
우리가 오래 전부터 의식주로 불러왔던 관용적 어구를 북한에서는 1980년대 중반부터 “식의주”로 표현해 왔다.6) 그만큼 일상생활에서 먹을 것을 조달하는 일이 큰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당국은 그동안 주민들을 계층에 따라 중앙공급대상과 일반공급대상으로 나누고, 물자공급등급을 매일 공급대상자, 1주 공급대상자, 2주 공급대상자, 인민반 공급대상자로 세분해 놓고 쌀과 옥수수 등 주곡을 비롯하여 각종 생필품을 차별적으로 배급해 왔다. 특히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와 지방도시, 농촌 등 지역적 요인도 생필품 공급 차별의 주요 근거로 삼았다. 전반적으로 평양 등 대도시에 거주하는 특권층에는 필요한 양만큼 매일 또는 수시로 배급하지만, 일반주민은 식량배급표에 따라 월 2회, 15일을 기준으로 생필품을 배급받아 왔다. 출장이나 여행을 갈 경우에는 미리 “양표”를 발부받아 식당에 가서 돈과 함께 그 표를 내면 식사를 할 수 있게 허용하는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배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식당에 가서 양표와 돈을 내도 식사를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원래 북한당국이 운영해 오던 배급체계에 따르면 1일 식량공급량은 연령과 직업에 따라 총 9급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가장 낮은 단계인 9급은 하루 100g의 식량을 공급받는데 갓 태어난 아이에게 주는 분량이다. 가장 높은 단계인 1급은 하루 900g을 받는데 유해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와 탄광․광산의 막장에서 직접 채탄을 하거나 광석을 캐는 중노동자들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1일 식량공급량의 내역을 정리해 보면 <표 7-2>와 같다.
<표 7-2> 급수별 1일 식량공급량
급수 |
1일 식량공급량 |
대 상 자 |
1급 |
900g |
유해직종 종사자, 중노동자 |
2급 |
800g |
탄광․광산의 갱내외 운반공, 중장비 운전자 |
3급 |
700g |
일반노동자 |
4급 |
600g |
대학생, 연로보장자 중의 공로자, 투병중인 환자 |
5급 |
500g |
중학생 |
6급 |
400g |
소학생 |
7급 |
300g |
연로보장자, 가두여성,유치원생, 기타 부양자 |
8급 |
200g |
2~4세 어린이, 죄수 |
9급 |
100g |
1세 이하의 유아 |
공장․기업소에 근무하는 일반노동자들은 대체로 배급표와 배급카드를 기준으로 식량배급을 받는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근무하는 직장에서 15일에 한 번씩 배급표를 받는다. 배급표의 모양은 <그림 7-1>과 같이 왼쪽에는 해당 노동자의 급수와 1일 식량 공급량, 배급시기, 배급소의 위치 등을 적어 넣고 오른쪽에는 각각 하루 공급량을 적은 15개의 작은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직장에서는 개별 근로자가 지난 15일 동안 무단결근과 지각한 횟수를 합쳐 해당하는 분량만큼 배급표의 작은 부분을 떼어내고 준다. 무단결근 하루와 3회 지각에 1일 배급량을 공제한다.
<그림 7-1> 배급표의 모양
3급 700g 11월 상순
<도,시,군의> 식량 량정과 |
상(순) |
700g |
상(순) |
700g |
상(순) |
700g |
상(순) |
700g |
상(순) |
700g |
3급 |
11 |
3급 |
11 |
3급 |
11 |
3급 |
11 |
3급 |
11 | |
상(순) |
700g |
상(순) |
700g |
상(순) |
700g |
상(순) |
700g |
상(순) |
700g | |
3급 |
11 |
3급 |
11 |
3급 |
11 |
3급 |
11 |
3급 |
11 | |
상(순) |
700g |
상(순) |
700g |
상(순) |
700g |
상(순) |
700g |
상(순) |
700g | |
3급 |
11 |
3급 |
11 |
3급 |
11 |
3급 |
11 |
3급 |
11 |
자료: 좋은벗들 『북한사람들이 말하는 북한 이야기』2000, 정토출판, p.69
연로보장을 받은 노부모와 직장에 배치받기 전의 자녀들, 전업주부로서 세대주의 부양을 받는 가두여성들의 식량배급표는 세대주의 직장에서 나눠준다. 이 때 세대주가 지각이나 무단결근으로 1일 배급량 이상을 공제당한다고 하더라도 부양인들의 배급량은 15일치 전부를 공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세대주가 무단결근과 지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경우 직장에서 15일분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는 배급표를 받아 오게 된다. 만약 무단결근을 1회, 지각을 3회 했으면 자신의 몫에서 이틀치를 제외한 13일분과 다른 식구들의 배급량을 탈 수 있는 배급표를 받게 된다. 이 배급표와 함께 배급량을 살 수 있는 돈을 국정가격으로 계산하여 배급소 출표창구에 낸다. 배급소에서는 배급표를 받고 그 세대의 배급카드를 찾아서 15일분 배급량을 적은 배급카드를 내준다. 이렇게 배급량을 적어 넣은 배급카드를 가지고 공급출구에 가면 그 곳에서 해당 분량만큼 식량을 내준 뒤 배급카드를 다시 받아서 출표창구로 보내 다음 번 배급을 할 때까지 보관하는 것이다.
「7.1경제관리 개선조치」이전에는 일반노동자들이 15일에 한 번씩 식량배급을 타지만 협동농장의 농민은 1년에 한 번 결산분배를 하는 방식으로 자기 몫을 받았다. 이 때 농민이 받는 분배량은 자기가 속한 작업반에서 1년 동안 생산한 양이 국가계획의 몇 %를 달성했는가 하는 점에 달려 있다. 자신이 속한 작업반의 1년 생산량이 계획의 80%를 달성했으면 분배량도 정해진 분량의 80%를 받는 식이었다. 그런데 2003년 1월 2일자 조선신보는「7.1경제관리 개선조치」이후에는 농업부문에서도 “일한 것만큼, 번 것만큼 분배하는 실리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고 보도함으로써 북한당국이 그 동안 사회주의 경제의 보루로 인식해 오던 이 분야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해 주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오늘날까지 북한에서는 심각한 식량난으로 배급체계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 특히 북쪽의 국경 근방에서는 몇 달씩 식량배급이 중단되기도 하여 일부 지역별․계층별․연령별로 심각한 기아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식량난이 심각해지자 북한당국은 각종 채소류와 나물, 밀가루를 이용한 대용식품들을 보급하는 운동을 벌여 왔다.
(2) 의생활
배급제도는 의생활 분야에도 오랫동안 적용되어 왔다. 그러나 북한사회에서 의복의 공급은 사실상 식량공급보다 먼저 중단되었다. 오늘날 대다수 북한주민들은 의복은 배급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아서 구해 입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학생복은 아직도 배급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학생복의 경우, 예전에는 2년에 한 벌씩 무상으로 공급했지만 요즈음에는 국정가격으로 유상 공급하는데 물량은 턱없이 부족하다. 국정가격으로 학생복을 구입하면 장마당에서 살 때보다 훨씬ꡐ눅은 값ꡑ으로 구할 수 있어 학생과 부모들이 선호한다. 그렇지만 만성적인 물량부족을 겪어 온 북한에서 학생복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학생복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은 몸에 맞는지 여부를 떠나 무조건 구입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공급체계가 원활하게 돌아가던 시절에는 대다수 북한주민들이 인민반을 통하여 공급카드를 발급받은 뒤 각자 상점에 가서 공급카드를 제시하고 자신에게 돌아올 옷감과 의복을 국정가격으로 구매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중앙공급 대상자와 일반공급 대상자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중앙공급 대상자는 최고급 모직물에서 시작하여 급수가 낮아질수록 반모직이나 그보다 질이 나쁜 옷감을 받았다. 또한 의류특배제를 실시하여 예술가와 기자, 교원 등 특수집단과 당과 내각의 간부를 대상으로 특별히 좋은 옷감과 의복을 공급해 왔다.
반면 일반주민들은 의복보다 옷감을 공급받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그것도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아 국영상점이나 직매점보다 암시장에서 구입하여 소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아예 일상적인 의복 배급이 중단된 실정이라고 한다. 한편 이러한 기본 의복 외에 털모자, 면장갑, 셔츠, 블라우스, 스타킹, 운동화 등과 같은 보조 의복들은 공급대상 품목이 아닌 자유판매품이기 때문에 개인이 구입해야 하는데 주민들은 농민시장과 장마당을 통해서 비싼 가격을 주고 사서 썼다.
북한주민의 의생활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다수 북한주민들은 ꡐ천리마시대와 사회주의 생활양식ꡑ이라는 구호 아래 획일화되어 남자는 인민복에 레닌모를 쓰고 여자는 흰저고리에 검정 통치마 한복이 일반적이었다. 북한당국은 특히 여성들의 ꡐ조선옷ꡑ 차림을 칭송하면서 여학생의 교복으로 흰저고리와 검정 통치마를 공급해 왔으나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블라우스와 점퍼 스커트 형태로 바꾸기도 했다.
1979년 4월 김일성이 ꡒ평양시 등 대도시 주변 인민들은 발전하는 시대의 요구에 맞게 유색복장을 해야 한다ꡓ는 교시를 내린 후 외국인과 해외교포의 왕래가 많은 평양, 원산, 청진 등 대도시 주민들이 양장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1982년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일성이 ꡒ여성들이 소매 없는 옷과 앞가슴이 많이 팬 옷을 입고 다닌다고 해서 사회주의 양식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ꡓ라고 언급한 후 색상과 디자인도 다양해졌다. 1980년대에 당 기관지와 매체에 패션기사들이 많이 게재되고 1990년대 들어 그 영역이 머리모양과 화장법에까지 넓혀졌다.
이와 같은 변화는 북한당국이 1980년대 이전까지 사회주의적 생활양식이라는 전제아래 신체를 보호하는 의복의 1차적 기능만 강조하다가 시대 변화에 맞추어 멋을 표현하는 2차적 기능도 인정하기 시작한 결과로 보인다.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몰려든 외국인들의 세련되고 활달한 차림새는 북한주민의 옷차림이나 머리모양새 변화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북한 여성들의 옷차림이 눈에 띄게 활달하고 화려해지고 화장도 진하게 하는 등 변화가 많았다.
북한당국은 1990년대 들어 체제단속의 일환으로 ꡐ김일성 민족ꡑ다운 옷차림을 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는 “민족전통”의 구호를 강조하면서 조선중앙텔레비전이나 노동신문에서 여성들의 ‘조선옷’ 차림을 널리 칭송하는 보도를 게재하는 경우가 많다. 재미있는 사실은 남성한복이 일상복의 모습에서 일찌감치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오늘날 대다수 북한주민들은 그 존재 자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당국이 유독 여성들의ꡐ조선옷ꡑ차림은 민족정신을 나타내는ꡐ아름다운 소행ꡑ으로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3) 주생활
북한당국은 1990년 제정한 민법 제50조에서 “국가는 살림집을 지어 그 리용권을 로동자, 사무원, 협동농민에게 넘겨주며 그것을 법적으로 보호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모든 주택의 소유권은 국가에 있고 주민은 주택을 이용할 권리를 보유한다고 명시해 놓았다. 주민들은 자신의 직위와 성분에 따라 이른바 ‘땅집’으로 부르는 독립가옥이나 일자형의 하모니카 아파트를 할당받아 사용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당․정․기업소 간부들의 주택보급율은 높은 편이다. 특히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체육인에게는 평양시 만경대구역 팔골동에 위치한 원통형 아파트와 함께 개인 승용차를 제공하기도 한다. 반면 일반주민의 주택보급율은 50~60% 수준에 불과하다. 따라서 일반주민의 입장에서 주택을 배치받아 입주할 권리를 명시한 ꡐ입사증ꡑ을 받는 것은 노동당에 입당하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일로 알려져 있다.7) 그러나 일단 입사증을 받아 주택에 입주한 뒤에는 주택임대료와 수도․전기료 등 비용부담이 낮아 집 문제로 고민하는 사례는 많지 않았다. 당국에서 주택임대료와 수도․전기료 등을 저렴한 수준에서 일괄 적용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7.1 경제관리 개선조치」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그 이전에는 누구나 국가가 배치해 주는 주택을 공급받아 매달 월수입의 0.3% 정도의 사용료를 내는 정도였으나 「7.1 경제관리 개선조치」이후 주택사용료와 수도․전기료 등이 많이 올라 주민들이 큰 부담을 느낀다고 한다.
주택을 공급할 때에는 개인의 직위와 직장을 고려해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국의 필요에 따라 예외가 적용되기도 한다. 일반주민들이 주택을 배정받으려면 해당 인민위원회 도시경영과에 주택을 신청하고 기다려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입사증을 받기까지 1~3년이 걸린다고 한다. 신혼부부의 경우에는 거의 4~5년이 걸려야 주택을 공급받기 때문에 결혼 후에도 부모와 같이 살거나 1세대용 아파트에 2세대가 ꡐ동거살이ꡑ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당국도 주택난이 심각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각 기업소가 스스로 노동자에게 필요한 주택을 지어주라는ꡐ과제주택ꡑ정책을 시행하기도 하고, 제3차 7개년계획기간(1987~1993년) 동안에 23~30만호의 주택건설방침을 세우기도 하였지만 5만세대 건설에 그쳤다.
주택의 형태는 ꡒ민족적 양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으라ꡓ는 노동당의 시책에 따라 주민동원의 용이성, 노동력의 조직화․통제 등을 고려한 집단거주형 형태가 많다. 북한당국은 주택의 사적 소유와 거래를 금지하고 있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주택난이 악화되면서 음성적인 거래는 묵인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국가에서 정식으로 입사증을 받아 주택을 배정받는 것은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우선 동거인으로 등록한 뒤 세대주를 변경하는 방식으로 편법을 써서 주택을 거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당 간부는 아니지만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주택에 살기 위해서 돈을 지불하고 집을 교환하는 사례도 흔히 나타난다.
한편 세간살이에 대해서는 대다수 북한주민들이 ꡒ사람이 살려면 오장육부가 있어야 하듯이 가정에도 ꡐ5장 6기ꡑ가 있어야 한다ꡓ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 집안의 주부라면 누구나 ꡐ5장 6기ꡑ를 갖추는 것을 가장 큰 소망으로 여긴다. 5장이란 이불장, 양복장, 책장, 신발장, 찬장이고, 6기란 TV수상기․냉동기․세탁기․재봉기․사진기나 녹음기․선풍기 등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일반 주민들은 ꡐ2장 3기ꡑ정도의 세간만을 갖추어 놓는 경우가 많고 새로 혼인을 하는 신혼부부도 그 정도 구비하면 만족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나마도 생필품 및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 내다 팔고 있는 실정이어서 사실상 가구가 별로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3. 「7.1경제관리 개선조치」와 그에 따른 변화
인간의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기초 생필품 확보는 필수적인 요건이다. 오랫동안 주민들에게 기초 생필품을 무상에 가까운 가격으로 독점적인 배급을 하는 주체로서 북한당국은 주민들의 행위를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북한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 배급제도의 운영이란 당국이 운영하는 국영상점 이외에 그렇게 낮은 가격으로 기초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당국의 지시를 어기고 국가체제에 반항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 생필품 구입의 유일한 통로를 막아버리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배급제도는 북한사회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당국의 요구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주요 근거로 작용해 왔다.
이와 같은 배급제도의 사회적 기능에 본격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1990년대 들어 북한사회의 경제난이 극심해지면서 위로부터 주민통제와 아래로부터 순응의 주요 기제였던 배급체계의 기능을 약화시키거나 일부 마비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일반주민들의 사회주의적 경제생활 양상이 변혁기에 들어섰다. 주민들의 일상생활에서 집단주의적 소유원칙과 집단주의적 생산․소비원칙이 그 가치를 잃어가는 반면 개인의 이기적 목적에 부합하는 경제행위가 증가하고 비공식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는 ꡐ2차경제ꡑ의 영역이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본래 아무리 완벽한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라고 해도 사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는 ꡐ2차경제ꡑ의 영역이 부차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텃밭․부업밭의 경작이나 친분관계에 있는 사람끼리 소규모 서비스 및 수리행위를 하고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서로 물물교환 형태로 바꿔 쓰는 것이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실제로 북한당국은 소위 ꡐ사회주의 경제의 완성ꡑ을 선언했던 시절에도 공식적으로 1개 군 및 대도시마다 10일에 한 번씩 ꡐ농민시장ꡑ8)이라 하여 협동농장에서 생산한 잉여생산물의 거래를 허용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아예 농민시장의 상설화 단계에 들어서 지역마다 장마당이 매일 열리며 평양과 같은 대도시나 나진․선봉 경제특구에서는 7~8%의 수수료를 내면 ꡐ가내방ꡑ(가내작업반 가판대)이라고 하는 판매대를 설치할 수 있고 개인이 소토지에서 생산한 농산물과 협동농장 분조농산물의 자유판매도 묵인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북한당국은 장마당에서 채소나 가내수공업품으로 만든 생필품만이 거래되도록 하고 쌀이나 곡물거래를 불법으로 하였으나 1990년대 들어 배급체제가 불안정해지면서 간헐적으로 허용했다가 다시 통제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주민들은 당국이 장마당을 통제한다고 해도 그 기간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중국과 교역은 국가기관만 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통제하면서도 접경지역 농민들이 물물교환 형태로 중국인과 거래하는 것을 묵인하는 실정이다. 공식적인 배급체계의 마비로 인해 북한당국도 개인거래 및 2차 경제영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 전역에 걸쳐ꡐ전주민의 상인화ꡑ현상이 나타났다. 극심한 식량난과 생필품 배급의 마비로 기초 생필품들을 물물교환이나 개별 거래를 통해 구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장사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먹고 살 수 없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주민들의 이러한 경제생활행태 변화는 결국 암시장의 규모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전 주민들이 생필품 대부분을 시장에서 구입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물자의 가격은 국정가격의 몇 십 배에서 몇 백 배가 되기도 했다.
2002년 7월 1일 북한당국은 임금과 물가를 대폭 인상하는 「7.1경제관리 개선조치」를 발표하였다. 「7.1경제관리 개선조치」의 주요 내용은 북한당국이 더 이상 무상에 가까운 가격으로 생필품을 주민에게 공급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당국은 식량과 생필품의 국정가격을 장마당 가격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려 평균 25배나 인상하였다. 이와 함께 임금도 평균 18배 인상 올리고 생산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기업과 소속 노동자에게 업적급을 추가로 지급하는 방침을 정하여 주민들이 각자 자신의 임금 범위 내에서 스스로 경제생활의 주체가 되어 소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북한당국은 「7.1경제관리 개선조치」이후 앞으로는 ꡒ자기가 받은 노임으로 살림살이의 모든 문제를 풀지 않으면 안되게 되니 누구나 ꡐ실리ꡑ라는 문제를 자기생활과 결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ꡓ고 설명하기도 했다.9)
한편 북한당국은 의무교육제도와 무상치료제․사회보험제 등 소위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자랑할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는 기본적으로 유지하되 당국의 재정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주택임차료를 인상하고 수도 및 전기요금도 사용량에 따라 세대별로 차등 적용하는 등 일부 공공요금에 대하여 수익자 부담원칙을 도입한다는 것을 발표했다. 또한 배급제도를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감수해 왔던 재정적자를 더 이상 당국에서 부담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하게 밝혔다.
사실상 북한당국은 「7.1경제관리 개선조치」이전까지 쌀 1kg을 82전에 수매하여 8전에 공급하는 정책을 유지해 왔다. 말하자면 쌀 1kg을 판매할 때마다 북한당국의 입장에서는 74전의 재정적자를 감수해 왔던 것이다. 옥수수의 경우에는 1kg당 58전에 수매하여 6전에 공급했다. 그런데 「7.1경제관리 개선조치」 이후 쌀 1kg의 수매가는 40원으로 책정한데 반하여 배급소에서 공급하는 가격은 44원으로 올렸기 때문에 예전과 달리 쌀 1kg을 판매하면 당국의 입장에서는 4원의 이익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북한당국은 노동신문과 조선신보 등 주요 매체를 동원하여 이번 「7.1경제관리 개선조치」가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며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의 효율성을 도모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당국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번 조치가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북한주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시장경제의 원리를 학습하고 실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번 조치가 성공하려면 북한당국이 생필품의 공급능력을 획기적으로 확대하는 한편 식량과 원자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며 장기적인 투자재원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북한당국의 주도로 이와 같은 조치가 뒤따르지 않으면 심각한 생필품 부족현상이 나타나 주민들의 생활은 더욱 혼란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참고문헌
고영환, 『평양 25시』, (고려원, 1993)
김석향 『북한이탈주민의 언어생활에 나타나는 북한언어정책의 영향』
(통일부 통일교육원, 2003)
김승철, 『북한동포들의 생활문화양식과 마지막 희망』, (자료원, 2000)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1982)
남대현, 『청춘송가』,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4
북한연구소, 『북한총람』, (1994)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철학사전』, (1985)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조선말대사전』, (1992)
서동익, 『인민이 사는 모습』, (자료원, 1995)
성혜랑, 『등나무집』, (지식나라, 2001)
이영화, 『평양 비밀집회의 밤』, (동아출판사, 1994)
조선중앙통신, 『조선중앙년감』, (1987)
좋은벗들, 『북한사람들이 말하는 북한 이야기』, (정토출판, 2000)
최주활, 『북조선입구 Ⅰ』, (지식공작소, 2000)
통계청, 『남북한 경제사회상 비교』, (1996)
통일부, 『2004 북한개요』, (2003)
______, 『2000 북한개요』, (1999)
, 『95 북한개요』, (1995)
통일교육원, 『다가서는 남북, 준비하는 통일』, (2000)
_, 『북한이해』, (2003)
, 『북한이해』, (2002)
, 『북한주민 의식구조 및 가치관 조사』, (1996)
현대경제사회연구원, 『북한경제의 오늘과 내일』, (1996)
국정원, http://www.nis.go.kr
사이버통일교육센터, http://www.uniedu.go.kr
통일부, http://www.unikorea.go.kr
Andrei Lankov, From Stalin to Kim Il sung: The Formation of
North Korea, 1945-1960, London Hurst & Company (2002)
1) 북한당국은 이처럼 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3▪1절이나 개천절, 한글날 등 우리 민족의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날을 국가적 명절이나 기념일로 제정하지 않는 다; 통일부 『2004 북한개요』 (2003) pp. 363-366 및 김석향 『북한이탈주민의 언어생활에 나타나는 북한 언어정책의 영향』 (2003) pp. 99-108 참조
2) 김일성 저작집 5 (1949.1 - 1950. 6), 조선로동당출판사 1980
3) 김일성 저작집 43 (1991.1 - 1992. 10), 조선로동당출판사 1996
4) 통일부 『2004 북한개요』 (2003) p. 430
5) 자유판매품이란 명목상 배급표․배급카드에 구애받지 않고 살 수 있는 품목이다. 그러나 자유판매품이란 그 명칭에서부터 북한당국이 해당 품목의 생산과 수송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북한당국도 배급제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이를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국가체제를 총동원하여 주요 공급품의 생산과 수송을 보장하는 정책을 고수하느라 자유판매품의 공급에는 그만큼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유판매품으로 지정해 놓은 물품의 경우, 물건의 가격이 월급의 몇 십 배에 이를 정도로 비싸고 공급량이 많지 않아 일반주민의 입장에서 국영상점을 통해 이런 물품을 구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6) 1982년 김일성 주석은 “쌀은 곧 공산주의”라고 선언함으로써 식량 확보의 중요성을 시사한 일이 있다. 또한 오늘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옷감이나 집 같은 것은 없어도 참을 수 있지만 배고픈 것과는 타협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통일부 『2004 북한개요』p.336
7) 최주활, 「북조선입구」, (서울 : 지식공작소, 2002), pp.115-118.
8) 농민시장은 1950년 북한당국이 ‘농민시장에 관한 규정’에 따라 협동농장이 쉬는 날인 1, 11, 21일에만 허용한 것으로 협동농장 농민들이 생산한 돼지고기, 참깨, 닭고기 등 농․축산물을 자유판매가격에 의해 매매한다. 북한은 그 동안 경제사정에 따라 농민시장의 규제와 허용을 되풀이해 왔는데, 지금까지는 계획경제를 보완하는 측면에서 존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9) 조선신보 2002년 7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