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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바꿀 수 없는 목숨 바꾸기>의 줄거리:
기껏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무엇으로 제 목숨을 바꾸겠는가? 물으시고는 그 목숨을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는 바꾸라고 하십니다. 모순 되어 보입니다. 대체 목숨이 뭘까요? 뭔데 십자가 예수님 믿는 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 바꾸기라는 것일까요?
바꿀 수 없는 목숨 바꾸기
(막8:27-38)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바꿀 수 없는 목숨 바꾸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목숨 바꾸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믿음, 특별히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목숨 바꾸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꿀 수 없는 목숨이라고 또 본문에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이 모순이 되는 것은, 문법적으로는 분명히 35절에 뭐라고 그러셨냐 하면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구원한다는 것은 목숨을 얻는다는 얘깁니다, 즉 ‘목숨을 잃으면 목숨을 얻는다.’
그래 놓고서는 37절에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이 말이 모순이 된다는 얘깁니다.
여기서 도대체 목숨이라고 하는 것이 뭘 말하는 것 같습니까, 여러분 생각에는.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여기서 자기 목숨이라는 것은 육체의 호흡이 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보통 여깁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면 그 구원이라는 것은 영생을 얻는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육체의 목숨을 잃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처럼.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영생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 본문의 원어를 살펴보면 그렇게 ‘육체의 목숨을 잃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나와 있지를 않아요.
똑같은 ‘프쉬케’라고 하는 단어로 나와 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soul 이에요, 영혼.
즉, 영혼을 잃으면 영혼을 얻는다, 이런 얘기가 됩니다.
우리 육체의 목숨을 잃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프쉬케’를 잃으면 ‘프쉬케’를 얻는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36절 37절은 바로 그 목숨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정의해 주시는 겁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너희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얻어야 되는데, 그 목숨이라는 게 뭐냐 하면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유익한 게 아무것도 없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목숨이라는 것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래 놓고, 35절에는 ‘나와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라, 그러면 목숨을 얻는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바꿀 수 있다는 거예요.
복음과 예수님을 위해서는 목숨과 바꿀 수 있다고 해놓고, 37절에는 목숨을 바꿀 수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자, 목숨이 뭔가를 알지 못하면 이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라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하고 가는 게 뭔지도 모른다는 얘기에요.
목숨이 뭔가를 알기 위해서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분명히 목숨은 천하를 얻고도 그걸 잃으면 유익한 게 아무것도 없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유익한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얻은 천하 중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가 없어요.
이걸 예를 한번 들어본다는 겁니다.
외국에서 목회할 때,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픈 그런 초상이 하나 나게 되었습니다.
스물일곱이 된 청년이 친구들 생일파티를 위해 레스토랑에서 파티를 하는 중에 더 나이가 어린 친구(그러니까 1.5세 2세 이런 친구들이죠)가 베트남 청년과 시비가 붙었습니다.
여럿이 몰려 있기 때문에 당연히 옆으로 번져가지고 거의 한국사람 대 베트남사람들의 패싸움처럼 돼버렸어요.
그래서 이 스물일곱짜리 저의 교인이었던 집사님의 아들 되는 이 청년이 그중 나이가 좀 많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 싸움을 말렸습니다.
그 싸움을 말리고 있었는데, 그 베트남청년들이 갱단이었어요, 한 베트남청년이 나가서 자기 차 트렁크를 열고 총을 가져와서 쐈는데 하필 말리고 있던 그 청년이 맞아서 그 자리에서 숨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온 교회가 충격에 빠진 거예요.
예배를 드리러 그 집으로 갔습니다.
위로예배를 드리고 장례절차를 밟기 시작하는데, 예배가 끝난 다음에 그 아버지가 우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였습니다.
이민 와서 20년이 넘도록 택시운전을 하면서 열심히 일했어요.
외국에서의 택시운전은 우리나라에 비해 좀 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택시를 몰면서 이 집을 장만하고 아내가 타고 다닐 수 있는 자동차를 장만하고(제 기억으로는 렉서스였어요), 그리고 자식들 셋이 다 좋은 대학 나오고 잘 컸습니다.
큰 아들은 회계사였어요, 결혼도 잘하고…
딸도 그렇고, 이 죽은 아들도 자격증이 아주 많았어요.
그런데 이 남자집사님이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냐, 내가 이민 와서 20년 넘도록 이렇게 애쓰고 이를 악물고 살았던 것이 다 이 자식들 때문이었는데…’
이민을 가게 되면 남자에게는 자기 생이라는 게 없어요.
자기가 체면을 차리고 자기 이름을 낼만한 일에 신경 쓸 수가 없습니다.
어떡하든지 어린 자식들 먹여 살리고 공부시키고 집 한 칸이라도 마련해서 안정된 생활권으로 들어가는 게 목적이 되는 거예요.
자식들을 위해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자식이 죽었습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20년 걸려서 집 장만하고 좋은 차 사고, 안정된 생활을 얻었는데 다 무슨 소용입니까?’
낯선 외국 땅에 와서 나는 이미 이름 내기는 틀렸으니까, 자식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 목적인데 자식이 죽어버렸어요.
여러분, 목숨이 뭘까요?
우린 자꾸 육체의 호흡이 끊어진 것을 생각합니다.
아니에요.
육체의 목숨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목숨이 있습니다.
육체가 호흡을 합니다, 헬라어에서는 이 육체의 호흡을 특별히 ‘비오스’라는 말로 써요.
우리가 바이오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biotechnology 생명과학 이런 얘기할 때.
그런데 이 본문에서 말하는 목숨 ‘프쉬케’, 영혼 soul이라고 번역되는 이 말은 마음의 목숨을 말한다 이겁니다.
마음의 목숨이 무엇이냐?
육체의 목숨은 호흡이 끊어지면 끝나잖아요? 마음도 호흡을 한다는 겁니다.
마음의 호흡, 이게 바로 자식이었다는 거예요.
집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천하를 얻고도 바꿀 수 없다는 목숨이 바로 이걸 말하는 거예요.
자식을 호흡하며 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죽자, 집이 무슨 소용입니까, 자동차가 무슨 소용입니까?
이민 와서 안정된 생활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러분, 사람이 가슴을 치면서 숨이 멎는 순간이 있어요.
공기는 잘 유통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숨이 멎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의 목숨이 있다는 거예요, 마음이 호흡하고 있는 목숨.
이 목숨이 바뀌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게.
오늘 본문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의 베드로의 고백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태복음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단순화되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대답하고,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니라, 내가 너에게 천국 열쇠를 … ’
이 모든 말씀이 생략되고, 베드로가 하는 말이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말하고, 곧바로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 받아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견하시게 되는 장면으로 넘어가버립니다.
그러니까 마가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곧바로 십자가사건과 연결 지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얘기하고 싶었던 거예요, 단순화시켜 가지고.
믿음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을 받아들이는 건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뭡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겁니다.
그건 내 목숨을 잃어버린다는 거고, 다른 목숨으로 찾는다는 얘깁니다.
육체의 목숨을 잃고 육체의 목숨을 찾는다는 얘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게 무슨 말입니까?
목숨을 잃어야만 된다는 거예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은 자기 목숨을 잃어야 된다, 누구를 위해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반드시 목숨을 잃어야 목숨을 얻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목숨이라는 게 뭐냐 하면, ‘천하를 얻고도 그것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는 것’
쉽게 말하면 이런 거예요.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9절에서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목숨의 문제는 몸 자체가 ‘죽는다, 안 죽는다’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목숨의 문제는 몸으로 있든지 몸에서 떠나 있든지, 그러니까 죽든지 살든지 주를 기쁘시게 한다고 할 때의 주가 목숨이라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이 있음으로써 내가 살아있다고 하는 이유가 설명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목숨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이 집사님에게는 목숨이 자식이었지요.
우리 다 그런 경험 하지요.
제 아버님도 제가 어렸을 때 창경원이었는지 고궁에 데리고 갔다가 절 잃어버리셨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있어요.
사방을 봐도 가시거리 안에서 나의 흔적이 사라졌을 때, 그때 하늘이 무너진다는 게 무엇인 것을 느꼈고 숨이 멎는다고 표현을 하셨어요.
어디를 봐도 사정거리 안에서 당신의 아들이 없어져버렸어요.
이때 느끼는 ‘숨이 멎는다’ 이게 바로 마음의 목숨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살든지 죽든지’ 이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 구절을 자꾸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천하를 다 얻어도 이 육체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냐? 이렇게 이해를 하는데, 아니에요.
아니, 가족을 위해서 생명보험 들어놓고 일부러 사고를 가장해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유익이 있는 거예요.
이준 열사, 안중근 의사, 다 나라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지 않습니까?
육체의 목숨을 잃어도 유익이 있을 수 있어요.
천하가 아니라 나라 하나 독립을 얻자고 자기 육신의 목숨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안중근 의사에게 있어서 목숨은 자기 육체의 목숨이 아니라 나라의 독립이에요.
나라의 독립을 호흡하고 있는 겁니다.
나인성 과부에게는 목숨이 자기 육체의 목숨이 아니라, 외아들이에요.
김구 선생님에게 있어서 목숨은 대한민국의 장래였어요.
이제 목숨이 뭔지 아시겠습니까?
불철주야 사업만 하는 아빠에게는 목숨이 사업입니다.
내 마음이 숨을 쉴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없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이미 얻어놓은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그게 바로 목숨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뭡니까?
나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 목숨을 부인한다는 거예요.
그것이 없으면 내가 살아야 될 의미가 없는 것, 그것이 없어지면 내 숨이 멎어버리는 것, 육체는 살아있지만 내 마음의 숨이 딱 멎어버리면서 살아야 될 의미가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 그런 게 바로 목숨이라는 거예요.
마음의 목숨을 말합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 유지되고 있던 그 마음의 목숨, 그것이 없었으면 세상의 것이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그런 그 목숨을 예수님 만나면서부터 바꾸라는 얘깁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어떡하든지 자식을 한번 잘 키워보겠다’ 자식이 목숨이었어요.
자식이 내 마음의 호흡이었어요, 자식을 호흡하면서 살아요.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내 애인이 목숨이었어요, 애인이 없으면 나는 살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군대 가있는 청년들이 애인이 고무신 바꿔 신으면 탈영해서 총기사건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살 이유가 없는 거니까.
총기난사사건 일으키고 탈영하면 자기 인생이 끝난다는 걸 알아요, 그러나 그 애인이 없을 바에는 인생이 끝나거나 말거나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게 바로 목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서는 그렇게, 온 천하 그 어떤 귀중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온 천하에 소유된 것들이 다 그것 때문에 의미가 살아나는, 그런 목숨을 예수님과 바꾸라는 얘기에요.
이게 가능합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38절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제 마지막 때가 되면 목숨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어떤 것도 내 마음의 목숨이 될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없어져버리니까.
그래서 내 마음이 지금 돈을 호흡하고 있거나, 아니면 돈을 벌 희망을 호흡하고 있거나, 아니면 자식을 호흡하고 있다면, 그게 내 목숨인데, 예수님이 오실 때 이 목숨들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므로 내가 목숨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천국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내 마음이 죽지는 않았는데 내 마음이 호흡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인 예수님께서 당신을 우리 마음이 호흡할 수 있는 목숨으로 주시지 않으시겠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지옥은 어떤 곳인가 하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여러분이 목숨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마음이 호흡하고 있는 게 자식이라고 그러면 그 자식이 유괴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의 심정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가슴이 멎지요? 숨이 멎어버릴 겁니다.
그 상태가 지옥이라는 겁니다.
내 마음이 숨을 쉴 수 있는 대상이 없는 곳이 지옥이라는 겁니다.
‘내가 너를 부끄러워하리라’는 얘기는 이제 예수님과 하나님아버지와 천국 말고는 숨 쉴 수 있는 대상, 내 마음의 목숨이 될 수 있는 대상이 없는 세상이 왔는데,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의 목숨으로 내주시지 않겠다는 얘깁니다.
그게 바로 지옥이라는 겁니다.
내 사업이 지금 당장 망해버렸다, 사업으로 숨 쉬고 있던 사업가가 사업이 망한 상태,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거죠.
주님의 십자가를 안 믿으면 그렇다는 거예요.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게 뭡니까?
지금 내 마음이 숨을 쉬고 있는 내 마음의 목숨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들이 이 세상 안에 있잖아요?
그것들을 바꾸는 겁니다.
그 목숨 자체를 바꾸는 거예요.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얘기는, 예를 들어서 이왕에 내 자식이 목숨인 이 상태에서는 돈을 아무리 벌어도 자식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얘기에요.
근데 이 판 자체를 완전히 바꾸라는 거예요.
목숨이 정해져 있는 그 상태에서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지만 목숨 자체를 정하지 말고 이제 바꾸라는 얘깁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거예요.
이제까지 예수님과 하나님아버지 이외에 다른 것을 마음의 목숨으로 삼고 살던 내가 죽어버리고, 예수님을 목숨으로 삼아서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우리가 몸으로 있든지 몸에서 떠나 있든지…’
그러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목숨을 얻는다는 것이 육체의 목숨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의 몸, 이 고깃덩어리인 몸이 마음이 호흡하는 목숨일 수도 있겠지요, 연예인의 경우 인기를 얻어야 하니까 육체를 아름답게 가꾸고…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목숨이 육체의 목숨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서 바꾸는 거예요.
따라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잃어야 된다는 거예요,
누구든지 예수님 만나기 전에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이 호흡할 수 있는, 내 마음이 살아있는 이유, 살아갈 수 있는 힘, 살아갈 수 있는 의욕, 이게 바로 목숨인데, 이 근거를 바꾸는 것이 바로 예수 믿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누구든지 반드시.
그러니까 초대교회 때 박해받아서 죽는 자들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나와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으면…’ 이게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죽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태평성대에 살아도 예수님 만나면 이 목숨을 바꿔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아버지가 좋아서 천국이 너무 좋아서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 때문에 호흡하며 살아가는 삶, ‘이렇게 목숨이 바뀌지 않으면 예수 믿는 게 아니다’라는 얘기를 베드로에게 ‘사탄아, 네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왜냐하면 내 목숨이 자식이면 자식 일을 하게 되고, 내 목숨이 돈이면 돈 버는 일을 하게 되고, 내 목숨이 이 육체를 가꾸는 일이면 그것을 하게 되니까…
그러므로 목숨을 바꾸면 일이 바뀌게 되지요.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하나님이 내 목숨이 되어야 되니까, 하나님이 내 목숨이 되는, 그렇게 하나님이 좋고 예수님이 좋은 상황이 내 마음에 주어지도록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 맞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지요.
목숨 바꿉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제 마음이 호흡하고 있는 목숨이 무엇인가를 잘 살펴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것이 주님과 하나님아버지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십자가를 붙잡고, 현재 제 목숨에 대해서 죽게 해주시고, 제 목숨을 잃게 해주시고, 주님이 제 목숨으로 찾아지는 복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