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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막10:17-27).”
좋은 밭에 잡초가 많이 났을지라도 잡초만 제거하면 그 밭은 항상 좋은 밭이다. 사람은 원래 하나로 지어졌기 때문에 사탄이 속여 놓은 것만 없애 버리면 우리는 원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이 회복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 방해되는 것이 첫째는 우리가 갈라지는 문제이다. 우리 육체 안에 있는 본성을 이용해서 사탄이 항상 우리를 갈라놓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원래 하나이다.
둘째는 우리 육체 안에 있는 어떤 성분으로 인해서 늘 굳어지려 하는 것이 있고, 늘 어른이 되려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만약에 우리 안에 그런 요소가 없으면 사탄이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고, 우리를 방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내 안에 어떤 요소가 있어 그것을 통해 사탄이 들어오므로 우리가 철저히 처리받지 않으면 안 된다.
가. 재물에 관한 문제
오늘은 그 세 번째로 재물에 관한 문제이다. 어떤 청년이 예수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이 네가 율법을 다 지켰느냐고 물었다. 그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하였다. 그러자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다. 그리고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셨다.
이것은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 어렵다는 말씀이다.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했다. 예수께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재물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재물로 표현된 것은 결국 사람의 욕심을 의미한다. 인간의 욕심이 자본주의하에서는 돈이고, 공산주의하에서는 권력이다. 이것은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사실은 욕심이다.
1) 욕심이 하나님 나라를 방해함
이 욕심이 천국을 가로막는다. 이것을 이용해서 사탄은 우리가 천국에 살지 못하도록, 하나님 나라를 누리지 못하도록 한다. 비록 하나님께서 천국을 부어준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 그 나라를 먹고 마실 수 없다.
돈 문제는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나는 돈 욕심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돈 욕심은 없는데 다른 욕심이 있다. 자기 좋아하는 것에 평생을 끌려다니는 사람도 있다.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놓을 수 없는 그것이 바로 욕심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욕심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방해한다.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버릴 수가 없으면 그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누리지 못하게 만든다.
내가 비록 돈은 사랑하지 않아도 또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다. 어느 것을 사랑하더라도 하나를 사랑하면 다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결혼할 때 그것만 딱 내 마음대로 하고, 그 다음 문제는 절대로 내 맘대로 안 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나는 돈만 가진다면 다른 것은 다 포기하겠다. 주님께서 무엇을 포기하라고 해도 다 포기하겠다는 이 사람도 절대로 안 된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명예만 소유한다면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좋다. 주님이 무엇을 하라 해도 다 하겠다는 사람도 역시 안 된다. 이것은 한 구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예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바로 사람의 욕심이다.
2) 욕심이 필요하지 않은 세계로 이끄심
예수께서 여기서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려면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만 누릴 수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가능한 것은 딱 한 자리밖에 없다.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야만 가능하다.
왜 내가 돈이 필요했던가? 돈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왜 내가 명예가 필요했던가? 명예가 필요한 이유가 있다. 내가 왜 자존심이 필요했던가? 그것도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 사람 자신에게는 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 우리 모든 사람에게는 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이유가 있는 한 우리는 그것을 포기할 수가 없다.
바꿔서 생각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요건이 없어진다면, 공자님 부처님 아니라도 그것이 필요치 않으면 간단하다. 필요하니까 문제가 되지, 만일 필요하지 않다면 간단한 문제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고 계시는가? 필요치 않는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욕심이 필요치 않는 세계로 인도하고 계신다.
나. 하나님 나라가 더 좋으면 욕심이 끝남
교회 안에 와서 영광을 누리고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 발견되면 다른 것이 필요가 없어진다. 내 욕심을 가지고 있으면 이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어느 것이 더 좋은가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가 더 좋은가? 아니면 내 욕심이 더 좋은가? 이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가 더 좋으면 간단하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활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욕심을 갖지 말라는 말도 아니고, 욕심을 가지라는 말도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이것이 부활의 세계다. 우리가 원했던 것이, 참으로 필요했던 것이 필요치 않는 세계다.
하나님 나라를 보기 전에 우리는 ‘그래도 이것을 해결해야지. 이 정도는 되어야지.’ 이런 것이 항상 남아 있다. 누가 이야기해도 절대로 그것만은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면 ‘아, 그것이 아니었구나!’ 하고 알게 된다. ‘그것이 아니었구나. 전혀 다른 세계로구나.’ 알게 된다. 전에 필요하던 것이 전혀 필요치 않는 세계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시기를 간구함
나는 여러분에게 욕심을 갖지 말라고 하고 싶지 않고, 주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를 원한다. 욕심은 아무리 가지지 말라고 해도 안 된다. 아무리 해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이 모두 열려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여지게 되기를 원한다.
욕심을 어떻게 하면 버릴까 하는 사람은 욕심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주여, 나의 눈을 열어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된다. 그러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육체에 속한 어떤 성분, 성질이 있는데 그 성질이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을 방해한다. 이 성질 자체가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탄이 이용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욕심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 나라를 완전하게 누릴 수 없다.
욕심을 조금 자제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조금 맛볼 수 있다. 만일 50%만큼 줄인다면 50%만큼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다. 100% 그것이 없어진다면 하나님 나라를 100% 누릴 수 있다. 그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아무리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우리 안에서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어떤 형제가 말한 것처럼 남이 좋으면 내가 좋지 않고, 남이 좋지 않으면 내가 좋다는 것이다. 이것이 놀부 심보다. 사돈이 논 사면 배가 아프다. 이상한 심보다. 다른 사람이 잘되면 좋을 텐데 다른 사람이 잘되면 싫은 것이다. 이것도 내가 욕심이 있어서다. 내가 높아지기를 원하고, 욕심이 있어서다.
그런데 새로운 세계에 들어오면 남이 기쁜 것이 좋다. 세상에서는 남이 잘되는데 내가 더 좋은 일은 없다. 같이 장사를 하는데 옆 사람이 돈을 잘 번다면, 내가 기분이 좋을 수는 없다. 같이 국회의원에 출마해서 다른 사람이 당선되었는데, 내가 기분이 좋을 수는 절대로 없다. 공자님이라도 안 된다. 안 한 체하는 것이지, 결코 자기 마음이 진실로 기쁘지는 않다.
세상에서는 절대로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가르쳐 보았자 헛일이다. 백날 설교를 해도 안 된다. 그런데 가능한 일이 있다. 국회의원이 필요하지 않으면 된다. 대통령이 필요치 않으면 된다. 아주 간단하다. 어떤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더라도 원하면 꽃다발을 얼마든지 보내줄 수 있다. 내가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2) 주님은 우리를 전혀 다른 세계로 인도함
주님께서는 우리를 전혀 다른 세계로 인도하기를 원하신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한 해결 안으로 인도하고 있다. 주님으로 인해 우리 눈이 뜨여져서 새로운 나라를 본다면 세상의 모든 교훈이 헛일이고 세상의 모든 가르침이 허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심도 허사고, 작정도 허사고, 인내도 허사고, 모든 것이 다 허사가 되고 만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새로운 나라를 보게 되기를 원한다. 세상이 아니면 못산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좋은 세계가 있구나 하는 것을 보게 되기를 원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 세계로 인도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아주 지극히 낮은 사람이지만 가장 높은 사람으로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은 모두 부활의 사건들이다. 왜 생각이 바꿔지는가? 왜 관념이 바꿔지는가? 왜 보는 것이 달라지는가? 이것이 모두 부활의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소소한 부활의 사건들이 퍼져서 우리의 생각이 바꿔지고, 관념이 바꿔지고, 시야가 바꿔지고, 모든 것이 바꿔진다. 시각이 동쪽에서 보던 사람이 서쪽에서 보는 사람이 된다. 이것이 완전한 변화이다. 이 변화는 죽었다가 살아난 변화와 마찬가지다. 이것이 부활의 변화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세계를 보고 십자가 안에서 높아질 수 없고, 굳어질 수 없고, 항상 어린아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전혀 다른 세계, 전혀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 세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가 아니고,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도 아니고, 우리가 계획했던 세계도 아니다.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했던 세계이다. 이런 세계를 여러분이 다 보게 되기를 원한다.
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온전하게 쓰이기를 원함
만일 우리가 어떤 것에 사로잡힌다면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문제이다. 그래서 사탄이 이용하게 된다. 나와 하나님만 있다면, 아버지와 아들만 있다면 무슨 상관이겠는가? 아버지와 나만 있다면 오히려 하나님이 더 좋은 것으로 이용할 수 있다. 만약 사탄이 없다면 내 욕심도 하나님이 이용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정말로 욕심이 더 많은 사람을 더 크게 쓸 수도 있다. 그런데 적이 사용한다.
우리 안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없다. 그것을 가지고 변명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하나님 나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 눈을 열어주셔서 나로 하여금 다른 세계를 보게 하여 주십시오. 내가 사탄에게 이용당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이 나로 인해서 침해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구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한 일이다.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높아지고자 원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다 있다. 이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면 참으로 좋게 사용하실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이 사용할 수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탄과 전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를 복종시킨다면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복종시키지 않는다면 사탄이 사용해 버리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엉뚱한 인생을 살게 되고 말 것이다. 일생 동안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생을 살게 된다.
1) 우리를 귀하게 쓰시기 위해 부르심
주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없다. 얼마나 귀한 그릇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는지 모른다. 얼마나 좋은 병기로 사용하시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시시한데 가서 썩어 버린다면 얼마나 아까운 일인가? 나는 형제들이 사탄에게 사로잡혀 가는 것을 보면 얼마나 아까운지 모른다. ‘저 좋은 사람이 사탄에게 지금 팔려가는구나. 노예로 끌려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안타깝다. 자신은 좋아서 가겠지만 안타깝다.
나 자신을 주님 앞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내가 꼭 구원받고 싶어서가 아니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다. 나를 가지고 사탄이 사용할까봐 그렇다. 원수가 나를 사용할까봐 그렇다. 원수에게 우리 자신을 주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꼭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어떻게 싸우는 것인가? 우리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싸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기는 길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합당한 그릇으로 사용할 수 있고, 아름다운 그릇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간절한 사랑이다. 어린양 아들을 주어서라도 우리를 사기를 원하셨다. 우리를 쓰기 위해서 사신 것이다. 우리를 다시 값 주고 사신 이유는 하나님이 값있게 쓰기 위해서이다. 아들을 주고 샀으면 아들만큼 써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고 나를 사신 것이 아들만큼 나를 쓰기 위해서이다. 주님은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
우리는 길 어귀에서 서성대는 농부들과 마찬가지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길바닥에서 일생을 서성거리고 말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농장으로 부르신다면 주님을 위해서 유용한 일꾼이 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귀한 자리로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 귀하게 쓰여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보물을 많이 끌어 모으기를 바란다. 욕심이 많은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면 더 많이 끌어 모으는 사람이 될 것이다.
에베소서에 보면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고 했다. 반대로 사용되면 아주 좋은 그릇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
2) 각자 온전하게 쓰여져서 풍성한 교회를 이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필요 없는 것을 주신 것이 아니다. 밥 먹고 싶은 욕심이 없다면 인간이 살 수 없다. 식욕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인간이 살 수 있다. 성욕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자손을 번성시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다 만들어 놓았다. 하나님이 쓰시려고 만들어 놓았는데 사탄이 쓰면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앞에 복종시켜야 하나님이 쓰실 수가 있다.
우리에게 식욕이 있으므로 건강하다. 식욕이 많은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필요 없는 것을 주신 것이 아니고, 다 필요한 것을 주셨다. 그런데 만약 사탄이 그것을 사용하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도록 엎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시게 될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우리가 그를 바라보게 된다면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바꿔주신다면 참으로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다. 주님을 원망하던 사람이 주님을 감사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을 미워하던 사람이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사탄만 빼버리면 그렇게 될 수 있다. 간단한 문제이다. 원수만 쳐부수면 된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엎드리기만 하면 원수는 우리를 사용할 수가 없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욕심을 많이 타고 나지 못해서 교회가 이렇게 작다. 나는 이것으로도 만족하고 감지덕지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래 욕심이 없어서다. 타고 나기를 욕심을 많이 타고 나지 못했다. 욕심이 많으신 분은 이것보다 10배나 100배를 모으길 원한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아무리 하려고 해도 욕심이 생기지 않는다. 주의 나라에서 큰 욕심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욕심이 많으려면 하나님 나라에 욕심이 많아야 한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되지만 우리 형제들은 100배나 더 커지기를 원한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개인 전도를 해서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어떤 한 형제를 6개월 정도 끌고 다녔는데 나가버리고 말았다.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6개월 동안을 매 주일 찾아가서 이야기했는데,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라고 하면서 나는 개인 전도를 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서 말씀을 하기는 하는데, 개인 전도는 못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자 어떤 것을 다 주신 것 같다.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대로 어떤 것을 다 주신 것 같다. 그것이 주님에게만 사용되면 아주 귀한 것이 될 수 있다. 모두 나같이 될 수는 없다. 모두 나 같은 사역자가 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것을, 어떤 사람에게는 저런 것을 주셨다. 그것을 잘못하면 사탄이 이용한다. 하나님이 쓰려고 만들어 놓으신 것을 사탄이 이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좋은 것인데 만일 사탄이 사용하면 큰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한다. 주의 나라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원한다.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다른 어떤 소질들을 갖고 있는 형제들은 그것을 백분 발휘해서 내게 없는 것을 백분 보충해 주기를 원한다.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오는 동안 나 한 사람으로 인해서 왔기 때문에 어느 면에서는 상당한 제한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나를 중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제한을 갖고 있다. 이제는 형제들이 모두 하나하나의 자기 특성을 나타낸다면 이 제한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해방되자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각자 특성을 나타내면 해방될 수 있다. 각기 다른 특색을 드러냄으로써 이 제한 속에서 더욱 더 크게 해방될 수 있을 것이고, 그리스도의 영역이 더욱 더 넓어지게 될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각자 자기대로 완전하게 자기를 표현하기를 원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서 완전히 사용하게 되기를 바란다. 주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사용해 주신다면 얼마나 풍성한 세계가 되겠는가?
[ 기 도 ]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 눈이 멀고 귀가 어둡고 마음이 둔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세계와 듣게 해주신 말씀을 듣지 못하고, 캄캄한 암흑에서 헤매고 살았습니다. 주님이 어느 날 우리 눈을 뜨게 해주시고, 귀를 열어 주시고,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셔서, 주의 마음을 알게 해주시고, 주님의 세계를 보고 듣고 만지도록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진 바 된 사실을 세상 앞에 자랑할 수 있게 해주시고, 어둠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빛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말씀 안으로 인도하여 주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갖게 하여 주시고, 새로운 귀를 갖게 하여 주시고, 새로운 마음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 안에서 주님께서 하나를 나타내 주시고, 당신의 사랑하심과 은혜로우심을 증거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이 빛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늘 새롭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침체되지 못하도록 해주시고, 우리가 잠자지 못하도록 해주시고, 우리가 굳어지지 않도록 해주시고, 우리를 분열되지 않도록 해주시고, 우리가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이 늘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를 신선하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이 영원히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