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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헛똑똑이 : 겉으로는 아는 것이 많아 보이나, 정작 알아야 하는 것은 모르거나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_ 네이버 국어사전]
[ book-smart/school-smart... Book smart are intelligent and very well educated academically .... but naive, easily manipulated, and have bad judgment in bad situations. ]
헛똑똑이 시대
개인이 똑똑해질수록 세상의 위기와 고통은 가중된다 !
조율 / 홍진북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131332
- 출판사 제공 책 소개 -
헛똑똑이 시대를 넘어서
겉으로는 아는 것이 많아 보이나, 정작 알아야 하는 것은 모르거나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헛똑똑이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사람들은 지금, 백과사전을 손에 쥐고도 백치처럼 행동하고 있다. 박사학위를 손에 쥐고도 박제된 지식에 놀아나고 있다. IMF사태를 맞은 대한민국에게 신실한 충고를 아끼지 않던 미국이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휘청 주저앉았을 때, 그것이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현 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과학적 세계관' 혹은 ‘헛똑똑이 현상’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사실상 필연적인 교육의 결산이다. 이 시대의 문제는, 교육 부족때문이 아니라 제대로 된 교육때문에 주로 발생하고 있다.
홍진북스에서 야심차게 출간한 [헛똑똑이 시대]는 혼돈스런 세상에서 자기 주관을 통해 자신의 주인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기존에 인문(철)학이라는 것에 대한 거리감 혹은 두통을 한번이라도 느껴 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사회적 문제, 헛똑똑이 현상으로 확대 발전되는지를 일목요연하게 확인하는 소중한 교두보가 될 것이다.
유기적인 조감이 필요하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비리, 살인, 자살, 투기, 매춘, 횡령, 사교육 등 각종 사회 문제들이 경쟁적으로 보도된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세상의 문제들에 대해 어느 시대보다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그런 세태에 대해 안타깝다는 식의 첨언을 하는 것 이외에 개선 가능한 해법은 거의 제시하지 않는다. 학자들 역시 총체적이고 일관되게 인지할 수 있는 통찰과 해법을 제시하는 대신 '과학적으로' 특정 대상이나 현상만을 주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 만큼은 '명확하게' 인지하지만 일상 속에서 실천 가능한 해법은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덕분에 부정적 사회 현상들은 도도하게 확대 강화되고 있을 뿐더러, "타락한 이 세상 자체가 문제다"는 식의 염세주의와 세상 혹은 상대에 대한 막연한 반발이 무슨 진보적 가치나 되는냥 기승하여 개혁의 결집력마저 와해되는 현상이 초래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과학 중심의 이 시대에 대학을 비롯한 지식계의 구조는 정치, 경제, 종교, 물리, 화학, 생물, 무용, 연기, 음악 등 각종 분과로 나눠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제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는 세상, 그 속에 살아가는 일반인들은 그 각각의 주제들을 그다지 별개의 것들로 느끼지 않는다. 다시말해, 분야별로 파편화된 문제를 사람들이 제 것으로 느끼고 생활 속에서 '상식적인 조율'을 꾸려가기 위해서는 과학적 분과로 나뉜 모든 주제들을 유기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시야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얘기한다.
인문학은 없다
내용이 긍정이건 부정이건, 인문학은 시대의 세계관을 관할하는 학문이다. 구체적인 과학 지식들은 총체적인 인문(철)학적 주제들이 단절적으로 분화되어 뻗어나간 것이다. 인문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떠나, 애초 모든 학문의 허브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인문학 ‘비판’을 통해 시대의 문제를 드러내고자 한 것은, 파편적으로 드러나는 현실 문제들의 근본 뿌리를 추적해 들어간다는 점에서, 차별화된 접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수없이 많은 생소한 개념들로 도배된 인문학은, 종합적인 차원에서 볼 때, 세상의 혼돈을 가중시키는 또 하나의 혼돈이었다. 물론 학자들은 제 분야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세상에서 바른 길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주 찬물을 끼얹었다. '눈앞에 보이는 사물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는 헛소리의 주인공을 ‘경험론’의 대가로 칭송하면서, 현실과 함께 호흡하지 못하는 본색을 드러낸 것도 그들이었다. 또한 태극을 묻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무극이라고 하고 무극을 물으면 태극이라고 대답함으로써, '고양이는 야옹이, 야옹이는 고양이'와 같은 순환논리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도 명확히 드러냈다.“
이 책은, 인문학이 소위 식자들의 밥그릇을 보존하기 위해 난삽한 전문 지식이나 초월적인 관념의 장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몇몇 고전 혹은 특정 사상가들의 볼모로 잡혀 있는 인문학을 새로운 관점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인문학은 인간다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는데 필요한 상식이 되어야지 그 분야의 전문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논리적 쓰레기’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주체성을 위하여
저자에게 일상의 현실과 학문은 두 개로 분리된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세계다. 그의 인문학적 문제의식은 결코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는다. 사회의 복사판인 중고교 교실에서 구조적인 모순을 느끼고 비판의식을 키워가며, 그것이 세계관을 주관하는 인문학의 모순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추적해가는 1장의 이야기는 그래서, 이 시대의 문제를 드러내는 자화상이 될 수 있다.
이 책이 기존의 인문학 서적과 차별화되는 점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우러나는 감상적인 이야기에 머무르거나 혹은 현실 초월적인 형이상학에 천착하지 않고 현실의 감성과 학문의 이성을 유기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삶의 현장에서 느끼고 고뇌했던 문제의식들의 압축된 이야기를 통해 헛똑똑이 세계관이 어떤 식으로 주입되고 현실로 확대 발전되는지를 풀어내는 동시에, 전 지구를 장악하고 있는 인문학적 사상, 특히 2500년에 걸친 서구 사상이 어떻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상식적인 관점'에서 일목요연하게 풀어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플라톤, 데카르트, 니체 등의 사상가에 압도당하는 대신 오히려 그들과 그들의 사상이 양산하고 있는 시대의 혼돈을 합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관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주체적 판단을 위해서는 스스로 세계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힘이 필요하다. 스스로 분석과 해석을 한다는 것은, 예컨대 남들이 웃거나 눈물 흘릴 때도 마음을 다잡고 사태를 관망할 수 있다는 의미다. 주체적인 삶을 위해서는, 제 스타일에 맞게 타인의 개성을 '고쳐'주거나 제 부조리를 방치한 채 고위층 부조리를 비난하는 대신, 남들 울고 웃을 때 같이 울고 웃으면서도 독창적인 삶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헛똑똑이 증후군을 주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으로 고쳐가야 한다.“
그와 같은 주체적 판단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대를 폭넓게 장악한 '헛똑똑이 현상'의 원인과 구조를 가감없이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세상을 비웃고 타인을 비방하는 것은 노력 없이 할 수 있지만 세상을 껴안고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노력 없이 할 수 없다. 세상의 문제는 오직, 개인들이 구체적 사안에 대한 모순을 인지하여 개별적인 동시에 집단적으로 고쳐나가는 것으로만 ‘전체의 질서’로 환원된다. 실천하지 않는 진리는 비리로 타락할 뿐이다. 개인과 사회, 그 높은음과 낮은음의 합창을 협화음으로 만드는 것은 모두의 깨어있는 혜안과 역량에 달려 있다.
그와 같은 관점이 정녕 현실의 협화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주입식 교육’과 ‘박제된 인문’의 현실을 넘어 개개인 모두가 합리적인 주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헛똑똑이 시대]는 그 주체성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상식적인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세상에 많이 배운 '헛똑똑이'가 이렇게 많은 이유
데이비드 롭슨 '지능의 함정' 번역 출간
입력 : 2020.01.16. 08:00:05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20/01/51714/
(서울 = 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 두 명의 남자가 혼령과 인간을 매개하는 '영매'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A는 그것은 단지 속임수일 뿐이며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B는 영매의 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반박한다. 의대 출신으로 '셜록 홈스'라는 인물을 창조해낸 작가 코넌 도일과 학교 교육은 12살까지밖에 받지 못했고 묶인 줄을 풀고 나오는 묘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은 헝가리 출신 곡예사 해리 후디니가 그 두 사람이다. 대부분 A가 도일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영국 과학 전문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롭슨이 쓴 '지능의 함정'(김영사)은 이처럼 지능이 높고 학력이 우수한 '똑똑한' 사람들이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는 일이 많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실증적 연구들을 검토해 그 이유를 규명하고 대책을 강구하려 한다.
애플 설립자 스티브 잡스는 의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엉터리 치유법으로 암을 이기려다가 죽음을 재촉했다. 온라인 데이트 사기에 본의 아니게 마약밀매 조직 운반책 역할을 하다 체포된 폴 프램튼은 새로운 암흑물질 이론 등에서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명석한 물리학자였다. DNA 대량복제를 가능케 한 기술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캐리 멀리스는 외계인과 별자리를 믿을 뿐만 아니라 인간은 '에테르'라는 물질을 통해 '아스트랄계'라는 천체계를 돌아다닐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들과 같은 '헛똑똑이'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본다.
저자는 수많은 심리학과 신경과학 연구 결과를 인용해 합리성과 지능의 상관관계는 절대 완벽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오류에 빠지기 쉬운 것은 자신의 지능을 편향과 합리화에 동원하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세계관에 갇힌 사람은 결론이 애초에 자기가 정한 목적과 맞을 경우에만 자기방어적으로 두뇌를 가동하기 때문에 타인의 허점은 발견하면서 자기 논리의 편견과 오류는 외면하는 성향을 띠게 된다.
또 객관적 근거를 묘한 방식으로 재배치하거나 무시해 자신의 편향을 확증하는 비합리적 결론을 내리고 만다. 그리고 자기 전문성을 확신한 나머지 타인의 관점을 무시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폐쇄적 사고방식으로 생각과 판단이 한 방향으로만 굳어져 융통성이 없어지는 현상을 불러온다.
도일의 경우 요정을 믿는 것을 합리화하는 데 자신의 지적 능력을 최대한 동원했다. 요정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로 전자기 이론을 들먹이는가 하면 어린 학생들이 장난삼아 만든 요정 사진 속 핀 자국이 요정의 배꼽이라고 주장하면서 "요정들이 자궁에서 탯줄을 통해 어머니와 연결된 증거"라고 주장하는 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맹신한 데 따른 오류는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에서도 나타난다. 미국 연방수사국은 192명이 죽고 2천여명이 다친 2004년 마드리드 폭탄테러를 조사하면서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았다가 굴욕적인 사과를 해야 했고 케네디 행정부 최고의 두뇌들이 기획한 쿠바 피그스만 침공은 어이없는 실패로 끝났다.
저자는 근대 합리론의 비조인 데카르트가 1637년 '방법서설'을 통해 '지능의 함정'을 잘 설명했다고 지적한다. "머리가 좋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그걸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옳은 길로만 간다면 너무 서두르다가 길을 잃는 사람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
'지능의 배신'에 대처하는 길을 제시하는 새로운 과학도 등장했다. 저자가 힘주어 소개하는 '증거 기반 지혜(evidence-based wisdom)'다.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문제를 합리적이고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현실적 능력인 지혜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책에서는 여러 전문적인 개념과 기법들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만 핵심은 사고 능력은 지능과 달리 훈련이 가능해서 지능지수(IQ)에 상관없이 누구든 좀 더 지혜롭게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문제를 정의하고 다른 관점을 찾아보고 사건이 불러올 다른 결과를 상상하고 잘못된 주장을 골라내는 연습을 하면 지혜롭게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에서 밝혀진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는 능력과 지적 겸손 같은 자질이 행복을 예견하는 지표로서 지능보다 우월하다는 점은 천재가 아닌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고무적이라고 여길 만하다.
이창신 옮김. 432쪽. 1만7천800원. [연합뉴스]
[책 속으로] 우리들은 헛똑똑이, 그런데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지식의 착각 스티븐 슬로먼, 필립 페른백 지음 // 문희경 옮김, 세종서적
[중앙일보] 입력 2018.03.10 00:02
https://news.joins.com/article/22428835
당신은 양변기를 잘 알고 있는가. ‘레버를 내리면 물이 찼다가 한꺼번에 빠지면서 오물을 같이 내려보내는 장치’. 대개 이 정도 답을 떠올리며 웬만큼은 안다고 자부할 것이다. 그러나 작동 원리를 설명하라고 하면? 대기압, 중력, 유속과 압력의 관계 같은 물리적 법칙을 동원해 양변기의 기본 원리인 ‘사이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인지심리학에서 쓰이는 ‘설명 깊이의 착각’ 실험은 인간이 ‘헛똑똑이’라는 사실을 여지없이 입증한다. 연구팀은 피실험자들에게 지퍼·볼펜 같은 간단한 물건의 작동 방식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스스로 평가하게 했다. 평균 중간 정도의 점수가 나왔다. 하지만 작동 방식을 설명해보라고 요구하자 대부분은 쩔쩔맸다. 그런 뒤 다시 점수를 매기게 하자 그 값이 크게 낮아졌다. ‘지식의 착각’이 깨진 것이다.
인지과학계의 스승과 제자인 두 저자에 따르면,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무지하다”. 실은 별로 보잘것없는 자신의 지식·직관·이해 능력을 과신한다. 미국인 절반은 항생제가 박테리아뿐만 아니라 바이러스까지 죽인다고 잘못 알고 있다. 우주가 거대한 폭발(빅뱅)로 시작했다는 것을 아는 미국인은 38%에 그친다.
신기한 것은 이런 무지 속에서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그 열쇠는 ‘의도를 공유하는 집단’ 속에서 ‘인지 노동’을 분배하는 인간의 능력이다. 우주 탐사 프로젝트를 보자. 모든 사람이 그 거대하고 복잡한 과정 전부를 알 필요는 없다. 오히려 옆 사람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앞의 임무에만 신경 쓸 때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 “지성은 개인의 머릿속이 아니라 집단의 정신에 깃든다.” 이른바 집단 지성의 위대함이다.
결국 건강한 ‘지식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덕주의 같아 어쩐지 싱겁다. 하지만 결론을 위해 사용된 다양하고 흥미로운 역사적·과학적 논거가 이런 싱거움까지 용서하게 만든다. 개인 지성에 대한 겸손한 반성이라는 책의 취지가 자칫 집단주의에 대한 찬가로 오독될까 걱정스럽긴 하다.
이현상 논설위원 leehs@joongang.co.kr
헛똑똑이들의 최후 /이범용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nja1999&logNo=221983797479
헛똑똑이들의 공통점은 '다 안다고 착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고 그 내용들을 다 안다고 착각합니다. 그렇지만 한 달 뒤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못 합니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나의 지식을 타인에게 설명할 줄 알아야 비로소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설명할 줄 안다는 것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니 제발 책을 읽은 후 다음 책을 의무적으로 읽기 위해 조급해하지 말아 주세요.
밑줄 친 곳을 다시 재독하거나, 필사를 하거나 나의 생각을 버무려서 글을 쓰고 서평을 남기세요. 한 발 더 나아가서, 한 가지라도 실생활에 적용해 보세요.
이렇게 책을 읽고 강의를 들은 후 내 것으로 만드는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만 남에게 설명할 수 있고 그때야 비로소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두 번 들어 본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헛똑똑이들은 평생 콘텐츠 소비자로만 살아야 하는 종신형에 처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데이터 시대, 데이터만 알면 헛독똑이...
조재근 / 경성대학교 수학응용통계학부 교수
http://sti.kostat.go.kr/window/2019a/main/2019_sum_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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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전문가에서 시민 데이터 과학자로 거듭나야
입시면접 때 통계학과에 지원한 학생들을 만나 지원 동기나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다들 빅데이터 전문가, 또는 데이터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한다. 한해에 몇 차례씩 여러 지방에 있는 고등학교에 특강을 하러 가서도 “통계학 전공 학과에 가면 빅데이터 전문가가 될 수 있나요?”와 같은 질문을 자주 받는다. 고등학생들 역시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가장 유망한 직종 중 하나가 바로 데이터 전문가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기업이나 연구기관 등에서 데이터 과학자의 몸값은 매우 높은 편인데, 찾는 곳은 많지만 능력을 갖춘 사람은 턱없이 적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최근 국내 대학에서도 통계학과의 데이터 교육을 강화하거나 데이터 과학을 전공하는 학과를 새로 만드는 곳들이 늘고 있다.
바야흐로 데이터의 시대가 온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통계학은 많은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지만 ‘통계학의 시대’라는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데이터 혁명’, ‘데이터의 시대’와 같은 표현을 흔히 쓴다. 과거 통계학이 맡았던 역할보다 현재와 미래 세상에서 데이터와 데이터 과학이 훨씬 더 광범위한 영역에서 더 중요한 몫을 담당한다는 뜻이겠다.
그런데 사실 데이터 과학이 무엇이며 데이터 과학자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속 시원히 답하기가 어렵다. 대학에 이미 자리 잡은 다른 분야들과 달리 데이터 과학은 아직 여러 면에서 틀이 잡히지 않은 새로운 분야이고 융합적인 분야이며 또 앞으로 굉장히 빠르게 변화할 분야라서 쉽게 규정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벌써 인력이 많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데이터 과학이 어떤 단일 전공만 공부해서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일 테다. 데이터 과학은 수학, 통계학, 컴퓨터과학 등 여러 분야에 대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공부가 필요한 분야인데 그런 사람을 찾기란 당연히 매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런 사람을 단기간에 집중적인 교육을 통해 속성으로 많이 키워내는 건 아예 불가능한 노릇이고.
그렇다면 많은 일자리들이 급속히 사라진다는 4차 산업혁명의 와중에서도 데이터 분야의 일자리들은 대체되지 않고 오롯이 남을 수 있다는 말일까?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이 필요한 일자리뿐 아니라 약사, 의사, 변호사, 교사 등의 안정적인 일자리들까지 사람이 아닌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맡게 된다는 세상에서 데이터전문가는 장차 오래도록 유망한 일자리일까? 아쉽게도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20년이 되면 데이터과학자가 하는 일의 절반 가까이가 자동화될 것이라는 전문가의 예측이 이미 몇 년 전에 나온 바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의 어느 대학에서는 데이터 수집에서 분석과 보고서 만들기까지를 알아서 해내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자동화된 통계전문가(automated statistician)’라는 이름으로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데이터전문가 역시 다른 직종들과 다름없이 자동화의 물결을 벗어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를 살아갈 세대들이 할 일은 세상이 어떻게 되든 살아남을 드문 직종을 찾아 헤매는 대신 근본적으로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일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과연 무엇일지를 묻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관점을 넓혀보면 이제 데이터라는 것을 일자리와 분리하고 데이터 전문가의 역할도 달리 생각해볼 수 있겠다. 최근 기업에서는 데이터 과학자에게 필요한 전문적인 지식은 충분하지 못하지만 현장 비즈니스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서 자동화된 시스템과 경험을 적절히 활용하여 데이터과학자처럼 일하는 사람을 ‘시민 데이터 과학자(Citizen Data Scientist)’라 부른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 사람이 기업에만 필요할까? 모든 것이 데이터가 되고 그런 데이터가 자원이자 자본이 되는 시대라면 데이터 문제가 곧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이고 기본적인 인권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데이터로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에서 시민을 위해 일하는 진정한 의미의 시민 데이터 과학자가 더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아가 데이터과학자로서의 전문성까지 갖춘 시민 데이터 과학자라면 이웃 시민들의 공익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경제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데이터가 중요해지는 만큼 데이터전문가의 사회적 책무도 점점 무거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대를 읽는 안목을 갖추지 못하고 그런 사회적 요구에 대해 눈감는다면 19세기와 20세기에 나온 소설에서 그랬듯 21세기의 작품 속에서 데이터전문가들은 또다시 조롱거리가 되어버릴지 모른다. 21세기를 데이터의 시대라고 부르는 이유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데이터전문가를 자처한, 세상 물정 모르는 헛똑똑이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