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염장이
유재철 지음
김영사
‘아직 5월인데 정말이지 더운 날이었다. 이 더위 속에서 칠일장은 불가능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나는 직접 나서서 엠바밍(embalming) 작업을 했다. 엠바밍은 시신 부패 방지를 위해 몸 속에 약품을 넣으면서 피를 빼내는 작업이다. 자세히 얼굴을 살펴보니 굳게 다문 입술에서 한 시대를 모두 짊어진 듯한 깊은 고뇌와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았을 굳건한 의지가 느껴졌다….’
책 속에 담은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염습(殮襲) 장면이다. ‘대통령 염장이’로 이름난 유재철 대한민국장례문화원ㆍ연화회 대표가 그의 경험을 담은 책을 냈다. ‘대한민국 장례 명장이 어루만진 삶의 끝과 시작’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모습 [중앙포토]
그는 2월 현재까지 서거한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9명 중 최규하ㆍ노무현ㆍ김대중ㆍ김영삼ㆍ노태우ㆍ전두환 등 여섯 분의 장례를 도맡았다. 때문에 책은 앞으로도 역사책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을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마지막 길을 기록한 것이다. 동시에 여섯 대통령의 장례식을 연이어 맡으면서, 그간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국가장의 의미와 의례를 잡아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유 대표는 어떻게 대통령 염장이가 될 수 있었을까.
그는 “2005년 대학원에서 장례문화학과를 다니며 석사 논문을 쓰게 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사례 분석을 통한 한국 단체장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의 논문이었다.
과거 대통령이나 유명인의 장례절차 기록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당시 행정자치부가 보관해온 육영수 여사의 장례자료가 비밀해제돼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대통령 염장이' 유재철 대한민국장례문화원ㆍ연화회 대표[중앙포토]
그렇게 세상을 떠난 대통령 및 가족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정부에도 장례 등 의전을 담당하는 직원이 있지만, 누구에게든 대통령의 장례식은 생경할 수밖에 없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2006년 최규하 대통령 장례식을 시작으로, 여섯 대통령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전직 대통령뿐 아니라 법정ㆍ숭산 등 큰스님들과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 등 재벌총수들, 이매방 무용가, 배우 여운계씨 등 유명인사들의 장례도 담당했다.
책에는 이건희 회장 장례에 관한 얘기도 자세히 담겨있다. 그는 2020년 10월25일 오대산 육수암에서 한 스님의 다비를 마무리하다 삼성 직원이라고만 알린 한 남자의 전화를 받았다. 삼성측은 11년 전인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 때부터 지켜봐왔다고 유 원장에게 털어놨다.
노태우 전 대통령 국가장 영결식 모습. [중앙포토]
책은 대통령과 유명인사의 장례기록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마지막을 지킨 장례 지도사가 들려주는 죽음과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책에는 수천가지 죽음의 얼굴과 웰다잉 안내자라는 주제 아래 64편의 글이 실려있다.
그가 30여년간 수천명의 마지막 길을 지키며 겪었던 에피소드, 그 과정에서 깨달은 죽음과 삶에 대한 통찰, 왜곡돼온 우리나라 장례문화에 대한 성찰 등을 담고 있다.
출처: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