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화장
옛날 선사시대의 유적으로서 바닷가에는 패총이라고 하는 조개 무덤이 있는데, 그 안에서 나온 유물로서 조개껍질로 만든 목걸이를 박물관에서 본 일이 있다. 원시인 여자도 조개껍질 목걸이를 걸고 다녔다는 것이다. 여자가 미를 추구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본능일 것이다. 여자아이를 키운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여자아이는 아주 어려서부터 화장하는 엄마 옆에서 분이나 크림을 바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자가 화장하고 싶어하는 것은 교육의 산물이 아니오, 본능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점점 여자의 화장이 진해지고 있다. 직장여성은 물론이요, 여대생, 심지어는 여고생까지 화장을 하여 얼굴의 본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나는 진한 화장을 한 여자를 보면 본능적으로 호감이 가지 않는다. 이것은 나의 편견인데, 어쩔 수 없는 편견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다양한 하나의 생태계이므로 나처럼 편견을 가진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 않은가?
옛날 조선 여인이 사용한 화장품은 대개가 식물성이었다. 손톱에는 봉숭아물을 들이고, 눈썹은 숯이나 보리 깜부기로 그리고, 분꽃 씨앗으로 분을 만들어 칠하고, 청포잎 다려 머리를 감고, 모두 식물에서 나오는 무공해 화장품이었다. 그러나 육식을 했던 서양에서는 화장품은 동물성이 많았다. 로마의 폭군 네로의 처인 사비나는 매일 나귀 젖으로 전신 화장을 하였는데, 여행을 할 때면 나귀를 수백 마리씩 끌고 다녔다고 한다. 1세기 경의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화장법이 나온다.
“부인들이 흰 피부를 유지하고 주름살을 없애는 데는 송아지의 발굽뼈와 쇠갈비뼈를 사십 일 동안 주야로 곤 아교질 즙이 좋고, 암소의 분을 볼에 바르면 장미빛의 피부색이 영롱해지는데 악어 창자를 구해 바르면 더 좋다.”
나는 서양 여자와 조선 여자를 장미와 무궁화로 비유하고 싶다. 장미는 현란하다. 그러나 아름다움 뒤에는 가시가 있다. 빨간 장미는 그 꽃잎이 매우 진한 붉은 색으로서 붉다 못해 검기조차하다. 서양 여자는 대개 장미같이 진한 화장을 한다. 서양 여자는 오십대에도 빨갛게 입술을 칠하고, 붉게 연지를 바르고, 빨갛게 매니큐어를 칠한다. 장미에 비해 무궁화 꽃의 색은 은은하다. 다섯 조각 꽃잎의 안쪽에는 장미처럼 붉은 부분이 조금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은은한 연분홍빛 꽃잎이다. 조선 여자는 무궁화처럼 화장을 한다. 조선여자는 연지도 그저 발그레하게 칠하고, 입술을 칠해도 살색보다 약간 붉을 정도다. 손톱에는 역시 은은한 연분홍빛 봉숭아물을 들인다.
서양 여자는 늙어서 화장을 안 하면 매우 보기 흉하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 좀 심하게 표현하면, 마귀할멈 같은 인상이다. 오랫동안 화장품을 많이 쓰다 보니 화장독이 올라 살갗은 나이보다 훨씬 빨리 늙는다. 그러나 조선 여자는 늙어서는 잘 화장을 하지 않는다. 늙지 않게 보이려고 안달을 하지 않는다. 늙어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얼굴 대신 마음을 가꾼다. 곱게 늙은 할머니의 얼굴은 화장을 하지 않아야 아름답다. 그동안 식물성 화장품을 썼기 때문에 피부는 상하지 않았고, 고운 살결이 유지될 수 있었다.
장미와 무궁화의 떨어진 꽃잎을 본 적이 있다. 장미나무 아래에는 꽃잎 하나 하나가 마르고 퇴색하여 매우 추한 모습으로 흩어져 있었다. 매우 보기 흉했다. 그러나 무궁화나무 아래에는 꽃송이가 꽃이 피기 전 모습으로 다시 오무라진 고운 무궁화 꽃이 아름답게 흩어져 있었다. 나는 떨어진 무궁화 꽃을 보고서 한눈에 반하였다. 나는 장미를 닮은 서양 여자보다는 무궁화 같은 조선 여자가 좋다.
우리 학과에는 여학생이 1/4을 차지한다. 공과대학의 다른 학과에 비해 여학생이 많아 다른 교수들은 우리 과 교수들을 부러워한다. 여학생들을 몇년 대하다 보니 학년별로 약간 차이가 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신입생은 아직 여고생 티를 다 벗지 못한 앳된 모습이다. 2학년은 이제 슬며시 멋을 부리기 시작한다. 3학년은 화장도 잘하고 원숙한 모습이다. 4학년은 대4병이라는 말도 있듯이 취직 걱정 하느라고 어두운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대학생 시절은 인생의 청춘시대이므로 여학생들은 다 예쁘다. 그러나 굳이 비교하라면 2학년이 가장 아름답다. 꽃으로 비유하면 1학년은 피어나는 꽃이고, 2학년은 방금 핀 꽃이고, 3학년은 피어 있는 꽃이고, 4학년은 조금 전에 피었던 꽃이다.
남자 교수는 항상 젊은 여대생들과 지내므로 늙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어느 정도는 맞을 것이다. 그러면 여자 교수는? 내가 생각하건대 여자교수는 해마다 스트레스가 늘어날 것 같다. 해마다 젊고 예쁜 여학생들이 신입생으로 들어오는데, 거울 속의 자기는 점점 더 나이가 많아져 간다. 한때는 미인 소리를 들었을지라도 젊은 여대생을 어떻게 당할 수 있을까? 자기와 여학생과의 나이 차이는 해마다 늘어가니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 질문은 여교수에게 꼭 해보고 싶은데 아직 한 번도 물어볼 수는 없었다. 여교수와 한 집에 사는 남자교수에게 언제 한번 슬쩍 물어 보아야겠다.
어느 해 봄날에, 교정에는 꽃이 눈부시게 만발하고 날씨가 참으로 좋았다. 그런데 강의실에 들어가니 내가 싫어하는 화장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여학생들에게 해주었다.
“너희들은 예쁘게 핀 꽃과 같다. 너희들 나이에는 화장을 하지 않아도 아름답다. 아니, 오히려 화장을 한다면 아름다움을 감하는 셈이다. 아름다운 꽃에 다시 페인트를 칠하거나 물감을 칠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여자가 화장을 하지 않고 사람을 만나면 실례라는 말이 있다는데. 그 말의 출처를 알아본 일이 있다. 화장품 회사에 다니는 내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 말은 화장품 회사에서 지어낸 말이라고 한다. 괜히 산소 같은 여자니, 수세미 같은 여자니 하는 광고에 속아서는 안 된다. 괜히 돈 들여 아름다움을 감추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라. 대신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화장품을 가르쳐 주겠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화장품은 ‘젊음’이라는 두 글자이다.”
(1994.6.)
첫댓글 이 글 역시 20년 전에 쓴 글입니다. 그동안 세태는 많이 변했습니다. 이제 50대 여자는 대개 화장을 합니다. 60대 여성도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발톱에 뭘 칠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초등학교 여학생도 화장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태평양화학(아모레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이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제 화장은 여성의 필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30년 전에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는 화장을 안해도 매우 고왔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나의 할머니의 화장 안한 고운 모습이 정말인지 나의 착각인지. 어쨋든 시대의 풍조는 계속 변한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요즘에는 젊은 직장 남성들도 화장품을 사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모를 치장하는데 많은 돈을 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