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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나카무라 일성(中村イルソン), 재일동포 3세, 오사카출신
마이니치 신문기자를 거쳐 현재 프리 저널리스트
「르포, 교토조선학교습격사건(2014년)」 「르포, 사상으로서 조선적(2017년)」 (岩波書店)
’조선학교‘라는 권리⓵_오사카편
보조금 동결의 발신지에서
목청 높여 행동하는 자이니치 4세
각지의 조선학교가 소송을 벌이고 있는 고교무상화 적용을 요구하는 재판이 올 여름부터 판결이 이어진다.
이에 앞서 조선학교의 현재를 전하는 첫 번째 연재_ 하시모토 토오루가 전 지사였던 오사카부터.
’수치심을 잊은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 홍성담‘
화요일 정오, 오사카시 주오구 부 청사 앞에 10여명이 모여든다. 조선학교의 고교무상화 적용과 오사카부·시의 보조금 지급 재개를 요구하는 <화요행동>이다. 부내 전체 10개교의 보조금이 정지된 직후인 2012년 4월 17일에 시작해 5월 2일인 이날로 242회째다. 「고교무상화 적용을!」 「아이들에게 미소를!」 홍보 걸개를 착용한 사람들이 청사를 드나드는 직원들에게 전단을 배포한다. 어느새 참가자는 30여명으로 늘어났다.
작은 체구의 젊은 여성이 「조선학교 차별반대」 현수막을 차도 쪽으로 양손에 펼쳐 들고 오가는 차량이 볼 수 있게 내민다. 마이크 릴레이가 시작되자 ’젊은이 대표‘로 신령슬(1997년생)에게 마이크가 건네졌다. 정면에 있는 청사를 올려다보며 신씨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발언을 시작했다.
“여러분은 저를 마주하려 하지 않으시네요. 눈을 보며 전단을 나눠 드려도, 깃발을 흔들어도 시선을 피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왜 일까요? 저는 일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사회를 만들고 싶은 마음에 매주 진심을 다해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 저의 눈을 보아 주세요!”
와카야마현 출신의 자이니치 4세. 중학교까지 이 지역 조선학교를 다녔고, 재작년에 오사카 조선고급학교를 졸업했다. 고교무상화 배제라는 지극히 노골적인 차별 속에서 고교생활을 마친 조선고급학교 졸업생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고교무상화 실시가 구체화 된 2009년, 그녀의 큰오빠는 오사카 조고생이었다.
“와카야마에서 통학하면 정기통학권 비용만 1인당 연간 24만 엔이 듭니다. 부모님은(소득보장이 없는 조선학교) 교원을 그만두시고, 다른 일을 하시며 저희들을 유치원부터 조선학교에 보내주셨습니다.
‘드디어 바라던 날이 왔구나’ 하고 식탁에 둘러앉아 상당히 흥분했었죠.”
고교시절은 권투부에 몰두했다고 한다. 허리를 곧게 펴고 똑바로 내 눈을 바라보며 말한다. 씩씩한 모습에 나까지 자세가 곧아진다. 외국인학교도 적용 대상으로 삼은 이 제도는 ‘평등’의 새 장을 열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런 전망은 이내 사그라지고 말았다.
“아아, 그럼 그렇지 했죠. 차별에 익숙해 진거죠.”
동시에 진행된 것이 오사카부의 보조금 중단 문제였다.
그녀의 큰오빠는 오사카 조고를 졸업 후 도쿄국립대학에 진학, 변호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자이니치는 법률로 싸워 이기는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시선을 돌리며 말을 잇는다.
“오빠가 가르치는 일을 무척 좋아해서 원래는 조선대학교에 진학해 교사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조선대학교에 법률학과가 생긴 99년 이후 사법시험에 응시한 34명 가운데 16명이 합격했다. 상당히 높은 합격률이다. 그녀의 오빠처럼 조고에서 법과대학원이 있는 일본대학에 진학하는 사람까지 합하면 조선대학교 출신의 합격자는 조금 더 늘어난다. 그 선구자인 김순식(도쿄 변호사회)씨에게 이유를 물어 본 적이 있다. 우문에 쓴웃음을 지으며 그가 말했다.
“그거야, 마음가짐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죠. 우린 그것밖에 가진 게 없으니까요.”
하시모토가 저지른 ‘폭력’
전국의 각 지자체로 번진 조선학교에 대한 보조금 중단. 유엔 인권위원회로부터 거듭 비판을 받은 레이시즘은 이곳 오사카가 최초의 발신지였다.
도화선은 민주당(당시)의 공약, 고교무상화다. 2010년 2월, 조선학교를 대상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한 나카이 히로시 납치문제담당대신의 요청에 당내가 술렁이자, 하시모토 토오루 부지사(당시)는 같은 해 3월, 북한과 관련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보조금 재검토를 표명, ‘조선총련과 선을 그을 것’ ‘김일성부자의 초상화를 교실에서 철거할 것’ ‘학습지도 요령에 준한 교육을 실시할 것’ ‘재무상황을 일반에 공개할 것’ 등 이른바 4대 요건을 학교 측에 강요했다.
‘사학의 자유’를 향해, 심지어 재량 확보와 맞바꾼 각종학교에 만족하고 있는 조선학교에 개입한 것이었다. 보조금이 당시로서는 총 1억 엔을 넘는 사학 지원의 30% 정도라고는 하나, 학교운영비의 10%에 상당하는 금액이다. 하시모토는 만성적 재정난에 허덕이는 학교의 약점을 안 것이다. 하시모토가 공적자금을 지원하려면 오사카부 주민을 납득시킬 규칙이 필요하다고 거듭 주장했으나, 논점을 흐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학교의 존재 여부는 당사자가 결정할 사안이다. 문제는 사사건건 ‘북조선 포비아(혐오, 공포)’를 부추겨 이를 자이니치의 아이들에게 향하게 만드는 사회 병리인 것이다.
단체장의 역할이란 이성적인 대응을 호소하고 어긋난 행위를 비판하는데 있는 것이지, 조선학교를 폄하하는 악질적인 유언비어, 예를 들어 ‘스파이 양성’과 ‘세뇌교육’ 등에 편승해_그 자체가 차별 선동이다_‘강한 리더’를 표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재검토 표명 후인 3월 12일, 하시모토는 히가시오사카시에 있는 오사카조고를 시찰했다. 식민지주의의 역사가 낳은 사람들이 ‘조선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유지해 온 ‘민족 의지기반’에 들어와 돈다발로 뺨을 때리듯 ‘다수의 요구에 따르라’며 압박했다. 이러한 만행을 오래전 4.24교육투쟁 때 16살 소년이 사살당한 오사카에서 행한 것이다. 학교 측이 어떤 생각으로 하시모토의 시찰을 허락해 주었는지 짐작해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시모토가 찾은 곳은 그녀의 오빠가 있는 교실이었다.
“하시모토씨가 교정에서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아마도 결국에는 보조금을 끊지 않겠나 생각했죠.”
그의 방문은 다음날 여러 신문에 보도되었다. <아사히 신문>(오사카 본사 발행 최종판) 조간 사회면 톱으로 시찰을 마친 하시모토가 이 학교의 럭비부 선수들과 교류 후 선수들에게 받은 기념품을 손에 들고 마치 학생들의 편이라는 듯 미소 짓고 있는 사진이 게재되었다.
권력을 앞세워 ‘우리학교’를 휘젓는 인물에 대해, 그에게 권리를 위협당하고 있는 학생들이 우호의 뜻을 보인것이다. 지금도 계속되는 식민지주의의 폭력이 이 잔혹한 광경에 응축되어 있다. 사진기자는 어떤 생각으로 셔터를 눌렀을까.
하시모토가 한 짓은 70년대 이후 재일외국인의 권리운동이 의지 기반으로 삼아온 ‘지역주민의 권리’ 파괴였다. 뒤를 이은 것은 인종차별의 전염이다. 차별의 바통을 이어가듯 도쿄도의 이시하라 신타로 지사가 도쿄의 조선학교에 대한 보조금 중단을 표명했고, 우에다 키요시 사이타마현 지사를 비롯한 몇 명의 지자체장이 이에 가담했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은 미야기현이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약 보름 후인 2011년 3월 25일, 미야기현은 학교 건물이 전파된 도호쿠조선초중급학교에 보조금을 끊겠다고 통지했다.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를 치우며 복구에 한창이던 때 무라이 요시히로 지사 일행이 그린 도호쿠의 사회상은 ‘타자의 배제’였다.
2011년 3월, 하시모토는 초상화를 내리지 않은 고교에는 보조금 중단을 결정하고 초·중급학교에만 지급을 결정했는데, 일부 의원이 가담해 교직원실의 초상화도 철거하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차별행위의 주체는 반드시 이런 언행을 확산시켜 나간다.
2012년 학교 측은 ‘추가조건’까지도 받아들이며 보조금 지급을 다시 요청했는데, 마츠이 이치로 부지사가 북한에서 열린 ‘영춘공연’(음력설을 맞이하는 행사)에 조선학교 학생이 출연한 것을 문제 삼았고, 해명에 응하지 않았다며 보조금 지급 중단을 결정, 오사카시도 뒤따라 같은 결정을 내렸다. 덧붙이자면 일본학교인 모리모토학원의 사립소학교 설치 규제완화 요청이 있은 후 오사카부가 기준을 완화했던 것이 같은 시기였다.
수치심을 아는 사람이 있는 ‘화요일’
화요행동은 그 직후에 시작되었다. 당초에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방해하러 오기도 해 경찰이 출동한 적도 있다. 참가자들에게 더더욱 상처가 된 일도 있다.
작년 1월 5일, 6살 아이를 안고 전단을 배포하던 학부모 앞을 마츠이 지사가 지나갔다. 무시한 채 지나가려는 마츠이를 향해 “이 아이한테 민족교육을 받을 권리는 없는 겁니까?” 하고 물은 그녀에게 “없어”라고 대꾸한 마츠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지사 측은 발언을 부정하고 있지만, 참가자 2명이 그 소리를 들었다)
신씨가 처음으로 행동에 참가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 2016년 1월 12일 고3 겨울이었다. 한겨울에 길거리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신씨는 놀랐다. 참가자들에게 이토록 열심인 ‘이유’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연세 지긋한 일본인 남성에게 ‘왜 이 자리에 참가해 주시는 겁니까?’ 라고 물으니,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회를 만든데 책임이 느껴져서 여기 서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졸업하지만, 이런 일을 당할 후배들이 없길 바란다' 여건이 되는 한 참가하려 한다고 한 고령의 자이니치 남성은 조선말로 대답했다.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구나...’
이곳에는 수치심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도대체 나는 여태까지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그 이후로 화요행동에 계속 참가했다. ‘보행에 방해가 된다’ ‘이제 그만 하지, 저리 비켜!’하며 손사랫짓 당한 적도 있고, 건네 준 전단을 받자마자 껌을 뱉어 버리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해 보았자 소용없다’며 택시기사에게 비아냥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울컥했지만 졸업생이라는 생각이 버티게 해주었다.
”행동이 끝나고 잉크 때문에 검게 된 손바닥을 보면 오늘도 무언가 해냈다는 느낌이 들죠. 여러 사람의 생각도 들을 수 있고, 올 때마다 새롭게 발견하는 것도 있어요. 시선을 맞춰주지 않는 것이 힘들긴 하지요. 모욕당하는 느낌이거든요.”
전단지 배포는 계속된다. 눈앞에 사람 따위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지나가거나 일부러 차도로 우회해 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시선을 피하며 전단을 받지 않으려 하거나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험악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 이따금 받아주는 이도 있으나 그 뿐이다. ‘매주, 참 애쓴다’ 생각하는지, 그저 흥미로운 것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 공감의 표명인지.
받아 든 전단은 어떻게 할까?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며 버릴까? 아니면 한 번 읽어보기라도 하는 걸까? 하다못해 동료와 얘깃거리로 삼기는 할까?
최근에는 전단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현수막도 펼쳐 들었다. 지난주 전단을 들고 와서 이미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행동에 참가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물었다.
“무관심이죠. 조직의 결정이다, 상부의 뜻이다, 다른 부서의 일이라 모른다,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 속에는 양심이 있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란 생각도 해요... 이런 행동이 통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죠. 하지만 저는 계속 다가가면 상대도 달라질거라 생각해요. 학교 친구들도 저를 이해하고 서명운동도 도와주고 있어요.”
행동이 시작된지 5년이 지났다. 세상의 지탄도 지자체 직원들에겐 ’익숙해져‘ 간다. 이곳에 나와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호소에 끊임없이 귀를 막는 사람들. 이러한 무관심이 아이들에게까지 겨냥된 수치심을 망각한 차별을 뒷받침하고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타자, 특히 타자의 아픔을 헤아리는 것인데, 자칫 일상에 매몰되어 그것을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보조금은 지자체의 은혜?
2012년 9월, 오사카 조선학원은 소송에 나섰다. 고비에 접어든 2016년 4월 증인 심문.
지지자들로 꽉 찬 법정에 선 것은 신씨의 1년 선배였다. 마지막으로 재판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따금씩 떨리는 목소리로 발언을 마무리했다.
“지금 너무나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왜 조선학교가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어야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 모습을 제대로 보아주십시오. 시선을 피하지 말고 마음의 눈으로 봐 주시길 바랍니다.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올바른 판단을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했다. 안이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때 오빠가 했던 ’법률로 싸워 이겨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한 말을 그대로 믿었었죠.”
노골적인 차별은 유엔 인권위원회로부터 수차례 권고와 비판을 받았고, 얼마 전에는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가 2014년 무상화 적용과 지자체의 보조금 재개, 유지를 권고하기도 했다.
다른 재판에서도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토조선학교 습격사건이다. 민사소송의 원고인 학교 측의 승소는 ’빛‘이었다. 안도했고 이로써 자이니치의 권리가 인정되는 첫걸음이라 여겼다.
관제차별에 대한 판단을 묻는 소송이었는데, 지나치게 노골적인 판결에 어이가 없었다. 보조금은 권리가 아닌 은혜, 지자체가 증여하는 것일 뿐이며, 주느냐 안주느냐는 행정의 재량에 따른다는 가당찮은 억지다.
자이니치의 역사성은 따지지도 않고, 사법의 역할을 팽개친 일방적인 행정 판결이었다. 기자회견은 시종일관 초상화와 영춘공연 참가, 즉 ’북조선‘과의 관계만 문제 삼았다. 재판이 범위 내의 쟁점을 다투는 제도인 이상 필요한 질문이었는데 기자들의 관심은 오로지 거기에만 머물러 있던 것이다.
스스로 ’국민‘인 근거를 따질 필요도 없는 자들이, 재일조선인이 국가 정체성을 함양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도 모자라 ’조국‘과의 관계를 이유로 보조금이 중단되는 현실은 의문시하지 않는 것이다.
이날, 수업 중이던 신씨는 ’부당판결‘ 소식이 SNS에 올라오자 무심코 탄식이 나왔다고 한다.
“우리의 권리는 법으로만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노력하고, 서명운동을 해도 소용없는 건지, 우리가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그래도 결국에는 이길거라고 지금도 믿고 있어요. 변호사님들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다른 생각은 안 해요.” 그녀의 웃는 얼굴에 가슴이 아려온다.
학교는 나를 키워준 곳
지지하는 연구자와 뜻있는 이들이 오사카 부와 시에 요청했다. 오사카부가 보조금 제도 창설 때 의회에서 한 답변과 재판에서의 주장이 모순임을 지적하자 답변을 못했고, 의장은 초조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도중에 자리를 떴다. 더 놀라운 것은 오사카부 담당자가 ’민족교육과 인권이란 단어를 일절 입에 담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동석한 오사카 산업대학 후지나가 다케시 교수는 말한다. 입장 때문에 타자에 대한 헤아림을 포기하는 모습은 여기에도 있었다.
오사카의 전례는 다른 지자체에도 번져 국가와 민간을 순환하며 재일조선인이 자존감정을 키우는 조선학교라는 공간을 부수려 하고 있다.
작년도 조선학교가 있는 도도부현 28개 가운데 16곳이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 추가로 중단을 결정한 3개 현에는 신씨가 살고 있는 와카야마현도 들어있다.
“너무 놀랐어요. 운동회나 학교행사에는 의원들도 왔었고, 틀림없이 우리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2015년 3월 29일, 하세 히로시 문부과학대신이 각 도도부현 앞으로 보조금 지급 재고를 촉구한 통지의 영향이었다. 2016년 5월, 일본 최초로 반인종차별법 ’헤이트스피치 해소법‘이 성립되기 전에 앞지르듯 보낸 이 통지는 ’조선학교는 인권 번외지‘라는 메시지였다.
하세 대신은 야당 시절, 외국인학교 지원을 주장한 의원연맹에서 사무국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2010년에는 호쿠리쿠 조선초중급학교(당시)를 시찰하고 ’민족교육이 제대로 뿌리내리고 있는 것에 감명 받았다‘ ’(학교에는)긍지가 있다‘는 발언도 했다. 이렇게까지 인간이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할 수도 있는 걸까? 야당시절에는 당대표가 고교무상화 제외를 반대했던 공명당도 지금은 극우정권을 보조하는 신세로 전락해 ’침묵의 공모‘를 계속하고 있다.
’평등‘이라는 소소한 바람조차 전달되지 않는 이 사회에서 삶의 희망이 짓밟히고 있다.
모두에 썼던 광주민주항쟁을 원점으로 창작활동을 계속해 온 홍성담의 말은 식민지주의에 아직도 종지부를 찍지 않는 이 사회의 ’수치심‘을 꿰뚫었다. ’수치심‘이란 무엇일까? 부끄러움을 그 자체로 인식조차 못하는 이들이 설치는 지금, ’인간다움‘의 조건은 공유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그, 그녀들은 이런 세상에서 목청 높여 끝없이 외칠 것이다. 그들에게 단념이라는 선택지는 없기 때문이다.
신씨는 말한다.
“언어나 이름은 사람의 모든 것을 형성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나를 조선인으로서 키워준 곳이 우리학교입니다. 이런 자이니치의 긍지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억압이 있는 한 저항은 계속된다. 그것이 결국엔 상황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그, 그녀들을 ’2급 시민‘으로 취급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공무원들과 단체장, 의원들은 어떤 얼굴로 무슨 변명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