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띳집엔 꽃비가 내리고
강미희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었던 일지암(一枝痷)을 찾아 사수회에서 기행을 떠났다. 4월 중순 춥지도 덥지도 않은 화창한 봄날에 승용차 두 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답게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렸다.
행담도 휴게소 실외 둥근 탁자에 둘러서서 회원이 준비한 찰밥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군산으로 향했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벚꽃 터널, 꽃구름이 차일을 치고 반긴다. 어쩌면 그리도 아름다운지 너나 할 것 없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차에서 내려 꽃향기를 깊숙이 마시며 걸었다. 때마침 바람 한 자락 지나가니 연분홍 꽃잎들이 나비처럼 춤을 추며 사뿐 사뿐 머리위에 내려앉는다. 축복의 꽃비였다.
담양의 송강정, 소쇄원을 둘러보았다. 곧게 쭉 뻗은 대나무 숲과 노송들의 운치 있는 솔밭이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를 말해주는 듯하다. 나주를 지나는 길옆 과수원의 배꽃이 눈꽃처럼 순백을 이루었다. 월출산의 기묘한 바위와 어우러진 진달래 또한 장관이다. 늘 자연의 정원은 신비롭다. 올해는 꽃들이 순서를 잊었는지 개나리, 진달래, 매화, 라일락, 벚꽃이 한꺼번에 피어나 가는 곳마다 꽃길이다.
몇 시간을 달렸는지 어둠이 깔리고 가로등도 없는 컴컴한 산야를 지났다. 밤 아홉 시가 넘어 대흥사 역내 유선관에 유숙하기로 짐을 풀었다. 완자무늬 창살의 하얀 창호지를 바르고 문고리가 달려있는 한옥이다. TV나 옷걸이는 없지만, 옛날 어머니들이 쓰던 접고 펴는 면경과 고운 갑사이불이 층층으로 개켜져 있다. 마당을 지나 산 쪽에 자리하고 있는 샤워실에는 동그란 놋요강 대여섯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정겨운 물건들이다.
요즘은 화려한 팬션 문화가 성행하고 있다. 장식품으로 곱게 단장을 한 넓은 거실이나 방에 비하면 열악한 한옥이다. 하지만, 산사의 고즈넉한 풍경이 모정의 향기처럼 정감을 느끼게 한다. 따뜻한 온돌방에 분홍색의 고운 비단 이불을 덥고 누우니 시골 친정집에 온 듯 아늑하고 포근했다.
새벽녘 잠결에 들리는 산새들의 노래와 계곡물 소리가 어우러져 꿈을 꾸는 듯했다. 이어 창호지문이 훤하게 밝아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반달이 나뭇가지에 걸리고 유난히 반짝이는 별 하나 보인다. 산야에 울리는 범종소리가 여명을 깨우며 잔잔히 퍼져나간다. 희뿌연 운무가 드리운 산길에 빨간 동백이 더욱 신선해 보인다. 송이 째 뚝 떨어지는 꽃을 먹이로 알았는지 고개를 갸웃 대며 바라보던 다람쥐가 실망한 듯 쏜살같이 나무로 올라간다. 자연은 이렇게 설레는 아름다움을 늘 우리에게 선사한다.
30분정도 능선을 타고 오르니 띳집이 보인다. 풀로 지붕을 잇고, 나무기둥에 흙벽인 방 한 칸, 문 위로 일지암(一枝痷)이라는 현판이 달려있다. 초의 선사가 39세에 지은 집이다. 풀 옷을 입고 지내 초의(草衣)라 이름 했다. 그가 나무 열매를 따먹으며 시(時), 서(書), 화(畵)의 달인으로 40여년을 거처한 곳이다. ‘자신은 뱁새요. 앉아 있을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다.’라며 작은 띳집을 자신이 편안히 살 수 있는 가지로 비유를 했다. 다도의 실제를 생활함으로 전통차 문화를 꽃피운 다인이기도하다. 그의 시 한 수 생각난다.
밝은 달 촛불 삼고 또 벗 삼아 / 흰 구름 자리 펴고 또 평풍도 하여
흰 구름 밝은 달 두 손님 모시고 / 나홀로 차 한잔 따라 마시니
道人이 앉은 자리가 이 보다 더 나을 손가 초의(草衣)
초의는 자연 속의 동화하면서 당대의 학자 다산, 추사, 소치와 자주 만나 차를 즐기며 조선조 말기에 문예부흥에 기여한 인물이다. 특히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와는 종교나 신분을 초월한 각별한 정을 나눈 둘도 없는 친구였다.
동그란 샘에 흐르는 물이며, 차를 즐기던 다실은 옛 주인을 그리는 듯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는 초의가 마시던 물을 떠 조그만 주전자에 담아 알코올 불에 끓이고 녹차 잎과 동백꽃을 띠워 다실(바위)에 앉아 우아하게 옛 임을 생각하며 차를 마셨다. 뜨거운 찻잔에 동동 뜬 동백꽃을 드려다 보며 새삼 일지암( 一枝痷)의 깊은 내력을 헤아려 음미해 보았다.
띳집 하나로 족하다니! 그러고보면 문학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일까? 탐욕이나 앙금을 헹구어 하얀 빈 마음을 만드....
자연과 벗하며 시심과 화심으로 족한 삶을 누린 초의 선사를 보면, ‘행복이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있는 것, 그 조화에서 오는 평화인 것 같다.’ 훈훈한 교훈으로 다가온다.
동쪽 산마루에 주홍빛이 감돌며 부채 살 모양의 햇살이 퍼져 오르고, 띳집위로 꽃잎이 나풀나풀 내려앉는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말미가 더욱좋아 여러번읽고 정경을 그려봅니다.
一枝庵 여행기 아름다운 수필 잘 읽었습니다 나도 가 보고싶내요
늘 자신을 정제 시키며 살려고 노력 하시는 모습 느껴집니다~~~꽃비 여행! 잘 하고 갑니다^^
선생님의 하얀 마음이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