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선물
우리 어머니는 한 마디로 여장부라 해야 할 것 같다.
어머니가 나를 41세에 낳으셔서 종종 막내인 나보고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데 태어났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위의 형과 10살이나 터울이 졌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형제는 3남 4녀 였는데 누나 1명과 나보다 7살 많은 형이 돌아가셔서 2남 3녀 5형제다.
누나들의 기억이나 바로 위의 형과는 거의 같이 자란 기억이 없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엔 늙으신 부모님(50대)과 함께 외롭게 생활했기에
형제들이 함께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엄마 젖을 빨았다고 하기도 하고,
밤에 잠을 잘 때는 엄마 젖을 만지고 잤던 기억이 있다.
매일 어머니는 밭에 나가 사셨는데,
아버지 몸이 약하셔서 남자가 하는 일 까지 하셨다.
지게도 지시고 심지어 똥장군도 지셨다.
논에 물 대는 물꼬 싸움도 아버지를 대신해 하실 정도로 억척스러우셨다.
나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들었고, 꼭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에
숙제라든가 기성회비 같은 돈을 가져오라고 하면
그 날로 해결 해야하는 성격이다.
한 번은 기성회비를 가져오라는 말을 듣고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텃 밭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나는 '엄마, 내일 기성회비 가져오래~ ' 하고 말하자
어머니는 "알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일하고 계신 어머니에게 달려가 당장 달라고 하였고
어머니는 "알았으니 이따가 집에 가서 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이따가는 잊어버릴 수 있으니 당장 달라고 보채자,
화가 난 어머니가 나를 끌고 집에 있는 나무 광에 밀어 넣으시고는
“알았다는데 왜 이렇게 보채” 하시며,
어머니 손에 잡히는 물건 즉 나뭇가지로 한참을 맞은 것이 기억난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편도 70리나 되는 안성 장에 물건을 팔기 위해
새벽에 출발하여 밤 늦게 도착하는 일을 여러 해 동안 하기도 하시며
억척같이 논.밭을 마련하셨다고 한다.
못 배운 게 한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고
그래서 형은 고등학교부터 서울에 유학을 보내고
학비 마련을 위해 아끼는 소를 팔고 논, 밭도 파셨다.
아버지는 아까우셔서 그 때마다 술을 드시고 속상해하셨지만
어머니는 공부 가르치는데 드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으셨다.
아예 모든 것 정리하고 서울로 가자 하셨지만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
즉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 까지는 고향을 못 떠나” 하시는 말씀에 실행을 못하시다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1년 상을 마치고는 바로 정리하여 서울로 이사하시게 된 것이다.
기대했던 형이 공부보다는 연극을 한다고 연예계를 쫓아다니는 것을 안 어머니는
무척 실망하셨고 그 뒷바라지를 하긴 무리였다.
형은 결국 연예인의 꿈은 접고
둘 째 매형과 조그만 사업을 하게 되었고, 이 후 그 길(사업)로 가셨다.
공부의 한을 자식에게서 풀고자 했던 어머니였지만
나를 대학까지 보낼 형편이 못 되자
상고에 진학해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을 제일로 바라셔서 결국 상고 진학을 하게 되었다.
형이 결혼할 때 고등학교 2학년 말(12월)이었는데, 형수가 대학진학을 강력히 권했고
재수할 돈을 대 줄테니(형수 초등학교 교사 퇴직금) 열심히 공부하라고 했다.
3학년 때 "대학갈 놈이 왜 상고에 왔냐?"고 선생님들에게 구박을 받으며 공부한 결과
운 좋게 재수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해서
어머니의 마음을 흡족케 했고 자랑거리로 만들어 드렸다.
(당시 태연실, 장욱제가 열연한 일일 연속극 여로만 오로지 시청하면서 저녁밥을 먹고
나머지 시간은 1년 동안 죽었다고 생각하며 동네 독서실에서 공부하며 잔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대학에 다니는 것이 얼마나 좋으셨던지 이웃에 마실가셔서
막내 아들 자랑하는 것을 즐기셨고
아들이 다니는 대학 응원 연습하는 운동장까지 어린 조카 훈이를 등에 업고
자주 오셔서 응원연습하는 것을 보시곤 했다.
한 번은 동대문 운동장에서 있었던 축구경기에 직접 모시고 가서 응원에 동참하신 경우도 있었다.
평생 여행 한 번 못 가신 어머니를 위해 평소 아르바이트로 모아 놓은 돈으로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어머니를 모시고 전국여행을 한 경우도 있었는데
힘들다는 말 없이 너무나 좋아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서울에 이사오신 후 하느님을 알아 가족들을 차례로 영세를 받게 하셨다.
누이 두 분, 형, 친척에게 한글도 모르시는 분이 열심히 전교하시려고 노력하셨고
매일 새벽미사에 참례하셨다.
항상 새벽미사 가시기 전에 나에게
오늘 복음말씀을 찾아달라고 말씀하셔서 찾아드리곤 하였다.
한글도 모르시는 분이 우리 가족에게 예수님을 알려주시고 이끌어 주신 것이다.
나는 몇 번 성당에 갔지만
결혼 전까지는 끝내 어머니의 말씀에 부응하지 못하고 영세를 받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초등학교 1학년 정도의 한글 실력으로 성서말씀을 적은 노트를 발견했다.
독학으로 한글 공부를 하신 듯 하다.
회사에 입사한 후 부산 발령을 받자
70이 다 되신 분이 부산으로 오셔서 같이 생활하셨다.
막내아들 수발을 드시겠다고…
매일 밥 먹을 때마다 결혼이야기를 하셨고
부산에서도 이웃집 할머니들과 교류를 하시고, 만남을 주선해
몇 번 선을 보기도 했지만 성사가 되지 않았다.
거래처인 해운대 호텔 김순경 사장의 소개로
지금의 처와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영세도 받게 되었다.
이 후 세 식구가 함께 살다 서울로 이사하면서 어머니는 형과 사시게 되었다.
결혼 2년 반 만에 딸이 태어났고
어머니는 손녀딸 보러 간다고 자주 우리 집에 오셨다.
장위동에서 역곡까지 먼 길을 버스와 지하철로….
딸 유나의 백일이 지나고 그 해 겨울 내 생일날,
하루 전 저희 집에 오셔서 함께 생일 준비를 거들어 주시고
다음 날인 내 생일날 새벽미사 다녀오시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셨다.
너무 갑작스럽게 이별 준비도 없이 돌아가시자 어머니께 죄스런 마음이 들었다.
결국 내 생일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에 그 후 내 생일을 차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일찍 일어나는 습관
즉 아침형 인간을 만들어 주셨다면
어머니는 우리가족을 하느님께 인도하시고
나에게도 복음을 전하신 분이다.
결국 성공은 하지 못하셨지만...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부산에서, 결혼약속 조건으로 영세를 받으라고 하신 장모님을 통해서
나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화룡점정을 찍으신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두 분 어머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찬미와 찬양받으소서!
아멘!
배경사진은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시던 명자나무꽃 입니다.
산소에도 명자나무를 심어드렸지요.
♬ 배경음악: 진시몬 - 어머니 ♬
첫댓글 엄마!!
어머니!!
이 두이름은 우리내 가슴에 평생 한 서서리게 남았지요
하늘 여행길에 우리 엄니도 생각해 봅니다
세잎 크로버 님
여행 중어서 오랜만에 들어왔습니다.
지금 두 엄마 일로 가장 힘든 시기 보내고 있는데 눈물이 납니다.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란 말이 있지요.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은데 바람이 멎지 않아 흔들리고, 자식이 부모를 효도하고 싶은데 부모는 이미 안 계시더라는 뜻이지요.
옆에 계실 때는 잘 해드리지 못하고 안계실 때는 후회하지요.
새벽미사 가시기 전 저에게 그날 복음 찾아달라고 하실 때 여러번 퉁명스럽게 불평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좀더 친절하게 해드릴 걸 하는 후회가 됩니다.
세월은 인간의 뜻대로 먼저 가거나 늦춰 가는 법이 없습니다. .
행여라도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더 늦기 전에 한번 찾아뵙는 것이 진정한 효도일 성 싶습니다.
나중에 보모님 돌아가신 것을 후회하고 눈물 흘려도 이미 때는 늦겠지요.
좋은 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