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인드 글라스는 부활의 모습을 표현하였으며, 김도율 요셉 신부님 작품입니다.
사목 활동으로 바쁜 와중에도 흔쾌히 작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는 '스테인드글라스 – 부활의 모습'을 김형수 사도요한 신부님이 정리한 내용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핵심은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이 신앙의 핵심이 되고 그 정점을 이루며 그 정점이 바로 구원이라고 믿는 것이 바로 모든 그리스도 교회들의 공통된 신앙이기 때문이다.
이 부활신앙에 대해서 사도신경에는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며 니체아 신경에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기다린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부활신앙에 있어서 육신의 부활이라 함은 과연 영혼과 분리된 썩어버린 살덩어리가 다시 소생함을 말하는 것인가? 또 죽은 이들의 부활과 육신의 부활은 다른 것인가?
일부 개신교파 신학자들이 생물학적 소생을 주장하여 정통신학자들과 많은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우리 가톨릭의 정통신학자들은 육신의 부활이 죽은 인간의 육체가 다시 살아남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육신의 부활이라는 말은 사도교회 때부터 구전을 통해 전해오는 신앙 고백이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공식 신앙고백문으로 채택할 때 육신의 부활이라는 말을 ‘죽은 이들의 부활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는 아마도 육신의 부활이란 말이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인격체의 부활을 표현하는 말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에서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영혼이라는 반쪽과 육신이라는 반쪽이 결합된 존재가 아니라 영혼과 육신이 온전히 하나로 통합된 존재이다. 인간의 육체는 인간 인격체의 한 부분임을 이 지상에 드러내는 표지라고 정통신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영과 육, 어느 한쪽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이 결합된 전인간적 인격체에 해당한다는 말인 것이다.
육신의 부활이나 죽은 이들의 부활이라는 말은 다 같이 역사 안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살았던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한 인격체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지 육신만의 부활이나. 또는 영혼만의 부활 즉, 육신과 영혼이 따로따로 떼어진 부분적인 차원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부활은 선한 사람이 부활한 뒤에 받는다는 네 가지의 신기한 은혜. 곧, 썩지 않으며, 빛나고, 강하며, 영적인 몸으로 살아나는 것을 이른다.
사기지은(四奇之恩)을 입은 육신은 분명 생물학적 육신은 아닐 것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생물학적 소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부활도 이세상의 제한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구원사건이기에 하느님영역에 속하는 사건임을 사도 바오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 우리가 그리스도를 옷 입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은 곧 우리 인간이 이승에서의 인간의 육체가 아닌 하느님 나라 신비의 육체인 그리스도의 육체를 입고 부활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 안에 함께 참여하는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승에서의 죽음은 영과 육이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부활을 염원하는 우리 공동체는 십자가의 삶을 산 이에게 주어지는 부활의 모습을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 새겨 넣었다. 십자가의 길 14처 밑 창문에 부활하신 주님이 모습이 새겨져 있고, 다른 여러 창문에는 주님의 믿고 십자가 삶을 살고 부활한 우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