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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38:1-41) 보세의류와 자체제작
오늘 읽은 말씀중심으로 <보세의류와 자체제작> 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우리가 입는 옷을 중심으로 쇼핑몰을 운영할 때에, 그 쇼핑몰에 물건을 대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보세의류와 자체제작입니다.
'보세의류'라는 것은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관세가 보류된 상태에서 가공된 물건입니다. 외국에서 수입면허를 받고나서 아직 관세를 물지 않은 상태에서 가공을 해서 재수출하는 것인데 그것이 국내로 흘러들어오고 국내로 공급되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세의류의 공급과정과 제작과정에 관한 얘기는 제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크게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공급을 받아서 물건을 파는 것이 운영방법이 될 것입니다. 대표적으로는 1980년대 이화여대 앞에서 보세의류 가게를 열어 시작한 옷가게가 엄청난 재벌기업 수준으로 성장했는데 이랜드가 있습니다.
이것과 다르게 '자체제작'이라는 것은 뭐냐? 예를 들어 돌체, 비비안, 이런 유명한 메이커가 있지 않습니까? 브랜드 상품, 명품들 중에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샘플로 해서 비슷하게 자기들이 만들어 내는 겁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만들어서 옷을 파는 것이에요. 장점과 단점이 다 있겠지요.
하여간 쇼핑몰이 옷을 공급하는 방식이 크게 보세의류와 자체제작으로 나뉘어서 운영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쇼핑몰에 옷을 대는 두 가지 방법이 바로 인간의 언어, 인간인 우리가 일상적으로 매일같이 사용하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두 가지 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체제작방식이 있고 공급을 받아서 말을 하게 되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은 자체제작을 하게 되면 이것은 불신앙이요, 영적으로 망하는 길이고 말은 항상 공급을 받아서 해야 됩니다. 신앙인의 모든 말들은 공급되는 말이어야 하는데 자체제작을 하거나 자체생산을 하는 말이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말은 두 가지가 있어요. 공급되는 말이 있고 자체제작 되는 말이 있고 신앙인의 말은 공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드디어 욥기 3장부터 정말 지루하게 동호반복처럼 여겨지고, 무슨 말을 하는지 포인트를 잡기 쉽지도 않았던 논쟁이 끝이 나고, 또 엘리후의 훈수와 같은 그러나 그 훈수 속에 객관적인 영적 진리를 담고 있는 그 엘리후의 말이 끝나고 이제 하나님이 드디어 현현하십니다.
‘현현'이라는 것은 분명히 나타나 보이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욥과 세 친구들 앞에 나타나셔서 그 논쟁을 지켜보신 당신의 의견과, 당신의 뜻을 드러내서 말씀을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하나님의 현현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하나님 입에서 나온 일성이 무엇인가 하면 1절과 2절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하십니다.
이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개역한글성경에는 '이치'로 되어있는데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무지한 인간의 말로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과 사랑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한다.’라는 이 말씀이 핵심 포인트가 될 것 같은데 아는 것이 없이 떠들어대는 말입니다. 아는 것 없이 떠들어대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뒤에 쭉~ 나열을 하시는 겁니다.
예를 들어 4절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 5절에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 8절에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 9절에 그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 31절에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 / 32절에 너는 별자리를 각각 제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 39절에 네가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욕을 채우겠느냐 / 41절에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억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것이 누구냐”라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무지함을 드러내십니다.
사실 욥이 살았던 방식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화를 내시면서 나무라실 만큼 욥이 무지한 말을 내면서 살았던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이 '무지한 말'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고 계시고 자기의 참담한 현실에 대해서 말씀을 주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교통이 단절된 상태에서 친구들이 찾아와서 계속 비난하는 그 분위기에 휩싸이면서 말을 한 것이에요. 쉽게 말하면 별나게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몰려 왔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얼굴을 가리 우시는 것 같고 자기의 당한 현실에 대해서 언급을 안 하시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냥 자기가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모든 말이 다 이 상태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가려져 있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듣지도 않고 듣고 싶어 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사람과 함께 살면서 사람들을 향하여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욥이 친구들과 함께 대화하고 논쟁하고 있었던 이 상황은,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으로 일상적으로, 늘, 항상, 말하면서 살아가는 환경과 똑같은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통 '말'이라고 할 때의 그 말을 무지한 말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욥이 특별하게, 특별한 시간에 말한 것이 무지한 말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보통 사용하는 일상적인 모든 환경에서의 말이 다 무지한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특별하게 욥이 무지한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말이 보편적으로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그 이유를 다 말씀하고 계세요. '내가 땅을 설계할 때에 네가 옆에 있었느냐 그 땅을 밟고 사는 네가, 땅을 설계할 때 옆에 있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한 채로, 이 땅을 딛고 일생을 살아가면서 네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삶의 터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또 하늘에 대해서 아느냐? 바다에 대해서 아느냐? 암사자, 까마귀에 대해서 아느냐? 39장에 가서 더 구체적으로, 아느냐? 아느냐?'라고 계속 반복하십니다. '아느냐?' 라고 물으신 이유는 알 것을 전제하고 물으신 것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계속 확인시키시는 겁니다.
그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계획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누구긴 누구겠어요? 나지요. 여러분 자신이고 바로 나 자신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말의 특징은 뭡니까?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만 인간은 말을 할 수 있고 말을 자체제작 해 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자마자 하나님의 현현이 이루어지자마자, 하나님의 계심이 의식되자마자 인간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특징은 말이 없어지고 생각이 없어지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이 없어지자마자 하나님이 안중에 없고 하나님이 의식 안에 없어지자마자, 나타나는 특징은 인간의 말이 자체제작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고 하나님을 잊어버렸고 하나님을 망각하자마자 나타나는 것이 말의 자체생산이고 자체제작이에요. 하나님 흉내를 내는 겁니다.
원래 말은 하나님만 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말은 다 보세의류처럼 공급되어져야 하는 것이에요. 내가 하는 모든 말은 공급되는 말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체제작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바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나타난 특징이에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내 의식 안에 분명하면 지금 내 옆에 살아 계시는 것이 확실하면 생각이 멈춰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심이 분명치 않자마자 나타나는 것이 내가 생각하고 자체제작 하는 거예요. 언어를 자체제작해내는 거예요. 생각도 언어를 통해 되지 않습니까?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면 말이고, 입안에 담아두면 생각이지요. 이게 바로 망조라는 것이에요.
인간이 자체제작한 말의 특징은 뭐냐? 知(지)가 無(무)합니다. 앎이 없는 말들이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땅과 하늘과 별과 동물과 식물과 내 몸과 내 몸의 오장육부의 상태와 모든 것을 우리는 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상태에서 말을 자체생산하기 때문에 이 말이 알맹이가 없는 말이 돼요.
예를 들어 내 앞에 뭐가 있어요. 그런데 이것에 말을 붙입니다. 꽃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존재와 말이 붙어 있어야 그 말이 참인 것이에요. 사실과 참과 말이 같이 붙어야 무지한 말이 아니고 알맹이가 있는 참된 말이 됩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도 앞으로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몰라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면서 걱정의 분위기의 말을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건 무지한 말이에요. 한 시간 뒤에, 두 시간 뒤에, 한 달 뒤의 일을 모르지 않습니까? 모르면서 두 시간 뒤에 일어날 인생의 팩트를 모르면서, 내가 두 시간 뒤를 걱정하는 언어, 걱정의 분위기에 장악된 생각들이 다 무지한 말입니다. 그 무지한 말이 마땅히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말과 생각을 공급 받아야 할 사람들이, 그래야 그다음 두 시간 뒤, 한 달 뒤, 일 년 뒤의 하나님과 맞아 떨어지는 생각으로 행동해 나갈 것인데 자체생산을 하므로 끝없이, 끝없이 어긋나고 있는 겁니다. 그 어긋남이 걱정, 근심, 불안, 초조, 스트레스, 불만, 분노 등으로 나타나고, 사랑과 화평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런 것은 하나님께 말을 공급받을 때 나타납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성경에서 꼭 하는 말이 있어요. ‘너희는 잠잠하라, 가만히 있어라.’라고 하나님은 침묵을 원하십니다.
시편46편 10절에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너의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우리가 알려면 내가 가만히 있어야 되고 침묵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출애굽기 14장 13절에 보면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시는 것을 보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는 언제나 우리는 무지함을 알고 가만히 있어야 됩니다.
무지한데 왜 말을 합니까? 아는 것이 없는데. 무지뿐만이 아니고 전부 ‘무’자 돌림으로 ‘나’가 특징지어집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내 옆에 계시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내 마음속은 무지입니다.
나는 무능하다, 나는 무력하다, 나는 무판단하다, 나는 무비판하다 전부 ‘무’자 돌림이에요. 무이해 라고는 안 하지요? 몰이해하다. 하나님이 계시면 당연히 다 없어져 버려요. 다 없어져야 공급이 시작됩니다. 내가 무지함으로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것이 내게 공급되고 내가 무력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공급되고, 내가 무능하고 내가 무이해하고 몰이해하므로 하나님이 이해하시는 것이 공급되는 것이지요.
'곡무호선생토(谷無虎先生兎)'라는 말이 있는데 '호랑이 없는 골짜기에 선생노릇을 하는 것이 토끼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실 때 반드시 우리는 말과 생각을 자체생산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가 말하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여러분의 말이 없어지고 생각이 없어지면 그것만으로 인생을 성공했다고 느끼실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말과 생각이 없어짐과 동시에 마음에 찾아오는 평강은 돈이 생기는 평강과 달라요. 아들딸이 잘 돼서 느끼는 평강과는 전혀 달라요. 하나님이 계시게 되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면 나는 무조건 말이 없어지는 겁니다.
욥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살았어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았어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단절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도대체 이 현실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가 없게 되고 하나님의 음성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때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 사람들과 말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무지한 말로’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욥의 상황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상황과 똑 같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여러분! 사람과 대화할 때 손님과 대화하고 바이어와 대화하고 선생님과 대화하고 친구와 대화하고 김 집사와 대화할 때, 하나님이 지금 여기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사람이 몇 사람 됩니까? 하나님이 딱 나타나신다면 김 집사와 말하다가 멈추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지 않겠어요?
그럼 말을 하지 않고 사느냐? 아니지요.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아야지요. 자식을 향해서 말을 자체생산해내지 마세요. 다 거짓말입니다. 여러분의 걱정, 여러분의 염려, 자식상황에 대한 여러분의 판단은 다 거짓말이고 다 무지한 말입니다. 하나님께 공급 받으세요.
남편을 향해서 말하지요? 부인을 향해 말하지요? 회사에 가면 종업원들에게 말하지요? 윗사람에게 말하지요? 다 거짓말이에요. 무지한 말입니다. 자체생산해낸 모든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무지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는 말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방해하는 말이요. 하나님의 뜻을 막아버리는 말입니다.
말을 자체 생산해낼 수 있는 존재는 이 우주 안에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인간으로 오신 주님조차도 당신의 말을 자체생산해내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들려주시는 말씀만을 하셨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향해서도 자체생산해내는 말을 하지마시고,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고 자체생산하지 않느냐? 더 많이 할 수도 있어요. 그게 생각입니다.
오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는 말은 '인간의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라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우주 안에서 말을 자체생산해내고, 생각을 자체생산해내고, 계획을 자체생산 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아버지뿐이십니다.
우리는 말과 능력과 생각과 계획 모든 것을 공급 받아야 되는데 왜 공급받지 않고 자체생산 하느냐? 하나님이 살아서 내 옆에 계심을 내가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순간 당연함으로 자체생산 종업원이 됩니다. 내가 말을 자체생산해낼 수밖에 없게 돼 버린다는 겁니다.
상상을 해 보세요. 하나님이 살아서 내 옆에 와 계시다면 그 분의 생각과 그 분의 말씀을 묻고 듣는 것 말고, 어떻게 내가 내 생각과 말을 자체생산 해 내겠습니까? 자체제작이 불가능하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하나님께 공급받은 말만을 하기로 결심하세요. 그리고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말을 만들어내려는 자체제작의 체질과 시스템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을 통하여 철저하게 봉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계속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말과 생각과 계획과 능력이 공급되어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천지에 말을 자체생산 해 내실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보세의류를 떼어다가 팔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내 입에 담고, 내 머릿속에 담을 생각과 말을 받아낼 수밖에 없는 자들임을 기억하게 하시고, 전혀 알지 못하면서 무지한 말과 무지한 생각을 자체제작 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뜻과 섭리를 방해하고 가리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나의 모든 근원이 주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