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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스크랩 ?찬송가와 복음성가에 대한 바른 이해
안산 추천 0 조회 18 15.01.04 03: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계명대학교 ‘교회음악론’을 강의하는 이 영기 교수는 “찬송가는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로서 구원에 대한 감사나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간구 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내용으로 된 가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주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라고 정의 하였고, 복음성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래로서 신앙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역사하심을 증거 하거나 성경의 내용을 인용하여 낙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는 내용으로 된 가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복음성가는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나 신자들 간의 공통된 신앙 감정을 자아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고 정의 하였다. “찬송가는 그 대상의 관점에서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수직적인 관계이고, 복음성가는 인간 대 인간이라는 수평적, 횡적인 관계이다.” “찬송가는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복음성가는 사람들이 듣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가사내용이나 음악형식, 연주태도 등은 다르기 마련이다. 찬송가의 사용은 예배에 가장 적절하고 이를 연주하는 태도로 기도하는 자세와 같이 간절해야 하며, 하나님이 연주자 앞에서 그 찬송가를 듣고 계시는 것처럼 노래해야 한다. 복음성가는 부흥집회나 전도 집회, 또는 친목회, 간증의 모임 등에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복음성가를 부르는 방법은 여러 악기를 동원하여 감동적으로 호소력 있게 하여 전도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정의 하였다. 또 현행 찬송가에 나타나는 문제점은 “찬송가로써 예배하는 많은 회중들이 이 책에 수록된 모든 곡들을 찬송가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현행 찬송가에는 그 내용의 구분에 의한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구분이 분명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아멘의 사용이나 선곡에 있어서 혼동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찬송가가 회중찬송가라는 점에서 찬송가 편집에서 고려해야할 또 다른 원칙은 수많은 회중찬송 곡 중 그 곡에 대한 가치 평가가 이미 되어 진 곡들을 선곡하여 엮는 문제이다. 고전(Classic)이라는 말로 표현 되는 이러한 곡들이 회중이 부른다는 점을 고려하여 선곡되고 편집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작시자(作詩者)와 작곡자(作曲者)의 신앙적인 생애도 고전의 판단기준이 되어야 한다. 회중찬송가의 창작은 작자의 신앙생활 가운데서부터 우러나오는 신앙고백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새로운 회중찬송가가 편집될 때에는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분명한 구분에 의하여 번역되고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회중찬송가를 창작하는 사람 또한 분명한 기준을 가짐으로써 찬송가는 찬송가답게 복음성가는 복음성가답게 써야 할 것이다. 회중찬송가는 회중의 노래이다. 회중의 노래는 예술 가곡이 아닌 민요와 같아서 적극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노래이며 같은 시대,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이해되며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노래이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국의 좋은 회중찬송가는 한국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곡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책에는 3.2%만이 우리의 손에 의하여 지어진 곡들이다. 나머지는 모두 외국의 것을 번역하여 사용되는 것이다. 노래 말의 번역은 용이하지 않으며 그 의미의 전달 또한 완전하지 못하다. 우리가 회중찬송가를 몇 번 불러도 큰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번역에서 오는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성가에 부정적인 부분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복음성가 가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걱정되는 것이 있다. 이런 경우를 대부분 보면 예수님을 믿은 후 성경적인 지식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고(물론 성경적인 지식이 적다고 작곡을 못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감동과 은혜로 몰입돼 가사를 만든 경우이다. 그럴 때 아차하면 성경적이 아닌 가사를 작사할 수 있기도 하다. 즉 성경적인 의미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부를 때 작사자의 영감을 맛보려하므로 오는 커다란 실수가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성령에 관해 구약은 신약과 다르다. 구약에서는 성령님이 오셨다 떠나셨다 한다(예 삼손). 하지만 신약에서는 믿는 사람은 성령으로 구원의 날까지 인치 신다. 그런데 구약의 가사로 복음성가를 만든 것이 있다.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는 가사가 있는 복음성가이다. 이것은 다윗이 그의 죄를 고백하는 시편 51편에 있는 것이다. 만약에 성경을 잘 모르는 분이 이런 찬송을 부르면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성령님이 내주하신데 떠나 갈수도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 떠나지 말게 해 달라’고 불안해하며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어떤 복음성가는 성경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에 조심해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에 이런 찬송을 하나님께 했다고 합시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받으시겠습니까? 이것은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만약 복음성가를 자신을 향해 부르고 기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아니다. 잘못하면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취로 빠질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예배는 우리의 지(智), 정(情), 의(義)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내 놓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성가를 부를 수 없냐? 그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복음성가 참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은혜가 됩니까? 그래서 찬송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것입니다. 복음성가를 계속 부르는 사람들이 찬송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모습을 관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찬송가라고 하면 케케묵은 것같이 생각하고 고리타분해서 한 물간 것 같이 여기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찬송가와 복음성가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분류된 것을 아는 분이라면 가사에 민감해 할 것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성도라면 바른 찬송을 더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찬송가도 하고 좋은 복음성가도 하면 될 것인데, 거의 복음성가를 하면서 찬송가를 낮게 보는 처사는 문제가 있다. 위에 예를 든 것같이 만약에 좋은 복음성가를 분별치 못한다면 신학자들이 분류해 놓은 찬송가를 찬송하는 것이 영적인 면으로는 훨씬 더 안전 할 것이다. 특히 인도자가 성경을 잘 모르면서 음악을 잘 아는 분이라면 이런 면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현대 교회의 한 가지 경향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시대가 계속되며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성경말씀보다 자기 귀에 즐겁고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므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는 말씀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보다 자신의 즐거움과 기쁨을 감정적으로 먼저 두려고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을 높이며 경외하면 즐거움과 기쁨이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 중심이 되고 그에 따라 순종하는 자가 순종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 대신 찬송으로 자신의 감정을 올리려고 하는 모습이 있는 것 같으므로 큰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찬송가든 복음성가든 성가(聖歌)는 바른 성가를 해야 합니다. 성가는 영적(靈的)인 것이므로 더욱 바른 성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신학적으로 분류된 찬송가를 낮게 보는 것은 성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처사가 아닌가 합니다. 또 성가로 자신의 영적인 삶을 이어 가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합니다. 말씀 안에 있으면서 주님 안에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발의 등이요 우리 길의 빛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즉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만한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요 성령 충만한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찬송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결과가 시와 찬미로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성도의 삶은 말씀에 중점을 두며 성가는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쓴 성가가 먼저여서는 안 됩니다. 먼저 말씀에 중점을 둘 때 찬송가나 복음성가에 대한 갈등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 영기 교수님의 말씀에 공감이 간다. [맺으며] 교회 부흥을 위해 복음성가를 많이 부르는 것이 현대교회의 일반적인 풍조인 것 같다. 하지만, 복음성가를 선별하는데 신중을 기해 모든 성도가 즐겨 부를 수 있는 곡을 선곡(選曲)하여 불렀으면 좋겠다. 시대에 유행하는 새로운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도 좋지만 작사(作詞), 작곡자(作曲者)의 신앙적(信仰的) 배경(背景)을 잘 검토하고, 모든 성도가 함께 부를 수 있는 은혜로운 좋은 곡을 선별하여 불렀으면 좋겠다. 특히나 우리네와 같은 늙은이들을 배려하여 젊은이들의 취향(趣向)에 맞는 복음성가를 부를 때, 구경꾼 밖에 될 수 없음을 배려해주었으면 좋겠다. 모든 예배시간에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적절하게 배합하여 선곡(選曲) 해주었으면 좋겠다. 하나 더 배려해 준다면 복음성가도 찬송가처럼 부록으로 인쇄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공급해주면 더욱 좋겠다. 스크린에 뜨는 가사는 안구협응(眼口協應) 능력이 부족한 7080세대는 따라가기에 바쁘다. 물론 찬양을 인도하는 분들은 위와 같은 문제점을 모르는바 아니고 쉽지는 않은 줄 알지만, 발전적 측면에서 건의도 해보는 것이다. khj61046104님의 블로그 모두를사랑하는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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