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09.8.21
내가 '닥터둠 <경기 전망 비관론자>'을 고집하는 이유
누리엘 루비니 (Nouriel Roubini) 美뉴욕대 교수
美산업생산 하락…주택시장 허약… 경제지표 보면 침체 아직 안 끝나
전 세계적으로 총수요 부진 글로벌 경제 회복 저해 요인될 것
미국 경제, 그리고 세계 경제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지난해 경기 논쟁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한 진영은 미국의 경기 침체가 짧고 가볍게 지나가면서 V자형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1990~1991년이나 2001년 때처럼 단지 8개월 정도만 침체기가 지속되고, 전 세계는 미국의 경기 침체로부터 탈동조화(脫同調化·decoupling)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필자를 포함해 또 다른 진영은 가계와 금융회사, 기업 등 민간 부문의 과도한 레버리지(차입)로 인해 경기 침체가 오래 그리고 깊게 지속되는, U자형을 그릴 것으로 예상했다. 경기 침체가 약 24개월간 지속되며, 전 세계가 미국의 경기 침체의 영향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금까지 미국의 경기 침체는 20개월가량 지속됐고, 2008년 여름부터는 집단적인 재동조화(再同調化·recoupling) 경향을 보이면서 글로벌 침체로 확대됐다. 미국과의 탈동조화를 주장하는 V자형 견해는 사라지게 됐다.
이번 불황은 미국과 전 세계가 맞는 60년 만의 최악의 경기 침체다. 만약 미국의 경기 침체가 올 연말에 끝나게 된다면, 그것은 앞서 두 번의 경기 침체에 비해 3배쯤 길고 침체의 골도 5배나 깊은 셈이 될 것이다.
최근 들어 경제학자들 사이에 새로운 컨센서스가 형성되고 있는데, 그것은 경기 침체가 거의 끝나가고, 미국 및 세계 경제가 급속히 성장세를 회복할 것이며, 위기 재발의 위험은 거의 없다는 견해다. 불행히도 이 새로운 합의 역시 지난 3년간 V자형 시나리오를 옹호했던 학자들만큼이나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늘어나는 실업률, 떨어지는 가계 소비, 여전히 하락하는 산업 생산, 그리고 허약한 주택 시장 등 미국의 각종 경제 지표를 보면, 미국의 경기 침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른 선진국 경제 역시 바닥이 상당히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아직 바닥에 도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신흥 경제들은 다시 성장을 이어가기는 해도, 잠재 성장률에 못 미치는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선진국 경제는 미약한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며, 적어도 2~3년간은 추세 이하로 성장할 것이다.
첫째, 선진국 가계는 부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려야 할 상황이다. 그것이 수년간 소비를 제약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둘째,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은행이든 비은행 금융회사든 간에 금융 시스템이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다. 견조한 대출 증가세가 이어지지 못해, 민간 소비와 투자 지출이 지장을 받게 될 것이다.
셋째, 기업 부문은 과잉 생산력에 직면해 있다. 만약 성장이 둔화되고, 디플레이션 압력이 지속된다면 기업의 수익성 회복도 더디게 이뤄질 것이고, 기업이 자본 지출을 늘리기도 힘들 것이다.
넷째, 공공 부문이 대규모 재정 적자와 누적된 부채 등 채무 부담을 늘리면서 재정 지출을 계속할 경우, 그로 인해 민간 부문 지출이 회복되는 것을 구축(驅逐·crowding out)할 위험이 있다. 내년 초면 정부에 의한 경기 진작 효과마저 꺼지고 말 것이어서 민간 부문에서의 수요가 더욱 필요한데도 말이다.
미국, 영국, 스페인,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등 전통적인 소비 국가에서는 국내 민간 수요, 특히 소비가 부진하거나 위축되고 있다. 중국이나 아시아 국가들, 그리고 독일·일본 등 저축률이 높은 국가에서는 순수출의 감소를 보충하기 위해 소비가 빠르게 늘지 않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공급 능력 과잉에 비해 글로벌 총수요가 부진한 상태다. 이것이 글로벌 경제 회복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더블 딥(double-dip) 침체를 우려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글로벌 경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동원된 통화 및 재정 완화 정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출구 전략(exit strategy)이 논의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정책 결정자들이 해도 비판받고, 하지 않아도 비판받는 상황이기 때문에 망가질 수밖에 없다.
만약 정책 당국자들이 재정 적자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세금을 올리고 지출을 줄이면서 과잉 유동성을 줄여나간다면 이미 시작된 미약한 경기 회복마저도 망가뜨릴 위험이 있다.
하지만 정책 당국자들이 대규모 재정적자를 유지한 상태로 계속 돈을 푼다면, 어떤 시점에 가서는―현재의 디플레이션 압력이 좀 더 누그러진 이후―채권 시장이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이 시점에 가면 인플레이션 기대가 높아지고, 장기 국채 수익률이 높아지며, 회복은 멀어질 것이다.
더블 딥 침체를 우려하는 두 번째 이유는 유가·에너지· 식량 가격이 유동성이나 투기적 수요 때문에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여건) 이상으로 빠르게 상승할 수 있다는 사실과 연관돼 있다.
지난해 배럴당 145달러의 원유가는 미국, 유럽, 일본, 중국, 인도를 비롯, 기타 원유 수입국에 충격을 안겨다 준 세계 경제의 임계점이었다. 만약 투기적 세력으로 인해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향해 치솟는다면, 지금의 세계 경제는 그 충격을 감당할 수가 없다.
올 연말쯤이면 이 심각한 글로벌 침체의 끝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선진국 경제는 견조한 회복세보다는 미약한 회복세를 보일 것이며, 더블 딥 침체의 위험도 높아지고 있다. 현재 주식 시장이나 상품 시장에서의 상승세는 실물 경제의 회복에 앞서서 온 것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조정이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