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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1
- 그리스도 안에 안식함 -
좌(坐 : 앉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 1:17-22).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6-9)
신앙의 첫 걸음
“하나님이 … 그분을 … 앉히시고 … 또 우리를 (그분과) 함께 … 앉히시니”. 여기서 우리는 먼저 ‘앉히다’라는 단어의 뜻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앉히다’라는 단어는 하늘에 속한 생명의 비결을 계시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행하는(行)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앉는(坐)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인의 기원은 그리스도이다. 성경은 그분이 사람의 죄를 깨끗게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 개개의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시작된다. 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과 함께 하늘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는 때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잘못 생각하여 먼저 행하고 나중에 앉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우리의 천연적인 생각 속에는, 우리가 만일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목표에 도달할 수 있으며, 노력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이룰 수 있으며, 행동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느냐는 관념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기묘하고 특별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시작부터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또 우리가 만일 무엇을 얻으려고 생각한다면 다 잃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위대한 ‘행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위대한 ‘이루었다’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에베소서의 시작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1:3)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시작부터 앉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것을 누린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이 축복을 얻기 위해 계획하고 노력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의 구원
행(行)하는 데에는 노력이 수반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2:8)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항상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의 범죄하고 상처받은 마음의 짐을 그분께 내려놓았을 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시작은 우리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는 데 있지 않고, 그분이 이루신 것을 의지하는 데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와 같지 않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셨다.”고 말하는 것이 믿음의 생활에서 첫발을 내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주 예수를 의지하는 이 원칙에 근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혜는 무한한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고자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 안에서 안식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앉는다(坐)’는 것은 안식하는 태도이다. 일이 다 이루어지고 마치게 되면 우리는 앉는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앉는 것을 배워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생명 안에서 자랄 수 있다. 이것은 모순된 말 같지만 사실이다.
‘앉는다’는 것
‘앉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행하거나 서 있을 때 체중은 다리에 쏠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앉으면 체중은 의자나 침대 위에 실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행하거나 서 있을 때는 점점 피곤을 느끼지만, 일단 우리가 앉으면 안식을 느낀다. 우리가 행하거나 서는 데는 많은 힘이 소모되지만 앉으면 즉시 편안해지는데, 이는 압력이 근육이나 신경에 가해지지 않고 우리가 앉은 다른 물건에 가해지기 때문이다.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앉는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무거움―우리의 짐, 우리 자신, 우리의 장래 등―을 주님께 내려놓는 것이다. 이것은 그분이 모든 책임을 지시도록 하는 것이다.
아담의 창조
이것이 원래의 하나님의 원칙이다.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은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일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사실을 말한다면, 하나님은 여섯째 날까지 매우 바쁘셨다. 그러나 일을 마치신 후에 그분은 안식하셨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은 하나님의 안식일이 되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안식이다. 그러나 아담은 어떠했는가? 그와 하나님의 안식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경은 아담이 여섯째 날에 피조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는 앞의 육 일 동안의 일에는 분깃이 없었음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여섯째 날 마지막에 피조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하나님의 제칠 일이 아담의 첫째 날이다. 하나님은 육 일 동안 일하시고 나서 그분의 안식일의 안식을 누리셨으나 아담의 생활은 시작부터 안식이었다. 하나님은 먼저 일하시고 나중에 안식하셨으나,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다음이라야 일할 수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다 마치셨으므로 아담의 생활은 안식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한걸음을 내딛고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으므로, 우리는 구속에 대해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이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친히 이루신 역사(役事)의 가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노력과 그리스도의 역사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과 구속의 안식이라는 이 두 가지 역사적 사실 사이에 아담의 범죄와 심판에 관한 이야기와, 사람의 끊임없는 무익한 노력에 관한 비참한 이야기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자신을 버림으로 잃어버린 위치를 회복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분은 그분의 길을 가실 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구속의 대가를 치르신 후에야 비로소 “다 이루었다!” (요 19:30)고 외칠 수 있었다. 이 승리의 외침으로 인해 우리의 추론은 정확한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모든 것을 우리가 다만 믿음으로 그 사실에 대한 누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의 핵심 단어 ‘앉다’는 우리에게 ‘앉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다만 우리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앉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사(엡 1:18) 이중 사실, 곧 하나님이 먼저 큰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 앉히시고’ 나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분과 함께 앉히셨다’는 사실 안에, 우리를 위해 포함된 모든 것을 깨닫도록 기도했다.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첫 번째 공과는, 사역의 근원은 결코 우리가 아니며 그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의 위치를 주셨다. 그분은 그분의 아들이 이루신 일을 우리에게 제시하시고 우리에게 ‘앉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 중에 큰 연회에 우리를 초대할 때 하신 말씀인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눅 14:17)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을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공급하고 준비해 놓으신 것을 보는 데 있다.
그분이 이루신 역사의 범위
이 점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앞으로의 체험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일에 근거하지 않고 항상 다른 분이 이미 이루신 일에 근거한다. 모든 새로운 영적인 체험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또 한번의 새로운 ‘앉히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생명의 원칙이며,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원칙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각 단계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동일한 원칙을 따르는 것이다.
죄 사함
봉사를 위해서 어떻게 그 영의 능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것을 위해 우리가 반드시 수고해야 하는가? 하나님께 간구해야만 하는가? 금식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혼을 괴롭게 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어떻게 죄 사함을 받았는가? 바울은 우리에게 이것은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따른 것이며, 또한 그분이 사랑하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엡 1:6-7)이라고 말한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다. 우리는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즉 그분이 이루신 것에 근거하여 구속을 받은 것이다.
그 영의 부어 주심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영을 부어 주시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곧 주 예수의 높여지심이다(행 2:33).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므로 나의 죄는 사함을 받았고, 그분이 보좌로 높이 올려지셨음으로 나는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얻는다. 이 두 가지 은사는 모두 나의 어떠함이나 내가 행한 어떠함을 의지하는 데 있지 않다. 나는 죄 사함받기에 합당치 않고 그 영의 은사를 얻기에도 합당치 않다. 내가 얻은 모든 것은 ‘행함’(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앉음’(坐)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무엇을 함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주님 안의 ‘안식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처음 구원받는 체험을 기다릴 필요가 없듯이 그 영의 부어 주심을 얻는 것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내가 확신하건대, 당신은 이 은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도 없으며 애써 노력할 필요도 없고 ‘(그 영의 부어 주심을) 기다리는 집회’를 할 필요도 없다. 그 영이 당신에게 부어진 것은 당신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높여지심으로 인한 것이다.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는 죄 사함과 마찬가지로 ‘너희의 구원의 복음’(엡 1:13) 안에 다 포함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체
에베소서의 특별한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다른 제목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있는가?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즉 바울이 말한 ‘그분의 충만’의 각 부분이 되기에 합당케 했는가? 물론 우리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여 그분과 연합한 것이 아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4:4). 에베소서는 사실을 제시한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예수로 시작하며,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신 사실로 시작한다(1:4).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심으로 우리가 그분을 믿게 될 때, 우리는 이 면에 있어서 더 이상의 어떤 진보된 행동을 할 필요도 없이 그 즉시 그분과 연합된 생명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의 모든 체험이 우리의 역사가 됨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다면, 오늘날 매우 긴요하고 실제적인 문제인 우리가 거룩케 되는 문제는 어떠한가? 우리가 어떻게 죄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는가? 수년 동안 우리를 따라다니며 우리를 괴롭혔던 ‘옛사람’은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해졌는가? 비결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앉는 것이며, 하는 데 있지 않고 이미 이루어진 일 위에 안식하는 데 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 “그러므로 우리가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롬 6:2, 3, 4, 엡 2:5) 이상에서 서술한 모든 구절은 다 과거형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주 예수께서 약 이천 년 전에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나도 그분과 함께 못 박혔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대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분의 체험이 오늘날 나의 영적인 역사가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얻었다고 말씀하신다. 오늘날 내가 얻은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얻은 것이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말한 이러한 일들이 장래의 일도 아니고 심지어 현재의 갈망도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이며, 믿음을 가진 우리 모든 사람은 이미 그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십자가에 못 박힘, 살아남, 일으켜짐, 하늘에 앉음―라는 이러한 관념은,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처럼 사람의 생각으로 알기 어려운 것이다. 니고데모의 경우는 어떻게 거듭나는가의 문제였다. 그러나 여기는 더욱 불가능한 일, 즉 거듭남과 같이 우리의 몸에 직접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이미 다른 한 분의 몸에서 효력을 발생한 것을 우리의 것으로 보고 받아들이는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해석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다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갈 2: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과 연합한 것은 그분의 죽음으로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 죽음 안에 우리를 포함시키셨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있는데, 이는 우리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를 어떻게 분명히 알 수 있는가? 내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를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안에 있고”(고전 1:30),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 1:21). 이것은 우리가 믿고 영접하며 그 가운데 기뻐할 수 있도록 그분의 주권적인 지혜 안에서 그분이 이루신 일이다.
잡지 속의 수표
내가 만일 수표 한 장을 끼워 둔 잡지를 태워 버렸다면, 그 수표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잡지와 함께 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 잡지가 간 곳으로 그 수표도 간다. 이 둘의 역사는 이미 하나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신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분이 거치신 것을 우리도 거쳤으며, 그분이 체험하신 것을 그분 안에서 우리도 체험한 것이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이것은 사람이 분투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역사이다. 우리의 이 역사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 쓰여진 것이다. 당신은 이 사실을 믿는가?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영광스러운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은 것은 우리가 행한 것에 근거하거나 심지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려는 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를 위해 이루신 것에 근거한 것이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분명해지고 우리가 돌이켜 이 사실을 믿을 때(롬 6:11), 우리는 거룩한 생활의 비결을 찾은 것이다.
실패의 원인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일에 대한 체험에 있어서 우리는 아는 것이 너무나 적다. 가령 어떤 사람이 당신 앞에서 무정하게 당신을 비평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당신이 여전히 입을 다물고 이를 악문 채 억지로 참으며 힘을 다해 감정을 억제하고 분을 가라앉힌 다음 상대방에게 합당한 예의를 갖춘 합당한 반응을 보였다면, 당신은 큰 승리를 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분노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떤 때는 분노를 참지 못하게 된다. 문제는 바로 당신이 앉기 전에 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반드시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행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시작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반드시 분명하게 앉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죄에서 구원을 받는 비결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의지하는 데 있다.
어느 기사(技師)의 고민
서양의 어떤 도시에 사는 기사(技師)가 있었는데, 그는 집을 떠나 멀리 극동으로 오게 되었다. 그가 이삼 년 동안 집을 비운 사이에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그의 가장 친한 친구를 따라 집을 나가버렸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아내와 두 아이와 그의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 내가 집회에서 말씀을 다 전하고 나자 매우 애처로운 이 사람은 나에게 와서 심중을 토로했다. 그는 “근 이 년 동안 제 마음은 밤낮 증오로 가득 찼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제 아내와 친구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제가 그들을 용서하려고 하면 할수록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늘 결심을 하지만 실패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당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은 당신의 죄를 담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이 못 박히셨을 때 당신의 옛사람도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이미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당신, 즉 당신을 배반한 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는 당신은 그분 안에서 이미 제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처리하셨으며, 어떤 것도 당신에게 처리하도록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그분께 다만 이렇게 간구하십시오. ‘주여, 저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지 않고, 다만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신뢰합니다. 저는 용서할 수 없으나 당신이 저를 대신하여 용서하실 것을 믿습니다. 또한 오늘 이후로 제 안에서 주님이 이렇게 행하시옵소서.’”
그는 그곳에 앉아서 놀라며 “이것은 전혀 새로운 말입니다. 저는 제가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한다고 느꼈었습니다.”라고 말하더니, 잠시 후에 “그래도 제가 무엇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행함이 멈출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당신이 멈춰야 하나님께서 시작하십니다. 당신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본 적이 있습니까? 문제는 그의 두려움 때문에 그가 당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그를 구하는 데는 단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당신이 그를 때려 의식을 잃게 한 후에 그를 육지로 끌어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허우적거리며 외치다가 힘이 다 빠지게 한 후에 구하는 방법입니다. 만일 그가 아직 힘이 남아 있는데 당신이 그를 구하려고 하면 그는 겁이 나서 당신을 꽉 붙잡고 당신을 물 밑으로 잡아당길 것입니다.
결국 그와 당신 모두 익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남은 힘이 완전히 다 소모된 때라야 비로소 당신을 구하실 수 있습니다. 일단 당신이 스스로 하려는 것을 멈추면 그분이 모든 것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절망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기사(技師)는 벌떡 일어나더니, “형제님, 저는 이제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저는 이제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광이 가득한 얼굴로 즐거이 돌아갔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심
나는 복음서의 비유 중에서 탕자의 비유가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가장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께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눅 15:32)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 말씀에서 계시하시는 것은 구속의 범위 안에서 그분의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를 위해 끊임없이 수고하는 형이 아니라 아버지를 그의 모든 것으로 삼는 동생이며, 계속 무엇을 해 주는 형이 아니라 계속 받기를 원하는 동생인 것을 알 수 있다. 탕자가 방탕한 생활로 그의 재산을 다 허비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가 재산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단 한마디 책망도 하지 않았으며, 재산에 대해서도 전혀 묻지 않았다. 그는 아들이 허비한 모든 것으로 인해 걱정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돌아와 그에게 어떤 것을 소비할 기회를 준 것으로 인해 기뻐했다.
하나님은 매우 부유하시며, 그분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주는 것이다. 그분의 귀한 창고는 이같이 풍성하다. 우리가 만일 그분께 그러한 귀한 것을 쓰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리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분께 고통인 것이다.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발과 잔치를 탕자를 위해 베풀 수 있는 것을 기뻐했으며, 이러한 것들을 큰 아들에게 베풀 수 없음을 근심하고 슬퍼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분은 매우 풍성하시므로 우리가 다만 그분이 주고 또 주고 또 주실 수 있도록 한다면, 그것이 그분에게 참된 기쁨을 드리는 것이다. 그분은 매우 능력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위해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그분을 근심하고 슬퍼하게 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께서 하고 또 하고 또 하시게 하기를 갈망하신다. 그분은 영원히 주시는 분이 되며 영원히 일하시는 분이 되려 하신다. 우리가 단지 그분이 얼마나 풍성하며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기만 하면, 우리는 그분이 모든 것을 주시도록 하며 그분이 모든 것을 하시도록 할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기쁨을 다시는 구하려 하지 않을 경우, 당신의 좋은 행위가 멈춘다고 생각하는가? 또한 당신의 모든 것과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게 할 경우, 그 결과가 당신이 한 것보다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스스로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다시 율법 아래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는 심지어 우리의 가장 좋은 노력도 ‘죽은 행위’이기 때문에 효과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다. 그 비유에서 두 아들 모두 아버지 집의 기쁨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물론 큰 아들은 먼 곳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는 단지 이론상의 집 안에 있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그의 마음은 안식을 찾지 못했다. 그가 여전히 자신의 선행을 고수할 때 그의 이론상의 지위는 탕자의 경우와 같이 그의 누림이 될 수 없다.
당신이 ‘주는’ 것을 멈춘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얼마나 잘 주시는 분인가를 알게 될 것이며, ‘하는 것’을 멈춘다면 당신은 그분이 얼마나 역사하시는 분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작은 아들은 완전히 틀렸지만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안식을 얻었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출발점이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 허물로 죽은 우리를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4-6), 우리는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