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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 12 시련을 견디어 낸 자 - 약 1: 14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4. 시험과 극복 ( 1: 12 – 18 )
⑫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⑬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⑭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⑮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⑯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⑰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⑱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약 1: 12 시련을 견디어 낸 자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
1]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시험'(페이라스몬)은 2절에서 사용된 '페이라스모이스'(시험)와 동일한 것으로 믿음의 연단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다. 본 절이 2-11절과 연결된 것이며 13절 이하의 '시험'(temptation)과는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다(Ropes).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은 유대의 지혜서와 묵시 문학적인 표현 방법으로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 시 1: 1 -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시 32: 1 -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 잠 8: 32, 34 - 32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사 56: 2 -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예수께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축복을 말하였다.
* 마 5: 3-11 -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따라서 야고보는 이러한 표현법에 익숙하였음을 밝혀 주고 있다(Burdick).
2]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것임이니라)
본 절은 '호티'로 시작하며 시험을 참는 자에 대한 결과를 설명하는 목적절이다. '인정하심을 받은'(도키모스)는 3절에서 사용된 것처럼 '금이나 은을 제련하여 귀금속이나 동전으로서 자격을 얻는 것'과 같은 인정함을 의미한다.
* 롬 5: 4 -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것은 시험의 과정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는 자에게 순수함이 인정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됨을 시사한다. 여기서 '면류관'(스테파논)은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면류관이다.
* 고전 9: 25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 딤후 4: 8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니라.
시험과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Ropes, tasker).
영생은 행위의 대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인데 왜 상이라고 표현되었는가?
그것은 시험들을 통과하고 승리하는 믿음의 삶의 결과라는 뜻이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것은 또한 승리적인 믿음의 삶의 결과이다.
성경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승리할 것을 말씀한다.
* 롬 8: 35, 37 -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요일 5: 4 -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성경은 또한 영생이 이러한 정상적인 승리적 신앙생활의 결과라고 표현한다.
* 롬 6: 22 -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 갈 6: 8 -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므로 영생의 영광을 얻을 자들은 세상에서 시험을 잘 참아야 한다.
3] 시련을 만났을 때
야고보서는 성도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실생활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믿는 바를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적극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외부로부터의 시련(2-4절)과 내적 유혹(13-14절)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1) 인내합시다.
2절에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험”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으로, 3절에서는 “믿음의 시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믿음 때문에 받는 핍박이나 어려움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형제들이 그런 시련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련이 있을 때에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리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시련을 통하여 인내를 배우고 또한 그것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2) 지혜를 구합시다. (1: 5-8)
믿음의 시련을 당하고 있을 때에 시련을 이길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후히 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지혜 없음을 꾸짖지 않는 분”이시기에 의심하지 말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주심을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은 사람입니다.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로 정하지 못하면 인간적인 여러 생각으로 갈등하고 고통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있을 때에 어찌할까 고민하지 말고, 자기의 무지함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지혜 주실 것을 간구하십시오.
(3) 영적 신분을 기억합시다. (1: 9-11)
세상 사람들은 부한 자와 가난한 자로 사람을 나눕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는 가난한 것이 자기의 신분이고, 부한 자는 부한 것이 자기의 신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형제들은 재물이 많고 적음으로 자기의 신분을 정하면 안 됩니다. 비록 가난한 사람이라도 세상의 가치 기준을 초월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성도라는 높은 신분을 가진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한 형제도 세상의 재물을 자랑하지 말고, 세상과 전혀 다른 성도의 기준으로 자기를 보아 겸손할 수 있게 된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풀의 비유를 들어 세상의 부귀는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말합니다. 그런 것을 마음에 둔다면 미련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세상적 가치로 성도의 마음을 흔드는 모든 시련을 잘 참는 자가 복있다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그 수고를 아시고 옳다고 인정하신 후에 생명의 면류관을 보장하실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시험하신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1: 12-18)
12절의 “시험”이라는 말은 ‘믿음의 시련’을 뜻하고, 13절의 “시험”이라는 말은 ‘유혹’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에 범죄 하려는 충동을 부추기는 분이 아닙니다. 믿음의 시련 중에 어떤 사람이 그런 상태에 빠지는 것은 “자기의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것”이니, 욕심은 자라나서 결국 파멸로 이끈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각양 은사와 좋은 선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들로 이 만물 중에 첫 열매가 되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구원의 복음으로 새롭게 낳으신 분입니다.
우리들의 시련의 과정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큰 복을 누립시다.
4] 사랑하기에 주는 시련입니다. : 김정남 목사
< 누가 복 있는 사람일까요? >
누가 복 있는 사람일까요? 대개 사람의 불행은 재물을 복으로 이해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성경적 복은 물질적인 복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지경이 넓혀지고, 시야가 넓혀지는 것이 성경적 복이며,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것과 사람을 주시는 것도 성경적 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구절에서처럼 새로운 개념의 복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누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적고 있습니까?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복에 대한 혁명적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복 있는 사람에게도 시험은 온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험을 복의 바로미터로 본다면 야고보는 냉철하게 시험이 없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있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시험이 없는 것이 꼭 복은 아닌 것을 자주 체험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성도의 시험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험이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성도들이 어려운 시험을 당하면 가슴이 덜컹 합니다.저도 우리 교회 성도들이 시험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시험이 있어도 승리하기를 더욱 기도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시험이 없는 사람보다 시험이 있는 사람에게 더 관심과 애정이 갑니다. 새벽기도에 성도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할 때 당연히 그들을 위해 먼저 기도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은 그 순간에 우리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그 시험을 잘 치루기를 사랑과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성원하실 것입니다.
그처럼 성원하시는 하나님께 원망하는 모습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모습입니다. 시험과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과 성원을 신뢰하고 여전히 감사하며 살면 그 시험은 복으로 통하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 시험이 있는 자가 복 있는 이유 >
그렇다면 시험이 없는 자보다 시험이 있는 자가 복 있는 이유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저는 3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시험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의미합니다.
시험이 있다는 것은 내가 영적으로 살아있고, 영적으로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의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영적으로 죽은 자에게는 마귀가 시험을 걸지 않습니다. 가망이 없는 자에게도 마귀가 대들지 않습니다. 싸움도 서로 상대가 되어야 싸움이 되듯이 시험도 시험 걸만한 인생이라야 겁니다. 끝난 인생, 다된 인생한테 무슨 시험을 걸겠습니까?
마귀도 죽은 인생, 패잔병처럼 사는 인생은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만히 놔두면 되는데 괜히 자극하면 오히려 삶의 투지만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우리에게 마귀의 시험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간접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있음은 우리가 복된 존재임을 확인해 주는 표시입니다.
2. 성도는 시험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참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참는’으로 번역된 헬라 말은 ‘휘포메노’라고 합니다. ‘휘포’는 ‘밑에’라는 뜻이고, ‘메노’는 ‘머문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참는다는 말은 “밑에 머문다!”는 말로 능동성을 내포합니다. 즉 ‘시험을 당한다’라는 수동적인 자세보다는 ‘시험을 참는다’라는 능동적인 자세를 말합니다.
시험이 있을 때 “아이고 망했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당하는 순간에 그 의미를 깨닫고 맞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반응하면 믿음, 사랑, 소망, 지혜, 용기와 같은 소중한 덕목들을 얻게 됩니다.시험을 소극적으로 무작정 당하면 슬픈 일이지만 적극적으로 참는 것이라면 성숙한 삶의 지혜가 생깁니다.결과적으로 보면 시험이 없는 것보다 시험이 있는 것이 복이 있는 셈이 됩니다.
3. 시험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뚜렷한 증거입니다.
자녀들은 대개 부모들의 잔소리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사랑에서 오는 잔소리라고 생각할 때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말이 소중한 훈계로 들리느냐 아니면 귀찮은 잔소리로 들리느냐의 여부는 그 말에 사랑이 개입되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의 기분 나쁜 것을 자녀들에게 잔소리로 푸는 것이나 자기의 야망을 자녀들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잔소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 느낌이 자녀에게 들면 부모의 잔소리 및 징계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사랑으로 훈계하는 사실을 알면 대부분의 자녀들은 기쁘게 그 훈계를 수용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진실한 성도에게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대개 그 성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시는 시련입니다.시련은 하나님의 잔소리가 아닌 ‘참 소리’로 그 안에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저는 상담을 오는 사람에게 결론적으로 항상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에 주는 시련일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시련이 가벼워집니다. 시련을 지나치게 죄와 연관시켜 저주와 심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반응하면 시련은 더욱 무거워집니다. 시련은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편하게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사랑 받을 수도 있지만 시련으로 사랑 받는 순간도 있습니다.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시험을 쳐야 학생들에게 발전이 있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시험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억지로 골탕 먹이려고 자주 시험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험에서 우리가 좋은 점수를 맞으면 시험치는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면 또 시험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살면서 시험이 없을 수 없기에 시험이 전혀 없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시험을 줄일 수 있기에 이미 주어진 시험을 잘 쳐서 시험을 줄이려고 애써야 합니다.
시험을 줄이는 데에는 시험을 대하는 나의 신앙 태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시험은 교훈적인 의미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에 내가 그 시험을 통해 잘 교훈 받으면 그 시험은 다음에 면제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잘 치루는 지혜와 능력을 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 하나님이 내미시는 사랑의 시험지 >
그러면 어떤 사람이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을 믿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숙한 사람이라야 시험을 복으로 소화할 수 있습니다. 유치한 사람은 그저 돈 보따리나 굴러 와야 복인 줄 알입니다. 또 그런 사람은 손해를 입으면 그것이 저주인 줄 압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시야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만 시험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이 축복과 은사가 있음을 믿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여기에서 ‘인정받는다’는 말의 헬라어는 ‘도키모스’입니다. 그 말은 훈련을 통해 순도가 높아졌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시험에는 두 가지 종류의 시험이 있습니다. 하나는 ‘페이라조’의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본인의 죄와 허물로 당하는 시험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도키마조’의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단련을 위한 시험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시험은 바로 ‘도키마조’의 시험입니다. 즉 우리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우리의 신앙 순도를 높이기 위한 시험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통하여 우리를 정화시켜 나갑니다. 그래서 때때로 시험을 허락하여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을 버리게 하십니다. 잘못인 것을 알고 미적거릴 때 하나님은 기어이 시험을 통해 끊게 하십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시험과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우리의 영적 수준을 높이시고 우리의 인격을 격상시키십니다. 그리고 어느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때로 시험을 당할 때 지나친 죄책감에 빠지고 너무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큰 죄를 지었고 내가 아주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만 시험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시험을 당하셨고, 특히 40일 금식기도를 한 후에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더 축복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고 우리의 영적 수준 높이려고 하나님이 인생 교실에서 내미시는 사랑의 시험지와 같습니다. 시험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기쁨으로 잘 견딤으로 신앙이 자라고, 인격이 자라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이 되어 마침내 천국의 면류관을 얻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약 1: 13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
1]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원문에는 본 절 초두에 '그러나'라는 뜻의 말(메데이스)이 있다.
시험의 원인은 무엇인가? 물론 하나님의 주권 진리에서 보면 모든 일들의 제일 원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악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본 절의 '시험'(페이라조메노스)는 앞서 언급한 '시험'(2, 12절)이 의미하는 '시련'(trial, test)이 아니라 '유혹'(temptation)을 의미한다.
야고보는 '페이라조메노스'를 '하나님께'(아포 데우,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매개(媒介)의 성격이 강한 '휘포'(...의하여)를 사용하지 않고 '근원'을 의미하는 '아포'(...로부터)를 사용하여 '페이라조메노스'가 발생하게 되는 진원지가 하나님이 아님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Robertson).
그 '유혹'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죄악의 기질과 욕심에 미혹되어 발생하는 것으로(14절) 죄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시험과 시련은 어떻게 다른가?
시험은 나쁜 일을 하도록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라면, 시련은 성숙해질 수 있도록 기회를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유혹하여 함정에 빠트리지 아니하신다. 다만 우리의 영적 성숙을 위해 가끔 역경을 허락하신다.
2]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시험을 창조하시거나 사람을 시험하지 아니하실 뿐더러 아무에게도 시험을 받지 아니하신다.
'시험을 받지 아니하시고'(아페이라스토스)는 부정 접두어 '아'와 '시험하다'의 '페이라조'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악에서부터 거리가 먼' 상태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Hort, Diodorus, Josephus), 유혹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시사한다(Burdick).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
약 1: 14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
본 절은 사람이 유혹을 받는 근원을 설명하고 있다. '시험'(temptation)이 사람을 연단시키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 섭리라고 합리화 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사람이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는 것이다.
1]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미혹됨'(델레아조메노스)은 원래 사냥이나 고기잡이에서 유래한 말로서 문자적으로 '미끼로 고기를 꿰어 내다', '올가미로 사냥하다'를 의미한다(Mayor). 사람들이 유혹을 받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자기 앞에 놓인 낚시 바늘에 물려 이리 저리로 이끌려 다니는 모습과 같다.
'욕심'(에피뒤미아스)는 악한 뜻에 대한 열망이다.
* 롬 7: 17-23 -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 갈 5: 16-21 -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 엡 2: 3 -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살전 4: 5 -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