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자료바구니(기독) 원문보기 글쓴이: 자료바구니
[로마서 8장26-30] 성령의 도우심과 구원의 5단계
♣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26(상))
성령님 역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미래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의 육신이 제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여러 가지 죄악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몸은 타락으로 인해 연약함과 무능함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정욕을 좆아 살고, 또한 하나님을 아는 일에 무지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정죄에서 벗어났지만, 우리 몸이 완전히 죄의 세력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도 몸의 연약함을 인해 피곤을 느끼며, 때로 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연약함 때문에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연약함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육신이 연약해서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영광에 이르는 날까지 우리와 함께 동행해 주시며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 성령은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하신다(26(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때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때에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지 잘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해력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왜 그 환경을 주셨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환경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 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그릇된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모세와 바울도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기도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신 3:23-26). 왜냐하면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자기 몸의 가시(질병?)를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고후 12:1-10).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가시를 통해서 바울을 겸손하게 만들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육신에 계실 때에 십자가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소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도와준다"는 말(순안티람바노)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진 말이 합해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첫째는 "함께"(순)라는 말이고, 둘째는 "극복한다"는 말이고, 셋째는 "들어올린다"(람바노)는 말입니다. 이 말은 "두 사람이 짐을 함께 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눅 10장)을 보면 나사로의 집에서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때에 언니 마르다가 음식을 준비하느라 매우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언니를 도울 생각을 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 앉아서 말씀만 들었습니다. 그 때에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저(마리아)를 명하여 나를 도와주게 하소서!"(눅 10:40) 이 때에 사용된 "돕는다"는 말이 바로 본문에 나온 "돕는다"(순안티람바노)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런 의미를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를 돕는다!"는 말은 '우리가 연약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거나 실행하지 못할 때에,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를 도와서 그것을 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과 함께 하면 우리는 능히 그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오해해서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성령님께서 모든 일을 다 해주신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해도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순종할 때에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도와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바울은 성령님께서 "말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의 기도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처럼 말로 표현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말로 "말할 수 없는"이라고 번역된 말(알라레토이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탄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릇된 기도를 드릴 때에 성령님께서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우리 속에서 탄식하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이러한 점에서 성도들에게는 두 명의 중보자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시는 중보자(그리스도)가 있으며, 또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중보자(성령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 때에 좀 더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27절: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모두 살펴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말없이 탄식하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기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생각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말없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헛되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기도를 잘못했을 때에도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아무리 연약해도 언제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에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경우에도 성령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드려주시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연약해도 언제든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을 따라 부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룹니다.“
* 우리가 알거니와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통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두 알지 못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고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환경을 당해도 그 환경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들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쁨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단은 성도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그들을 낙심하게 만들려고 미혹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러한 때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환경은 그들에게 최선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들을 그 환경에서 보호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자들을 보내서 성도들이 가는 모든 길에서 지켜주시고(시 91:11), 성도들을 눈동자처럼 보호해 주십니다(신 32:10, 슥 2:8).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닥쳐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들에 피는 이름 없는 들풀도 가장 좋은 옷으로 입혀주시고,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고, 그들을 보호해 주실 것은 당연합니다(마 6:25-30).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머리털 숫자까지 모두 다 세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마 10:31).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철저하게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시험을 만났을 때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약 1:2).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선한 뜻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히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가 된 사람들을 더욱 더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하게 보호해 주시고 그들을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음을 거절한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와 심판으로 인도하십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듯이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합니다. 사랑이 없는 관계는 부자 관계가 아니라 주종의 관계입니다. 또한 바울은 성도들을 "그 뜻대로 부름 받은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창세 전에 자기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정한 때에 하나님은 자기 종을 보내서 그들을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부름을 받았으며, 따라서 그들의 구원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름을 받은 성도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환경을 동원해서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성도들에게 평안과 풍요로움을 주십니다. 그때에 우리는 평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성도들에게 고난과 역경도 주십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성도들을 겸손하게 만들고 성숙한 인격을 소유하게 만들며, 여러 가지 귀중한 일들이 성취되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의 때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남들이 알지 못한 수많은 계시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계시를 통해서 놀라운 복음의 비밀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한 편으로 바울에게 가시(몸의 질병)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로 인해 큰 고통을 받았지만, 이로인해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계시와 가시는 모두 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의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주신 선물이었습니다(고후 12:7-9).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시련은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만들어 주는 좋은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도 그것을 선하게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방탕하게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주셔서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즉시 용서하고 안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리는 징계와 매도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역하던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포로가 되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포로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났던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욥과 그 가정에 큰 물질과 명예와 평안과 화목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축복받은 욥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가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서 한 순간에 그에게 주셨던 모든 것을 빼앗으셨습니다. 욥은 한 순간에 재산, 자녀, 물질, 명예, 그리고 건강마저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욥은 왜 자기에게 이러한 시련이 찾아오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기나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하소연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그 모든 일이 자기에게 유익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귀로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을 위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형통한 때뿐 아니라, 시련을 당할 때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29절: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그를 많은 형제들 중에 장자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원의 첫 단계: 미리 아심(예지)
바울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첫 단계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사람을 "미리 아셨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미리 안다"는 말(프로에그노)은 문자 그대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미리 누가 예수님을 믿고 누가 믿지 않을 것인지 알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반대를 받고 있습니다. 이 입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누가 예수님을 믿을 것인지 아시고 그들을 선택하셨다면, 구원이 은혜가 아니라 사람의 행위(믿은 행위)에 달려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그 동안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말해온 내용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줄곧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행위가 아닌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주석가들은 "안다"(야다)는 히브리어 동사를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뿐 아니라, 전 인격적으로 깊은 애정을 갖고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 근거를 구약에서 "알다"라는 동사(야다)가 단순히 지적으로 하는 것 뿐 아니라, "전인격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 1:6, 144:3)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알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알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호 13:5)에서도 "알았다"는 말이 "사랑하셨다"는 뜻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비단 구약 뿐 아니라 신약에도 역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롬 11:2)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이 곳에서 "미리 알았다"는 말(프로에그노)은 "사랑하여 선택했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머레이는 이러한 입장에서 29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사랑하신 사람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로마서의 은혜 사상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신7:7-8, 엡 1:4-5 참고).
29절: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그를 많은 형제들 중에 장자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 둘째 단계: 미리 정하심(예정)
둘째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사랑하신 자)를 "미리 정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미리 정하셨다"는 말(프로오리조)은 문자 그대로 "사전에 미리 결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행 4:28). 바울은 여기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이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선택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창 12:1-3). 이삭을 선택하시고 이스마엘을 버리시며, 야곱을 선택하시고 에서를 버리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약도 이러한 사상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제자들이 주님을 선택하지 않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도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 또는 "창세 전"에 우리를 미리 선택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엡 1:4,5,9,11, 3:11 참조). 이러한 진리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 일은 성령의 특별한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 에정의 목적(29): 그리스도를 본받음,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게 함.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예정하신 것은 "그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자기 자녀로 예정하신 것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자녀들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믿고 자신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 즉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들 안에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함께 기도하며 도와주십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예정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맏아들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한 형제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하려고 계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알게 될 때에,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 세 번째 단계: 부르심(소명)
셋째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세 번째 단계는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일"(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미리 사랑하신 사람들을 자기 백성으로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종을 그들에게 파송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사람들은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들은 그 복음을 듣고 믿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예정 교리가 복음 전도를 불필요하게 만들며, 전도에 소극적이 되게 만든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예정 교리는 오히려 전도에 더 적극적이 되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음을 전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수많은 종들을 보내시고 그들로 하여금 갖은 고생과 희생을 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기초로 해서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전도자들의 희생과 수고를 잊느면 안됩니다. 2000년 전에 작은 땅,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된 복음이 오늘날 전 세계로 확장된 이유는 바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세계를 향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생각하고 전심으로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 넷째 단계: 의롭다 하심(칭의)
넷째로 바울은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네 번째 단계는 복음을 믿고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을 "의롭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한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며 그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용서하심으로 아무도 그들을 정죄할 수 없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동안 이러한 칭의의 문제에 대해서 로마서에서 계속 언급해왔습니다. 본문에서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말은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의로 의롭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과 신실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유지해 나갈 때에 우리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자기 자녀라고 부르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죄악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 다섯 번째 단계: 영회롭게 하심(영화)(30)
다섯 째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마지막 단계는 의롭게 된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불러서 그들을 의인으로 인정해 주셨으며,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고, 미래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자기 백성들을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아주셨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영화에는 어느 정도 성화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성화의 과정은 믿는 즉시 시작됩니다. 그리고 성화의 과정이 완성될 때에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성화의 완성은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자기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그들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러한 일들을 미리 바라보고 소망하면서 즐거워하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기꺼이 고난에 참여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다섯 가지 단계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사랑하신 백성을 미리 정하셨고, 때가 되어 자기 종을 보내서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은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받아들인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장차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다섯 단계는 깨뜨릴 수 없는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구원의 다섯 고리는 어느 누구도 끊을 수 없는 견고한 사슬입니다. 우리의 완전한 구원은 미래에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과거 시제를 사용해서 우리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우리가 참여할 영광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