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山四友 가을의 성북동 유적지 걷기
청산사우 10월 나들이는 서울의 성북동 유적지를 찾았다. 중간중간에 차를 탔는데도 22,000보를 걸었다. 成均館, 肅靖門, 尋牛莊, 壽硯山房, 先蠶壇址, 吉祥寺, 貞陵, 彌阿里고개 등이었다.
성균관은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와 우리나라 저명 유학자를 모시는 곳으로 文廟가 중심을 이룬다. 이곳에서 유학의 이론을 강의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문묘는 공사 중이라서 명륜당을 둘러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문묘와 명륜당 등은 성균관대학교 안에 있다.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四大門 중 북대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성북동에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산속에 있다. 풍수상으로 볼 때 북쪽은 물이 나오는 곳이므로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물은 순조롭게 나오면 좋지만, 너무 많거나 모자라면 큰 문제가 되므로 북쪽의 대문을 숙정으로 지은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조용하고 안정된 상태의 물이라면 그것이 바로 믿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숙정문이란 이름은 중종 때부터 등장하는데, 그 뒤로 이 명칭이 굳어졌다. 이곳은 대문을 잠궈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출입할 수 없었다. 한양 도성길의 북쪽 산 중턱이면서 白岳山 줄기가 성균관과 종묘로 내려가는 중간 길목이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이 말년에 머물던 집이다. 숙정문 가는 한양도성 길에 있는 와룡공원에서 멀지 않는 성곽 밑에 있는데, 북쪽 방향을 향해 집을 지었다. 일설에는 한용운이 남쪽으로 아침에 세안할 때 총독부 쪽을 봐야 하므로 그것이 싫어서 이렇게 했다고 하지만 지형상 남향집은 지을 수 없는 공간이다. 북쪽이 계곡이고 시내가 흐르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매우 단출한 한옥이다.
수연산방은 20세기의 소설가 李台峻의 거처였던 곳이다. 정식 명칭은 상허 이태준 가옥이다. 복덕방, 가마귀, 밤길 등의 여러 작품을 남긴 소설가였으나 1945년 후에 좌파 활동을 했고, 북한으로 넘어갔다가 숙청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壽硯은 오래된 벼루라는 뜻이다. 청나라 6대 황제인 乾隆帝가 고희 잔치할 때 축하 시를 지은 사람에게 벼루를 주었는데, 이것을 千壽硯이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태준은 누이에게 이 집을 남겼는데, 그 뒤로 생질녀가 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찻집을 열었고,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차는 마시지 않았다.
처음 계획은 간송미술관도 갈 예정이었으나 문을 열지 않아서 그냥 넘어가야 했다.
선잠단지는 누에를 처음으로 키운 사람으로 알려진 軒轅黃帝의 왕비인 西陵氏를 모시고 제사하던 조선시대 초기인 1471년에 만든 제단이다. 서릉씨는 嫘祖라고도 한다. 선잠단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그 터만 보존되고 있다. 앞에는 뽕나무를 심어서 그 뜻을 살리고자 했다.
길상사는 시인 백석과 연인관계였다고 주장하는 진향(김영한)이란 기생이 승려 법정에게 기증해서 만들어진 사찰이다. 그러나 실제로 백석과 연인 사이였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길상사라는 이름은 송광사의 옛 이름인데, 법정이 출가한 곳이 송광사여서 그 옛 이름을 따서 이 이렇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릉은 조선 왕조 최초의 왕릉이다. 태조 이성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神德王后 강씨의 릉이기 때문이다. 원래 정릉은 지금의 덕수궁 부근에 있었으나 태종 이방원이 사대문 밖인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고, 원래 능묘에 있었던 석물은 광통교의 재료로 쓰기도 했다. 17세기 후기인 1669년에 송시열의 건의로 릉의 규모로 복원되었지만, 원래의 모습대로는 조성되지는 못했다. 장명등과 鼓石 정도가 처음 릉을 조성할 때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비릉의 석재를 다리의 재료로 썼다는 것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미아리 고개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유행가로 유명하지만, 고개의 남서쪽은 조선시대에서 20세기 중반까지는 공동묘지로 명성이 높았다. 서울이 확대되면서 이곳의 무덤들은 망우리로 옮기면서 택지로 개발되었지만 땅 이름에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다. 彌阿는 넓고 황량한 모래벌판으로 된 땅으로 그곳에 보물이나 다른 무엇인가가 묻혀 있는 공간을 가리킨다. 즉, 이런 명칭으로 불리는 곳은 죽은 사람과 관련이 깊은 공간이라고 보면 된다. 공동묘지에 묻힌 영혼을 잘 보내기 위해 彌阿寺라는 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고개에는 점집이 매우 많았고 지금도 상당수가 남아 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한을 품고 살았던 內侍의 혼백을 받기 위해서라고 한다. 한양에는 내시의 공동 무덤이 여러 곳에 있었는데, 이곳의 것이 유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설일 뿐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청명하지 않은 하늘에서 몇 개의 빗방울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아주 재미있는 가을 걷기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미아리 유래에 대해 새로운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