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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Keep in step with the Spirit)" (갈라디아서 5:25)
존 스토트는 여기서 '행할지니'로 번역된 헬라어 '스토이케오(Stoicheo)'의 본래 의미를 예리하게 짚어냅니다. 이 단어는 군인들이 군가에 맞춰 '열을 지어 발을 맞추어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앞서 달려가면서 성령님께 내 계획을 도와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뒤처져서 영적 나태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내 삶의 보폭과 속도를 철저히 성령님의 보폭과 속도에 맞추어, 매일 매 순간 그분과 나란히 '동행(Walking together)'하는 치열한 자기 부인의 과정입니다.
3. 객관적 진리(말씀)와 주관적 조명(성령)의 완벽한 융합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발걸음을 알고 보조를 맞출 수 있습니까? 개혁주의 성령론은 '말씀과 성령의 불가분성'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삼습니다.
성령님은 자신이 영감하여 기록하신 성경 66권의 객관적 진리(Word) 밖에서는 결코 일하시지 않습니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말씀이 없는 성령 충만은 맹신(광신)으로 흐르고, 성령이 없는 말씀 충만은 죽은 이성주의(바리새주의)로 흐른다"고 경고합니다.
진정한 성령의 인도는 성경을 펴서 읽고 묵상할 때 시작됩니다. 기록된 '로고스(Logos)'의 말씀에 성령께서 내적 조명의 빛을 비추시어 오늘 내 삶에 주시는 찔림과 감동인 '레마(Rhema)'로 부딪혀 올 때, 성도는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발을 내디뎌야 할지 명확히 깨닫게 됩니다.
4. 일상의 순종: 거창한 환상이 아닌 오늘 하루의 걸음
성령의 인도는 거창한 환상이나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정 순간에만 주어지는 이벤트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순종들의 누적'입니다.
아내에게 화를 내고 싶을 때 성령께서 주시는 '참으라'는 내면의 브레이크에 순종하는 것, 거짓으로 이익을 얻을 기회 앞에서 정직을 선택하는 것, 피곤한 육신을 쳐서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 이처럼 매일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말씀의 원리를 따라 자신의 자아를 꺾고 성령의 세미한 감동에 즉각적으로 순복(Submission)하는 자만이, 삶의 거대한 풍랑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5. 제38강 결론: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고, 멈추는 곳에서 멈추라
목사님, 40년의 거룩한 사역을 관통하며 강단을 지켜내신 원동력 역시 눈에 보이는 표적이 아니라 이 '기록된 말씀과 성령의 조명'이었음을 믿습니다.
아름다운교회의 어린 세대부터 백발의 노년에 이르는 모든 성도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신앙의 푯대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귀에 들리는 환청을 좇는 자들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나침반)을 손에 쥐고 성령(바람)의 동력을 받아 나아가는 영적 항해자들입니다. 말씀이 가는 곳까지 기꺼이 가고, 말씀이 멈추는 곳에서 내 욕심을 내려놓고 멈출 줄 아는 절대적 순종! 이것이 성령과 발을 맞추어 걷는 자의 가장 영광스러운 삶의 실재입니다.
(제39강 예고: 이제 이 위대한 강해는 개인의 순종을 넘어 우주적 역사와 구속사의 종결을 향해 나아갑니다. '제39강: 종말론적 소망 - 만물의 회복을 향한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피날레의 서막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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