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everyday01.com 제로원(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복음을 처음부터 다시 전하자>의 줄거리:
복음을 처음부터 다시 전하자
(고전13:8~13)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복음을 처음부터 다시 전하자>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말씀을 전하고 있는 곳은 요번 여름에 옮겨진 장소입니다.
저는 방송채플이라고 이름을 하는데, 기존의 방송채플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전했습니다.
근데 계약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전을 했기 때문에 제가 스스로 제 뒤로 들어올 세입자를 구해야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계약기간이 끝날 때까지 다 물어내야 되니까.
다행히 세입자를 빨리 구하게 돼서 이 방송채플로 쓰이던 곳을 보여주고 그랬는데, 한 세 분이 몰려와서는 학원을 하신다고 하시면서 제가 해놓은 인테리어를 보고 사용하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그대로 놔두고 어떤 부분은 부분적으로 고쳐 쓰고…’ 제가 권리금을 받거나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고, 그저 빨리 나가기만 하면 좋을 그런 형편이니까 ‘좋으실 대로 하시라’고 했지요.
그리고 나중에 그분들이 인테리어를 하는 것을 가서 보았습니다.
웬걸요, 제가 해놓았던 인테리어는 싹 없어졌더라고요.
그래 어찌 된 일이냐고 했더니, 기존의 것을 놔두고 자기네 학원에 필요한 인테리어를 하려고 보니까 도저히 맞지를 않더라는 거예요.
재료가 아깝기도 하고 저 혼자 사용했기 때문에 깨끗하기도 하고, 어떻게든 써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서 다 부수고 전적으로 새로 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이런 경험 우리가 참 많지요.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느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기존 교회의 영적 상태를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복음의 본질적인 측면을 생각하면 복음은 처음부터 다시 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의 세 가지 덕목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렇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연이어서 말씀하시는 것은 사실은 성경 중에 처음 있습니다.
우리가 하도 믿음 소망 사랑을 많이 듣고 말하기 때문에 낯익어서 그렇지, 성경 속에서는 지금 처음 있는 부분이에요.
이것이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다, 이 말은 우리가 살펴보겠습니다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분리될 수 없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있는 3단계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려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3단계가 내게서 온전히 이루어져야 된다는 얘기에요.
그렇지 않으면 복음은 진정으로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잘 살펴보고 교회의 현재 영적 상태를 갖다 견주어서 생각하면, 이 3단계로 이루어지는 복음의 온전한 수용을 아무리 전해도, 지금의 교회의 영적인 상태로는 그 복음과 믿음에 대한 오해와 이탈됨이 늪처럼 형성돼있어서 3단계로 된 복음 수용에 관한 얘기가 다 늪에 빠져버릴 것 같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기존의 믿음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고 말씀을 전하는 게 아니라, 아예 복음에 대해 초보자라고 생각하고 듣는 나 자신도 복음을 처음 듣는다고 생각을 갖고 듣는 편이 훨씬 더 빠르게 복음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얘깁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 지금 최고의 은사인 사랑에 관한 언급이 마무리 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최고의 은사인 사랑이라는 게 결국은 어떤 것이었나 하면, 내가 사람을 만날 때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에요, 최고의 은사로서의 사랑의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는 이 사랑이 현실이 될 때 일어나는 두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대하면 예수님이라는 인간으로 오신 그분을 대하는 게 아니라 그분 속으로 들어와 계시는 하나님을 대하는 것과 같이, 그래서 주님께서 ‘내가 하는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이것이 사도들에게도 초대교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돼서, 주님이 뭐라고 하시냐 하면, ‘모두가 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하나가 되게 해주세요!’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마주대하게 되는 것이 첫 번째 현상이고, 두 번째 현상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시게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겁니다.
두 가지에요, 나를 통해 하나님이 나타난다고 하면, 첫째, 그럼으로써 내가 만나는 사람이 하나님을 마주대하는 거고, 그럼으로써 둘째, 내가 하나님과 합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이라고 하는 포인트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즉, 나를 통해 하나님이 나타난다는 그 사랑의 완성을 통해서 이웃사랑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사랑이 완성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 하나 된다고 하는 얘기에 대해서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은, 속세와 담을 쌓고 수도원에 들어가 묵상과 기도로 하루 종일 지내는 신비주의자들이 지향하는 그런 합일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본질적인 하나님과의 사랑으로서의 합일은, 직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합일,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하나 됨, 그리고 시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하나 됨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하나 됨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완성의 자리이기 때문에.
이웃에 대한 사랑의 완성의 자리가 곧 하나님에 대한 하나 됨의 완성의 자리이기 때문에, 수도원에 들어가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 그러면 ‘왜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합일이 얘기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영이신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야 이 땅에서 만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온전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직장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이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그 사람을 향하여 내려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김 부장님을 향해서 갖고 계신 사랑이 내려오고 있는 중인데, 내가 김 부장님을 만날 때 성경말씀이 기억나요, ‘이웃을 사랑하라’ 그래서 김 부장님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이미 보내고 계시는 김 부장님에 대한 사랑 말고, 별도로 내가 따로 김 부장님을 사랑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바른 사랑도 아닙니다.
그런 사랑 하게 되면 하게 될수록 오히려 상대방을 망치게 됩니다.
내가 자식을 향하여 이미 하나님이 갖고 계신 그 사랑과는 별도의 사랑을 따로 자식에게 행할 때에 자식 망치고 내 인생 괴로워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이미 갖고 계신 김 부장님과 내 자식에 대한 사랑을 올라타는 것이고, 그 사랑이 나를 통해서 전달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바라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렇게 함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과 합일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내보내시는 동안에 그게 나를 통해서 나가시면서 나와 하나님이 합일되는 겁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계기를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거예요.
놀라운 일이죠, 그렇죠?
그러니까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가시떨기 나무에서 불이 타는 것처럼 내 힘이 소모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본문에서 그려진 사랑의 스케치를 십자가로 내 마음에 대해서도 그려나간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오래 참고, 시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온유하고… 이런 스케치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내 마음에 모습으로 그려지게 될 때, 이미 하나님이 갖고 계셨던 사랑이 흘러내려오고 있는 것을, 나를 통해서 흘러가게 하시므로 나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그러한 절대 평강과 절대 행복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고, 나를 만나는 이웃, 부모, 자식,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는 축복의 자리가 만들어진다는 얘깁니다.
여기서 바울은 사랑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8절부터.
은사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적인 덕목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즉, 은사는 선택적인 겁니다, 선택적이라는 말은 나에게 주어질 수도 있고, 나에게 주어진 것이 저 사람에게 안 주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복음의 본질적인 덕목으로서 믿음과 묶여버립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믿음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 믿음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동안 사랑이라는 것을 다른 은사들처럼 선택적인 것으로 이야기해 오다가, 갑자기 지금 믿음과 연결시킴으로써 필수적인 덕목으로 우리에게 다시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사도바울이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끝내는 것은 어떤 뜻인가 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데,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그 다음 소망의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고, 소망이 있다면 그 다음에 사랑의 단계로 넘어가게 돼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믿음을 갖게 될 때 유기적으로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사랑의 단계까지가 온전히 이루어지면서 구원을 받는다는 얘기와 똑같다는 거예요.
그렇게 볼 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얘기는 소망과 사랑의 단계까지 이룸으로써 구원이 온전해진다는 얘기라고 볼 수 있을 때, 현재의 교회 상태와 견주어보면 차라리 복음을 처음부터 다시 전하는 편이 훨씬 더 복음을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잘 일어날 수 있겠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대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 소망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내용이기에 서로 연결이 되는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심장을 꺼내어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마음심장을 꺼내 준다는 얘기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마음으로 너무너무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왜 너무너무 좋아합니까?
그것만 있으면 만족할 것 같아서 좋아합니다, 그것만 있으면 기쁠 것 같아서 좋아합니다, 그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것만 있으면 기쁠 것 같고 만족할 것 같고 행복할 것 같은 것, 이게 바로 믿음이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마음심장을 꺼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소망과 사랑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면, 사랑으로 도달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믿음으로 끝나는 얘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믿음은 첫 번째 단계라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가 소망입니다.
소망은 뭡니까?
내가 갖게 되거나 함께 있게 되거나 내가 묶이게 되면 너무너무 좋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그것을 그렇게 묶이고 갖게 되고 함께 있게 되기를 소망하는 단계가 주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연결이 돼있는 거예요.
너무너무 마음이 좋아하고 그것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소망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무능해서 구체적으로 얻을 수 있기 위한 행동을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으로는 소망하지요, 그것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소망합니다.
그렇게 소망한 것이 마지막 단계에서 정말 내 것으로 주어져버렸어요.
내가 그것과 함께 있게 되고 그것이 내 것이 돼버리는 그런 단계, 이게 바로 사랑의 단계라는 겁니다.
나와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것, 그래서 소망하고 바라던 것이 합일이 되는 단계가 사랑의 단계에요.
그러니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사랑이 최고라는 얘기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다 별개의 것들인데 비교를 하다보면 사랑이 제일이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사랑이 제일이면 믿음이 없어도 되는 겁니까? 소망은 없어도 되는 겁니까?
아니라는 얘깁니다.
혹, 학자들이 이런 얘기들을 해요.
이 땅에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믿음과 소망이 필요했지 천국에 들어가고 나면 그렇지 않다.
아닙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것은 다 천국과 연관이 되는 게 아니라 천국에 계신 하나님과 연관되는 것이에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요청되는 덕목이지만 우리가 지금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회사에 들어온 여자 신입사원 중에서 미스 김을 보니 온몸에 전율이 생기면서 ‘내가 저 여자와 결혼하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믿게 됩니다.
이게 마음심장이 이식이 된 거예요, 이게 믿음이에요.
저 여자와 결혼하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의 단계입니다.
그리고 소망합니다, 그래서 커피도 갖다 주고, 신입사원으로 이 회사에서 잘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 오리엔테이션도 해주고, 그렇게 소망하고 움직이는 사이에 미스 김도 마음 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그동안 미스 김에 대한 짝사랑으로 소망만 하던 단계에서 미스 김으로부터 응답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결혼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사랑의 단계라는 거예요, 합일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또, 사람뿐만이 아니에요.
성장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는 중에 돈이 마음에 딱 꽂힙니다.
‘돈이 있어야 되겠구나! 돈이 있으면 결혼도 잘할 수 있고, 돈이 있으면 대우도 받을 수 있고, 돈이 있으면 못할 일이 없고, 돈이 최고다,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다’ 이게 믿음이에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떤 단계가 나옵니까? 당연히 이어서 소망의 단계가 나옵니다.
그렇게 좋은 돈을 많이많이 벌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소망의 단계가 임하게 되고, 그리고 진짜로 돈을 벌었습니다, 이게 바로 사랑의 단계요 합일의 단계입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과 하나가 되는 단계,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단계, 그렇게 좋아하는 것과 함께 있게 되는 단계, 이게 사랑의 단계라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한국교회의 영성을 생각하면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너무 큰 오해 속에서 전하고 들었다는 겁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에서 회개한다는 얘기는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미스 김하고 결혼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회개하라는 얘깁니다.
내가 돈이 있어야 만족하고 기쁘고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돈에게 마음심장을 이식했던 것, 돈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그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잘 길러야만 내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최고로 좋아하는 이 세상에서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 그것을 회개하라는 겁니다.
그 모든 것들, 돈 대신에, 미스 김 대신에, 부부간의 사랑 대신에, 자식 대신에, 성공 대신에… 하나님을 주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기쁘고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겠다는 얘깁니다.
마치 미스 김 하나 있으면 되겠다, 돈만 있으면 된다, 자식만 잘 되면 내 인생은 성공한다고 생각할 때처럼, 하나님 한 분만 가지면 모든 것이 없어도 된다, 라고 전해진 것이 복음이에요.
그러니까 교인 하나하나를 붙잡고 다그쳐 물어야 됩니다.
‘지금 당신이 좋아하는 게 뭐야? 속마음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게 뭐야?’ 물었을 때, ‘우리 자식이 서울대학에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것 대신에 내가 하나님 줄게, 자식이 서울대학에 들어가는 것과 하나님을 바꿀 수 있겠어?’ 물어봐야 된다는 거예요.
사업하는 사장님 붙들어놓고 ‘김 장로님, 지금 뭐가 소원이에요?’ ‘아, 사업이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사업 말고 내가 하나님 줄 테니까 사업 상관없이 하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겠소?’ 다그쳐 물어봐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 분이 제일 좋다는 믿음이 생겼을 때, 하나님을 갖고 싶어 하는 소망이 생기고, 하나님을 갖고 싶어 하는 소망의 단계에 이어서 진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합일의 단계가 이루어짐으로써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완성되는 그런 것이 신자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볼 때, 차라리 지금 기독교의 상태를 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버리는 겁니다.
‘당신이 진짜로 좋아하는 게 뭐야?’ 물어보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돈 잘 벌게 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진짜로 믿음이 아닙니다.
돈이 있어야 기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게 믿음인데, 이 믿음에서 생긴 돈 많이 벌고 싶다는 소망을 위해서 돈과 하나가 되겠다는, 이게 간음이거든요? 이걸 위해서 하나님을 동원하고 있는 이런 영성의 기반 위에서는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오히려 듣는 사람과 전하는 사람이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빠르다 이겁니다.
여러분, 초대교인들이 복음을 전했으니까 자꾸 늘어났을 것 아닙니까?
지하 동굴로 쫓겨 들어갔어요.
어떻게 지상에서 일구었던 일생의 모든 가업을 다 상실하고 지하로 들어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며, 자기들이 그 카타콤에서 견딜 수 있었을까요?
지상 위에서 일구어놓은 것들 중에 그 어떤 것도 더 이상은 내 마음에 만족과 기쁨과 행복이 될 수 없다고 제쳐버리고, 그 모든 것들로 행복하던 사람들이 그것들 대신에 하나님을 딱 선택했기 때문에, 카타콤에 들어가서도 200년 넘게 지낼 수가 있었던 겁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이 믿음을 갖게 되면, 지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소망하게 되요.
왜냐하면, 돈에 꽂힌 자는 돈을 소망하듯이 하나님께 꽂힌 자는 하나님을 소망하게 돼있고, 이 소망이 십자가에 걸려있는 약속을 따라서 반드시 이루어지게 돼있는 게, 사랑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는 길이라는 얘깁니다.
우리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것이 항상 있어야 될 것이라고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됩니까?
왜 항상 있을까? 사랑의 단계에 도달하면 끝 아닌가? 아닙니다.
결혼했다고 해서, 결혼이면 일단 끝 아니에요? 완성된 것이죠, 믿음 소망 사랑의 단계를 거친 겁니다, 그렇다고 결혼한 다음날이 되면 남편에 대해서 다 압니까?
평생 같이 살아도 남편을 다 몰라요.
하물며 하나님에 관해서, 한 번 꽂히고 소망하고 합일의 경지에 이르러서 내가 절대 평강을 느끼고 만족과 행복을 느꼈다고 하나님에 대해 다 안 겁니까?
아니에요, 날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면을 보고 또 꽂히고, 그 새로운 면이 발견된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또 소망하고, 그래서 또 합일에 이르고, 그 다음날 되면 또 하나님의 다른 면이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또 소망합니다, ‘아, 하나님이 이렇게 좋으신 분이구나!’
이렇게 무한히 반복되는,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끊임없이 영원토록 무궁히 하나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을 소망하게 되고, 하나님과 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이 반복 순환을 통해서 살게 되는 것이, 이 지상에서도 구원을 받는 것이고 영생의 차원의 삶의 내용도 바로 그것이라는 얘깁니다.
이런 믿음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생각하고 우리가 믿음생활을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유기적으로 연관돼있어서,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 하면 사랑의 단계까지 감으로써만 복음을 온전하게 받아들인 것이기에, 차라리 그동안 부분적으로 알고 있던 모든 신앙을 버리고 온전히 다시 시작함으로써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온전한 세 단계가 내게서 날마다 반복 순환되는 복된 삶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원점 삼고 다시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심을 믿고 그리스도의 소망을 주시고 하나님아버지와 합일을 이루게 하시사
사랑가운데 행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귀한 말씀 주시고 위로가 되게 하시니 감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