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2002-11
옛 동 무 에 게 서
박병민목사(새터공동체)
가을추석날에 이어 시월 마지막토요일 저녁에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던 어릴 때의 시골 동무들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나이 사십의 불혹(不惑, 不惑之年)을 앞에 두고, 그동안 각자의 발 디딘 자리에서 속속 자라서 여문 제 모습의 얼굴들이, 만남의 한자리에서 여기저기 보여지니, 여전(如前)하지만은 않은 것 같아 새삼스럽게 여겨지기까지 하다. 그 자리에서 여럿 가운데, 어릴 적의 이름 미석(美石)이였던 태현이를 만났다. 오늘은 그가 컴퓨터를 통하여 전하여 준, 이정하라는 분이 쓴 시를 전달받았다.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걸리 때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아래에 토를 달았다. 추운 계절이 왔습니다. 계신 분들 모두모두 건강하세요. 시간이 되는 데로 자주 인사드리겠습니다. 나는 보내온 친구의 그 글귀를 보면서 지난번 토요일 저녁의 왁자지껄한, 그리고 활기 찬 모습들을 다시 그려보았다. 그런데 굳게 서려는 우리들에게는 종종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이 인생의 길”로 나아가야만 하여야 될 때도 있다. 우리들은 자리 디딤을 하는 서른의 이립(而立)을 멀리 지나, 무엇에 홀리거나 혹하지 않으려는 마흔의 불혹(不惑)의 나이를 앞둔 이들이다. 시기적으로 지금은 밖에 널려있는 대다수의 것을 안으로 모아들인 찬바람이 드는 늦은 가을이지만, 어떻게 보면 나이 사십을 앞에 둔 우리들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이는 것들을 모아들여 그것을 거름 삼아 화사한 꽃밭을 만들어내려고 애를 쓰는 때이다.
그런데 꽃밭의 꽃은 화사(華奢)하기도하지만 화려(華麗)하다. 나는 위 글을 쓴 시인에게 실례인 말의 비약(飛躍)을 하려한다. 사치스러운 화사함보다는, 아름다운 화려함이 어떻겠는가? 우리들은 아이 때부터 옛날 전래(傳來)의 이야기들인, 뜻을 세워 고난을 잘 참고 앞으로 나아가 그 뜻을 이룬 사람들의 입지전(立志傳)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 전설적인 “골리앗”과 같은 위대한 그러한 사람보다는 다들 그만그만한 “도토리 키 재기”의 사람들이 산다. 그렇다고 해서 평상(平常) 속에서의 그저 자수성가(自手成家)의 밥 먹고 살만하면 되었다는 식의 가족이기주의(家族利己主義), 그리고 더 광범위한 소위(所謂) 밥그릇싸움이라고까지 말하는 집단이기주의(集團利己主義) 속으로 매몰되어 가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서로서로의 아름다움을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여기 바울이 옥중(獄中)에서 전하는, 공동체(共同體)를 이루라는 편지글을 볼 수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그렇게 해서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돌보십시오(빌립보서 2:1-4 -공동번역성서)
공동체 이야기
무래의 아픔
건강하던 사람도 항상 몸이 여전하지만은 않은 가보다. 한 해가 다 가기까지 오지 못하던 무래의 어머니와 누이가 휴일에 맞추어 왔다. 무래에게는 그렇게 기다리던 어머니였다. 보지 못하므로 보고싶어하는 그 그리움. 그에게는 바로 그 그리움이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지만, 그는 매일 매일이었다. 그의 보고싶어함에 비하면, 반가운 어머니와의 마주함은 그렇게 길지 못하였다. 얼마 안 있어 어머니는 곧 돌아가셨다. 집에서 가지고 온 것을 무래는 그날따라 많이도 먹었다. 그것이 그래서였던지? 낮에는 화장실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다. 그러면서 자리에 누운 그는, 저녁때가 되어도 일어나지를 못하고 자리에 누워만 있다. 나는 마을로 내려가 약방에 들렀다. 쉴 사이 없이 토하였으면 약보다는 병원에 가서 링겔을 맞으라는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약을 내어주셨다. 밤이 깊어져가면서 그의 몸도 더욱 안 좋아져 가는 것 같았다. 같은 방에 계시는 선생님이나 우리들은 함께 걱정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약을 먹였다는 것으로 안도를 삼았다. 그렇게 밤은 지났다. 다음날에는 죽 몇 술로 아침을 겨우 먹었다. 나는 구급차를 부르고, 시골의 어머니와 담 하나를 사이로 한 교회 목사님께 전화 연락을 드려, 병원으로 가겠으니 그곳으로 오시라고 하였다. 병원에서는 무래가 급성 위장염에 탈수현상까지 같이 나타났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곧 병원에 입원하였고, 옆에서 어머니가 그를 보살펴 주셨다. 입원 후 일주일이 지나면서 누워있던 그는 차츰 걷기 시작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픈 것이 어머니를 옆에 계시게 하면서 볼 수 있게되는 일이니? 가시밭길의 형극(荊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병원에서 퇴원을 한 후에도 어머니는 그와 같이 몇 날을 더 계시다가 가셨다.
늦은 가을 어느 날 점심 후에 바깥 나들이를 하자는 조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 학교 앞을 지나면서 공부를 마치고 문방구점 앞에서 두 딸아이가 서성였다. 한 아이는 우리를 따르겠다고 하였고 한 아이는 집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한 아이를 집으로 보내고, 셋이서 길을 나섰다. 가려고 하는 곳은 안으로 들어가는 마을인 성당리(聖堂里)를 지나, 그리고 도내(道內)에서의 최고봉인 서대산(西大山) 아래 기슭의 개덕사라는 절집 뒤에 있는 폭포이다. 이곳은 전에도 우리들이 이따금씩 갔다 왔었다. 앞서가시는 어머니를 뒤따르면서 생각한다. 한 주간이 지나면 삶의 자리를 옮겨가시는데 그곳에서도 잘 계셔야 할텐데. 대전에 아파트를 정하여놓고 순서가 되어서 입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 갔다가 오면서도 내내 그 생각이었다.
건강하게 그리고 잘 계셨으면 한다.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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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정무래
박종만
어귀녀
박병민.진선미.한솔.진솔
* 정무래 형제가 02년 10월 29일에서11월 9일까지 위장염과 탈수증상으로 새금산병원에 입원하였었습니다.
* 02년 6월 2일에 대전에서 다시 오신 조점숙 어머니께서 대전에 아파트를 마련하게되어 11월 11일에 그곳으로 거주를 옮기셨습니다. 그곳에서 잘 생활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성남교회안수집사회.주식회사EG(이광형).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2인).어귀녀.정무래.김기홍.만나교회(전남홍외9인).동산베이커리.세상을아름답게만드는사람들(4인).정주래.새로남교회7여전도회(8인).채윤기(박현실).박종만.예전교회(백종석).세광교회.왕지교회.대덕교회박정도.추부초등학교(7인).그리스도의집
옥천동부교회.대덕교회(이중삼).정진일벧엘교회(양순우외4인).대전일보(김세원외1인).정진일.조점숙.낭월교회5여전도회(6인).한삼천교회.추부보건진료소(이현순)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