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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 · 1,000회를 기념하여 물빛 회원이었던 이도원 소설가께서 축하금을 전하셨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 故 차재희 시인님의 가족께서 조문과 근조 화환을 보내준 물빛 문학동인의 모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셨습니다.
* 일시: 2025년 11월 11일(화), 19:00~21:10 T그룹 전화 토론
* 참석: 이진흥 선생님, 고미현, 곽미숙, 김용순, 박수하, 박유경, 배정향, 양다연, 이규석, 이자, 전영숙, 정정지, 박경화
* 토론 작품: (작품 평은 ‘작품 토론방’ 참고)
1. 이규석: 단풍
2. 곽미숙: 어떤 대화
3. 전영숙: 이동
4. 배정향: 위대한 쌀알들
5. 김용순: 거울 속으로
6. 박수하: 홍꼬투리 조막손
7. 박경화: 눈먼 시인
*
문학동인으로서 한 달에 두 번씩의 토론 모임을 42년간 해오며 횟수가 1,000회에 이르는 것은 아마 대한민국에서 처음이 아닐까 싶다. 그 횟수 속에는 토론 모임 외의 출판기념회도 있을 테고, 이진흥 선생님의 강연회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제목을 가지고 모이든 물빛은 시를 공부함에는 1회 때나 1,000회 때나 똑같다. 그 똑같음 속에 우리 선생님의 한결같으심이 중심을 잡고 계셨다.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며,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서정시의 원형 같은 선생님의 시들을 읽으며 감사와 존경, 사랑을 보낼 뿐이다.
선생님, 늘 고맙습니다! 선생님과 가족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
나는 반딧불,
이진흥
깊은 밤, 반딧불만한 것을 켠다
불빛의 가장자리가 젖는다
창문을 연다
먼 곳에서 누군가 못을 박는다
쩡, 쩡, 쩡, 산이 울린다
별들이 왈칵 흐려진다
알 수 없는 것에 목이 메인다
번쩍, 칼날 같은 게 지나간다
오, 나는 즐겁다 나는 칼 같은 기쁨, 내 숨결이 닿는 곳마다 쩡, 쩡, 쩡, 서리꽃이 핀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나의 시야를 스치고 지나간 햇살의 한 순간이 얼마나 눈물겨운 것인가를······ 오, 나는 빛나는 고통, 나는 반딧불,
*
나는 2초 동안 숨이 막혔다
이진흥
에드바르트 뭉크의 ‘사춘기’를 보고
나는 2초 동안 숨이 막혔다
화폭 위로 내 죄의 청동 그늘이 스치고
그늘 한 끝이 벗겨낸 순결
그녀는 20년 동안 내 심장에 박혀 있는
꽃씨처럼 아름답다
발가벗고 앉아서 작은 가슴과 어깨를 드러낸 채
두 팔을 X자로 꼬아 앞을 가리고 있지만
가린 쪽은 오히려 이 편이다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보아버린 그녀의 눈망울엔
산나리꽃의 한 순간이 열리고
어깨 뒤로 어둠의 잎사귀가 떨고 있다
부르르 떨리는 내 죄의 청동 그늘 너머
발가벗고 앉아 있는 투명한 크리스탈
갑자기 어디선가 빙산이 깨어지고
그녀의 알몸은 보이지 않는다
다가갈 수도 돌아설 수도 없는 청정한 눈빛
그녀는 20년 동안 내 심장에 아름답게 박혀 있는
가혹한 순결이다
에드바르 뭉크, ‘사춘기’
*
크리스마스
이진흥
당신을 생각하면
내 몸 속
천 개의 꽃씨들이 일제히 불을 켜고
함성을 지릅니다
라일락 향기처럼 침략해 오는
이 비밀한 기쁨
벼랑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는 화려한 고통
당신을 생각하면
내 몸 속
만 개의 꽃잎들이 찢어지며
둥, 둥, 둥, 까마득한 하늘로 날아올라
첫새벽의 별빛에
키스합니다
(이진흥 시집 『칼 같은 기쁨』 중에서. (1999년 10월, 문학세계사 발행) )
*
없다
이진흥
봄날
꽃을 본다
마음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봄바람에
마음을 날려버린다
텅 빈 몸 저 쪽
그림자만 보인다
어디에도
없다
*
모과나무 뒤쪽
이진흥
어두운 들판 길을
병아리 한 마리 울면서 간다
오이산 동쪽 어딘가에
별똥이 떨어지고
뜰 앞에 모과나무
잎사귀 몇 개 흔들리는데
무엇일까 저기 희끗
모과나무 뒤쪽으로 사라지는 것
그런데 지금 등불도 없이
병아리는 울면서 어디로 가나
모과나무는 조용한데,
*
매화
이진흥
깊고 추운 밤, 문득
물소리 들린다
적막 속에 갇혀 있떤
여자가
커튼을 찢고 나온다
혹한의 긴 겨울,
캄캄하게 숨겨온 속살을
허공에 드러내는
오, 저 봄날 아침의 기적!
*
운흥사 벚꽃
이진흥
운흥사 마당에서 꽃을 본다 꽃은 보이지 않고 한바탕의 춤판이 하늘을 덮고 있다 웬일인가 돌아보니 춤사위에 싸인 내가 꽃을 가리고 있다 얼른 나를 치우고 보니 햇살의 혀가 꽃나무 등걸을 핥아주고, 꽃나무는 분홍치마를 펼쳐들며 한 바퀴 돈다 깜짝 놀란 풍경소리가 한 걸음 물러서자 천 개의 꽃잎들이 하르르 몸을 날리며 눈부신 봄날을 살해하고 있다
*
이상한 일
이진흥
콩 심은 데 콩 나다니
이상하다 일찍이 나는
스무 살 언덕에 꽃씨 하나 심었는데
오늘 일흔의 들판에 웬
늙은 나무 한 그루 서 있나
지난 봄 이오가 동쪽 울타리에
푸른 리본을 매 놓았는데
어째서 이 가을 붉은 노을이
오이산 서쪽 능선을 물들이는가
씨앗은 아래로 떨어지는데
싹은 위로 솟아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니 이상하다
작년에 죽은 살구나무는
봄이 와도 잎이 나지 않는데······
*
지금 여기
이진흥
그때 거울 속에서 너는 나무였고 돌이었고 골짜기였다 너의 가지를 흔들던 바람 너의 어깨를 휘감던 안개 그리고 너의 골짜기를 건너던 허리 구부정한 그 사람
이제 바람은 거울 속 풍경을 흔들지 못한다 안개는 더 이상 어둠 속 물상을 휘감지 못한다 그 사람은 다시 골짜기를 건너오지 못한다
그렇다 모든 것은 일회적인 것, 다만 너의 나무는 무성한 기쁨으로, 너의 돌은 단단한 슬픔으로, 너의 골짜기는 심연으로 깊어져서
오 지금 바로 여기, 반야바라밀
*
나비처럼, 힘껏
이진흥
네게로 가겠다
칼날 감추고 숨어들어
금기의 제단 위에
치명적인 유혹을 놓고
너를 포획하겠다
심장을 찔러 피를 마시고
쇠의 고통으로 절뚝이며
아슬한 벼랑 끝
가파르게 다가서겠다
아름다운 구부림과 숨 막힘 사이
한발 내어 딛고
전신으로 힘껏, 무너지겠다
나비처럼 사라지겠다
*
그때 거기
이진흥
내가 있었던가
얼핏 새소리 들렸던가
그림자 하나 재빨리 지나간
골목길, 바로 그때
거기에서였던가
건너편 이층 유리창 햇살에
눈이 찔려 캄캄해지던
순간, 새소리 들렸던가
그림자 하나 지나갔던가
지금은 갈 수 없는
그때 거기?
*
적천사 물소리
이진흥
서덜 磧 내 川의 적천磧川, 그곳의 물소리를 들어보셨는지요, 그 소리가 어떻게 華岳의 심장을 씻어내는지, 지눌의 지팡이였다는 은행나무의 몸통 속을 얼마나 깊게 울리는지······ 그 소리는, 언젠가 내가 화악의 기슭으로 숨어들다가 다람쥐 눈빛에 발이 걸려 넘어지던 순간, 바로 그때 내 몸을 관통했는데요. 마치 옛 스님의 노래처럼, 늙은 소나무에 걸린 무지개가 화악의 현絃을 고르는 소리였는지, 혹은 능선의 햇살과 계곡의 그늘로 적막의 비단을 직조하는 베틀소리였는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소리였는지 빛이었는지도 모르겠는데요, 분명히 들었지만 못 들은 것 같기도 한,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는······
*
지조와 굴종
이진흥
먹이사슬 꼭대기의 호랑이는 멸종되어 가는데 인간에게 충성! 하는 개는 번성하고 있다 실리를 쫓아 주인에게 굴종하는 개와 고고하게 도태되는 호랑이의 지조, 어느 쪽이 더 현명한 것일까
가을 들판에 일렁이는 황금물결을 보라 인간에게 몸을 바치는 대가로 풍부한 물과 열영가 높은 비료를 듬뿍 받아 살찌는 벼를 심산유곡의 산삼에 비교하여 굴종과 지조를 떠올리는 것은 죄스럽다 그러나 분명히 야생의 독수리는 줄어드는데 양계장의 닭은 오늘도 수없이 알을 낳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종족은 누구에게 추웅성! 하여 이처럼 번성하고 있는 것일까 재배와 사육으로 견고한 먹이사슬의 질서를 깨뜨리고 그들의 성채는 눈부시다 그러나 오늘 눈부심의 안 쪽 승리의 마당에는 호랑이도 개도 사라지고 지조와 굴종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불안의 나무가 고독한 그늘만 드리우고 있다
( 이진흥 시집 『어디에도 없다』 중에서. (2016년 10월, 동학사 발행))
* 10월 29일 수요일, 고 차재희 시인 입관
차재희 시인을 조문 후 입관 시간까지 기다리며 차 시인의 여동생분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니와 꼭 닮은 동생이셨다. 얼굴 생김새와 말투, 잠깐 느낀 것이지만 성격까지 언니를 빼닮아서 한 핏줄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같은 동인, 정정지 시인님과 조문하고 점심을 같이 먹으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시를 공부하다가 어느 날 그렇게 장례장에서 작별하는 일, 어쩌면 한 번은 겪을 일이겠지만 너무 이른 작별에 슬픔이 컸다.
맑고 둥글며 큰 눈은 차 시인님과 정 시인님이 똑같다. 순수하고 모범생 같은 면도 똑같다. 그런 두 분을 늘 존경하고 있다. 최근에 정 시인님도 건강이 조금 좋지 않았는데 이제 회복되셔서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고 있다. 많은 말 없이도 마음은 통하는 것 같은 분들 중 두 분이셨는데, 한 분은 이제 먼 곳에서 나를 지켜보실 것이다.
여동생과 한 분 계신 시누이께 내 이야기를 많이 해서인지 나를 다 알고 계셨고, 조문하러 들어설 때 영정사진 속 차 시인께서 나를 보며 왜 이제 왔냐고, 툭 치며 웃는 느낌이었다.
입관 때의 차 시인은 생전보다 더 고운 모습으로 환하고 젊어 보이셨다. 주무시는 듯한 뺨에 입을 맞추고, 귓가에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이진흥 선생님과 물빛 동인, 소리와 편지 회원들의 마음을 전하고 병원에 계실 때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에 용서를 구했다. 존경하며 사랑한다고, 함께해서 행복했다고도.
돌아올 때는 가족 모든 분과 손을 잡고 포옹도 하며 일일이 인사를 했는데 어느 조문에 갔었어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내가 마치 차 여사님 대신 가족을 안아주며 작별하는 느낌이었다. 영혼이 있다면 누군가를 통해 손을 잡아보고, 안아보며 떠나지 않았을까 싶었다. 장례장을 나서는데 도원 씨가 전화 와서 만나 이른 저녁을 먹고 차 여사님을 추모하며 즐거웠던 추억을 이야기하니 슬프고 우울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마치 도원 씨가 사주는 저녁이 차 여사님이 사주시는 것 같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참 선하고 순진하셨던 분! 도원 씨와 나는 차 여사님의 몫까지 열심히 써야 할 것이다. 도원 씨는 자신은 소설 쓰고, 일하느라 이런저런 인사치레 등을 하지 못하며 인간 노릇을 제대로 못하며 살고 있다고 자책했다. 마음 아픈 이야기였지만 그런 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하며 그 노릇을 소설로 다 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예전에는 장례식에 가면 아무것도 먹지 못했었는데 이제 고인과의 마지막 식사라는 생각이 들어 밥이나 김치를 많이 먹는다. 나도 많이 변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변한다’는 말만이 변하지 않을 뿐 다 변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뭐든 좋게 변할 수 있기를!
* 11월 10일 월요일, 김정녀 물빛 초대 회장님과 통화
1,000회 물빛 토론 기념 및 출판회에 혹시 1기였던 분들이 오실 수 있을까 싶어 몇 분께 전화를 해보았는데 모두 못 오신다고 하며 축하의 말씀들을 해주셨다. 그중 김정녀 선생님과의 통화가 감동이었다.
먼저 전화를 하려고 했었다면서 축하의 말씀과 여러 가지 덕담을 해 주셨다. 이분과의 통화는 늘 나를 아기가 되게 한다. 마치 엄마를 찾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 들게 한다. ‘엄마, 어머니’가 누구인가, 나의 원조이며 나의 힘이고 나의 생명을 있게 한 분이지 않는가! 김정녀 선생님이 물빛 초대 회장이기에 나도 모르게 갖게 된 생각이지 싶다. 물빛 어머니라는 생각!
함께하지 못해도 멀리서 늘 지켜보며, 늘 잘 되기를 바라며, 늘 사랑하고 계시는 분이 어머니시다. 그런 분이 김정녀 선생님이시다. 전화를 할 때마다 여러 가지 물빛 상황들을 물으시거나 옛 추억을 이야기해 주신다. 10기로서 물빛에 합류한 나는 한 번도 함께 공부한 적은 없지만 늘 함께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만큼 마음으로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뜻일 것이다.
홈페이지가 다음 카페로 바뀐 것도 알고 계시며 읽을 수 있는 글들은 다 읽고 계시다는 말씀에 깜짝 놀랐다. 정말 물빛다운 분! <정겨운 속삭임>을 통해 차재희 시인의 별세를 알게 되어 지금 다니시는 서울 봉정사에 가서 기도와 초를 켜신다고 해서 한 번 더 놀라고 감동했다. 잊지 않음이란 누군가를 위해 촛불 하나 밝히는 그런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된 이야기는 물빛 회원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시들이 다 좋다는 것과 우리 이진흥 선생님께 대한 감사였다. 그 감사란 그냥 의례적인 감사가 아님을 물빛 회원님들은 다 아실 것이다.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선생님께 대한 마음이며, 한 분의 귀한 스승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일 것이다.
물빛의 42년, 1,000회가 있을 수 있도록 해주신 이진흥 선생님과 1기이신 회원님들이 다져준 터에서 제각각 뿌리를 내리고 꽃과 잎, 열매를 맺고 있는 물빛님들의 시에 대한 열정이 앞으로도 식지 않기를 바란다. 그 열정이 고운 빛으로 흘러가며 시를 남길 수 있기를 또한 바란다. 1,000회를 끝으로 다시 시작하는 물빛이기를 기도한다!
* 11월 11일 화요일, 물빛 1,000회를 기념하는 나만의 시구절들.
· 한평생 시퍼렇게 살았으니/ 이제 얼굴 좀 붉어도 되겠지 (이규석, ‘단풍’ 중에서)
· 이제 손 잡고 먼 길 떠나도 걱정 없겠다 (곽미숙, ‘어떤 대화’ 중에서)
· 동작이 클수록 적막이 오래 남는다 (전영숙, ‘이동’ 중에서)
· 생명의 역사인 밥이여/ 밥이 피가 되는 길 (배정향, ‘위대한 쌀알들’ 중에서)
· 마침내 큰산을 넘으리라 (김용순, ‘거울 속으로’ 중에서)
· 내 별은 내가 딸 테니 걱정 마소 (박수하, ‘홍꼬투리 조막손’ 중에서)
· 날갯짓, 시를 쓰며/ 볼 수 없던 세상을/ 마음껏 보네 (박경화, ‘눈먼 시인’ 중에서)

첫댓글 정성과 땀이 가득히 배인 후기에 절로 감동이 내려옵니다
오랫토록 기억될 정성에 감사드립니다 ❤️
올해 회장으로서의 후기이며, 저만의 물빛 일기인 셈입니다.
막 쓰고 막 올리는 막글이라 부끄럽긴 하지만 그때 그 순간의 느낌을 남겨두고 싶어서 쓰는 글이지요.
윤슬 님의 감사하는 마음에 저도 감사드립니다!